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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Different)과 그름(Wrong)을 분별하지 못하는 세대들(배현주목사

배현주목사(고양)

by 김경호 진실 2018. 7. 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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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Different)과 그름(Wrong)을 분별하지 못하는 세대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다름(Different)과 그름(Wrong)을 분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역사적 과오가 너무 많다.

때로는 다름(Different)을 서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싸우고 다투고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그름(Wrong)을 분별하지 못해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리를 받아들여서 교회가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인간들의 인식의 오류는 결국 전적 타락 교리로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무엇보다 인식의 타락은 모든 전적 타락의 영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인식의 타락으로 인간들은 진리를 옳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다름(Difference)을 서로 받아주지 못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때로는 그름(Wrong)을 받아들여서 혼합주의가 된다.

그렇다면 다름(Different)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로 피부색이나 인종 그리고 남여의 성별의 차이와 세대간의 차이도 다름(Different)이다.

그리고 지방색이나 혈연이나 학연이나 학벌까지도 서로 다름(Different)이다.

부요하게 사는 것과 가난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분배적 은혜 안에서 서로 다름(Different)이다.

결코 부요하게 사는 것이 의로움이 아니며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악도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것(Difference)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회적 몰락을 통해서 부요하게 사는 것이 선이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악이라고 규정되어서 부요하게 사는 자들의 몰상식한 행위가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요하게 사는 것이 선이라거나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악이라고 한다면 고아와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악하다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다름(Difference)을 그름(Wrong)으로 인식하여서 자기와 다른 자들을 핍박하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것이 인생들의 인식의 타락으로 비롯된 인식의 오류이다.

그렇다면 그름(Wrong)을 단지 다름(Difference)로 인식하여서 발생하는 혼합주의는 어떠한가?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이 다원주의 사회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험한 발상은 다름(Difference)을 인정하자는 것을 넘어서 그름(Wrong)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실로 그른 것(Wrong)을 다른 것(Difference)으로 인식해서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것(Difference)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살펴 보면 그른 것(Wrong)이 있다.

십계명의 두 돌판은 그릇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계시한다.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는 그른 것(Wrong)이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도 그른 것(Wrong)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도 그른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도 그른 것(Wrong)이다.

무엇보다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은 우리 사회에게 그른 것(Wrong)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그른 것(Wrong)이다.

그리고 살인하는 것도 그른 것(Wrong)이며 도적질 하는 것도 그른 것(Wrong)이다.

그리고 간음하는 짓도 그른 것(Wrong)이며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는 것도 그릇되다.

무엇보다 이웃의 것을 탐내는 행위는 더 할 나위 없이 그릇된 것(Wrong)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십계명의 가르침조차도 그냥 다른 것(Difference)으로 돌리려는 악한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명백하게 간음죄가 되어도 그것을 인간들의 각자 다른 성적 취향이라고 호도하며 다른 것(Difference)이라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성소수자 보호 정책이다.

이것은 그른 것(Wrong)을 사회가 보호하려는 실로 죄악된 처사이다.

이렇게 그른 것(Wrong)을 다른 것으로 인식해서 받아들여서 죄악과 혼합되어 버리는 교회도 있다.

루터 교회가 주장하는 거짓 교리들은 그른 것(Wrong)이다.

그것은 다른 것(Difference)이 아니다.

양식사 비평, 역사 비평, 역사적 예수 연구 그리고 과정 신학, 신신학, 여성 신학, 민중 신학 등등은 그른 것이다.

그러한 신학적 움직임은 그른 것(Wrong)이지 다른 것(Difference)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가 그 그른 것(Wrong)을 다른 것(Difference)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 심각하게 교회가 훼파되었다.

개신교 역사는 지금의 신자들에게 다름(Difference)과 그름(Wrong)의 문제에 대하여서 해법을 제시한다.

16세기 개혁 교회 역사 안에서는 제네바 개혁 교회와 취리히 개혁 교회 그리고 스트라스 부르그 개혁 교회가 있었다.

서로 약간씩 달랐다. 그것은 다른 것(Difference)이다.

그리고 17세기 프랑스 개혁 교회와 화란의 개혁 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 개혁 장로 교회는 약간씩 서로 달랐다.

그것은 각 나라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다른 것(Difference)이다.

그러나 18세기가 도래하면 개신교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그것은 그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 버린다.

