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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자신을 부인함(히11:23-29)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8. 10. 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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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환난과 역경, 고난 속에서 아무런 걱정과 염려가 없이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진 믿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의심이나 놀라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믿음은 하나님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고 의심이 없고 놀라지 않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믿음이 역사하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거짓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마음만 먹으면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날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두려워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성도가 주님을 믿고 살면서 의심도 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믿음은 성도를 보존하고 환난과 고난의 역경 속에서도 놀랄 만큼 우리의 영혼 안에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죽음 앞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을 끝까지 고백하면서 죽음의 길을 단번에 의심하지 않고 마땅히 걸어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믿음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두려움을 이기며 인내하고 신앙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믿음입니다. 더구나 믿음은 생각할 수 없는 환난 속에서도 성도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지켜주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조상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은 고난당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거부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고 하는 것을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믿음은 모든 시험과 역경과 환난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믿음으로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파라오는 이방민족들 가운데 특히 히브리인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많아지고 힘을 모은다면 애굽을 나갈 것을 요구할까봐 애굽의 왕은 히브리인들의 자녀들의 수를 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아이가 태어나서 여자아이면 살려주고 남자 아이면 전부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의 빛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특별히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뜻을 올바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도 그것은 합당한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도 이러한 불법적인 명령에 순종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역사를 살펴보면 한국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타협하고 불의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지난날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자화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올바른 길을 정치지도자들에게 제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들의 바램 일 것입니다. 국가권련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늘 타협하였고, 세속권력을 한 번 가져보겠다고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무리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제 성도에게 있어 유일한 삶의 규칙과 방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들 삶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부모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거짓된 명령에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들이 태어나자 하나님께 분명 기도하였고 이 아들을 숨기면서 키웠습니다. 말씀을 보면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더 이상 숨겨 키우지 못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남자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크게 났을 것이고, 남편과 아내가 함께 자신의 아들을 지키려고 했던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부모가 서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협력하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자식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의지하고 신앙의 멍에를 같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부부가 서로 하나가 되는 일들이 현대교회 안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면서 참된 복음의 일꾼들이 사라지지 않게 계속 부르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므람과 요게벳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어떤 특별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은 이들 부모가 아이의 아름다움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식의 아름다움을 보고 숨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고슴도치도 자신의 새끼를 아름답게 여긴다고 하는 옛말이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개혁주의 주석가들은 한 결 같이 아이의 부모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특별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태어날 때 분명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아이의 생명을 보존할 것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므람과 요게벳이 석 달 동안 숨겨 키웠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갈대상자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 흐르는 강에 띄어 보낸 것입니다. 아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구니에 담아 어쩔 수 없이 보낸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보면 충분히 이들 부모와 가족들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쓰임을 받을 것을 믿고 행동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의 모든 학문과 배움에 부족함이 없도록 자라게 하시기 위해 애굽의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의 궁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세상의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 권력에 묻혀 살지 못하도록 모세의 친 어머니를 통해 궁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애굽 왕의 궁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부모에 대한 믿음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마음만 먹었으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세상권세를 가진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가 애굽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 때문에 도망 간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모세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이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해서 공주의 아들로 칭함 받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부리면서 사는 그 삶을 죄악의 삶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혈통적으로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혈족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신앙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혹자는 모세의 이러한 선택을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믿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섬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과 기름이 함께 하지 못하는 것처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면 당연히 세상의 권력을 함께 가지고 죄를 누리지 못합니다. 둘 중에 하나는 포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을 섬기든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기자는 아주 중요한 것을 모세를 통해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며 그 이유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는 것처럼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모세는 알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길을 걷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구원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는 1,500여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모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수모를 받는다고 하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모세를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위대한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 국가지도자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모세는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모세의 위대함을 우리가 찾는다면 그는 인격적으로 가장 뛰어납니다. 지상에서 모세만큼 온유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모든 면에서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또한 모세는 구약교회라고 하는 모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모형적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교적 국가로 부족함 없이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배치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주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을 전달해준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여전히 율법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당시 가장 뛰어나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후대에도 모세만큼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자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이라는 것을 즉흥적으로, 아니면 순간 자신의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일반적으로 즉흥적이거나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적이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내린 신앙의 결정은 마지못해 내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내린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기쁨으로 기꺼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진 믿음이 그렇게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가진 유대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늘 계신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고난을 받을 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도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인 교회의 머리와 몸은 같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것은 자신의 몸인 성도들을 위해 고난을 받은 것이 되고, 교회의 몸인 성도가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핍박을 받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잔해하고 핍박할 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네가 나를 어찌하여 핍박하느냐고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모세가 선택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즉 그 길은 구약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신앙은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신을 쓰고 있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 즉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면 고난을 받는 것을 피하지 말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교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룹니다. 무슨 일을 겪든지 똑같이 겪고, 같이 느낍니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부터 이미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 방식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후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애굽의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담대하게 나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치지 않고 애굽의 왕 바로에게 나가 네 아들 장자까지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상급에 대한 것을 접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주는 상은 우리가 받은 영원한 영광의 상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상을 주신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면서 계속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상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그 이상의 아주 영광스럽고 복되고 영원한 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모세의 부모들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실 위대한 일들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아주 지성적이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녀들이 고난을 당할 때 당신의 눈으로 계속 살피십니다. 가장 위대한 종교지도자였던 모세마저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난을 받기로 하였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신앙의 권면을 함께 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버리고 인간의 의지와 힘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안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함과 물질의 부요함으로 인해 인간이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을 버리면 이런 것들을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잠시 세상에서 누리는 죄악의 낙을 거부하고 주 예수와 함께 믿음으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6:25).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유효합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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