잉글랜드 국교회가 정통 개혁주의 교리를 거부하고 알미니우스 교리와 감독 제도를 따라서 세워졌다.

그러므로 잉글랜드 국교회의 교리는 다른 것(Difference)이 아니다.

그것은 그른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 교리와 알미니우스 교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 교리가 TRUE 라면 알미니우스 교리는 FALSE가 된다.

그러므로 정통 개혁주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알미니우스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 개혁주의 입장에서 알미니우스 교리는 그른 것(Wrong)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가 도래하면 더 이상 그른 것(Wrong)이 그른 것(Wrong)이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가 인식 코드를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종교의 핵심적 자리를 교리에 두지 않고 인간의 종교적 정서에 두는 종교로 인식의 코드가 전환되었다.

이렇게 종교를 인식하는 코드의 전환은 종교의 본질적 변태를 가져왔다.

더 이상 종교는 교리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정서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가시적 성과로 판결난다.

그래서 18세기 이후에 개신교는 종교 정서주의를 따라서 발달한다.

그래서 이제 그른 것(Wrong)으로 인식해야할 거짓 교리들은 무수히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개신교 내에서 그릇된 종교 운동으로 인식해야할 감리교의 부흥주의가 종교의 인식 코드의 변경으로 인하여서 인식의 오류를 일으키며 너도 나도 그러한 종교 정서주의적 코드를 따라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18세기 북미 대륙의 영적 대각성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인식 코드가 변경된 이후로 그른 것(Wrong)을 서로 다른 것(Difference)으로 인식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갔다.

결국 그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식하도록 종교 인식 코드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는 우후죽순 변경된 종교 인식 코드로 인하여서 부흥주의 교회가 되어 갔다.

그래도 18세기의 부흥주의는 약간의 교리적 건전성이 담보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북미의 제 2 차 대각성 운동이 시작되면 더 이상 교리적 건전성 조차 담보할 수 없는 그릇된 종교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결국 의지의 신학이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며 교회는 더욱 이방 종교화 되었다.

구교였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한번 실패한 인식의 오류에 개신교가 다시 발을 내딛었다.

개신교는 점차적으로 종교 정서주의를 따라서 부흥주의를 구호를 가지고 더욱 진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그릇된 것(Wrong)을 다만 각 종파에 따라서 다른 것에 불과하다는 거짓된 인식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이방 종교적 종교 현상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오순절 운동이며 그 뒤를 이어서 발생한 신사도 운동이다.

이러한 비극적 오류는 결국 그름(Wrong)을 다름(Different)으로 인식한 지상의 교회의 인식의 오류로부터 비롯된다.

이제는 돌이킬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이 다원주의 사회가 되어서 교회의 다원주의화를 부추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리를 주장하면 이상한 교회가 된다.

부흥을 추구해야 건전한 교회가 된다.

그 사이에 정통 개혁주의 교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근본주의와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온갖 혼합주의 종교 운동이 날게 달린 듯이 호황을 이루었다.

이제는 교회가 치리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 교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하여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의 인식의 오류는 그것이 정당화 될 때에 얼마나 심각하게 교회가 망가질 수 있는 가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인식의 오류는 지나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기 보다 종교적 인식의 코드를 전환하여서 종교 정서주의를 정당화 한 결과 비롯된 것이다.

다시 종교 개혁은 원전으로 돌아가라 (aD fontes)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새롭게 교회를 개혁하여 보겠다는 세력들의 가장 큰 오류는 18세기 이후에 종교를 인식하는 코드가 전환된 그 상태로부터 교회 개혁을 외치는 것에 있다.

그래서 개혁 교회를 진보주의 교회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Difference)이 아니라 그름(Wrong)이다.

개혁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과 별개로 진보주의 교회로 이끌어가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오류를 하나 더 범하는 죄악을 짓는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아가 “너희는 옛적 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살펴보고 그리고 돌아가라”(렘 6:16)선포하신 대로 지금의 개신교는 16~17세기 정통 개혁주의 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선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정통 교부 시대를 거쳐서 사도 시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종교 개혁이다.

오직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각각이 되지 말아야 하기에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이다.

그렇게 지금의 개신 교회는 지상의 교회의 불완전성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우리 인식의 오류를 받아들여서 거룩한 보편 교회가 수납한 교회의 공적 선포로서 교부 시대의 정통 교회 신조와 종교 개혁 시대에 신앙 고백서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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