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 봄(히11:30-40) | |||
참된 구원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다시 뒤로 물러나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이 살았던 지난날의 삶의 방식대로 더 이상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자들은 결국 옛 사람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조상들이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배웠습니다. 이제 마지막 나오는 선조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모습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빼앗겼으며, 믿음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갔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사건과 이야기들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재미있다고 하면서 읽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인생을 믿음 안에서 끝까지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삶과 죽음 앞에서 고난과 슬픔 속에서 눈물과 피를 흘린 역사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평범한 한 개인의 인생에 대하여 우리가 쉽게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한 개인의 삶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중요하다고 하는 개인주의 사상으로 인해 타인들의 삶을 살펴보지 않고 쉽게 판단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주의 사상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바른 삶에 대하여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믿음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참된 지성을 통해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은 단순하게 그래! 한 번 믿어보자, 아니면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내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가져보자! 라고 하는 식의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 바르게 배우고 소유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 11장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듣기 전에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자 존 그레샴 메이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천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로 기울어진 것은 신앙에 대하여 반지성적인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을 반지성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정확히 지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믿음만 있으면 되고 목사의 말에 충성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또한 교회에서 신앙고백서와 교리들을 가르치면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교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당시 삼위일체, 기독론, 이신칭의라고 하는 교리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런 용어들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바르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오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교리들에 대한 분석과 정리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친히 자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 또한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신학적 교리들을 만들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친히 본 목격자들이고 증인들입니다. 인간적으로도 자식이 아버지에 대하여 특별하게 배울 이유가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전부를 압니다. 부모에 대하여 정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경을 통해 하나씩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셨던 방식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가르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보지도 못한 자들에게 제자들이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독특한 형태의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서신서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미 교리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과 또 다른 시간적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통해 친히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단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를 통해 가르쳐진 교리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믿음은 당연히 우리의 지성을 통해 바르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교회는 반지성적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였던 칸트 철학은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반지성적인 것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인간이성의 강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인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교의 신앙은 단지 신비스러운 것이며, 인간이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만이 신앙이라고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은 결국 교회에서 인간의 경험만, 즉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게 되었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움보다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신앙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옷을 입은 거짓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인간의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성도들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신앙의 체험은 마땅히 성도에게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선조들이 말하는 신앙의 경험과 오늘날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에서 말하는 신앙의 경험은 다릅니다. 우리 신앙고백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성도에게 주어지면 성도는 세상 속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은 자신들의 경험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복음에 대하여 자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 또한 복음 안에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예수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에게 복음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계속해야 합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백성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후손들에게 계속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계속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께서 성경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셨고, 그것을 읽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자세하게 믿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된 것입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을 정탐하게 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크고 난공불락의 성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성이 바로 여리고 성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위대한 요새로 불리는 성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전투에 앞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서 아주 독특한, 인간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전쟁 방식을 듣습니다. 여리고 성을 칠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나팔을 불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우리가 보기에 천년, 아니 만년 동안 여리고 성을 돌면서 나팔을 분다고 해도 여리고 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들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것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믿음에 대한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바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만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라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여 준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기생 라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통해 그의 후손들과 함께 하신 믿음의 사건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여자 라합입니다. 그것도 기생입니다. 도덕적이지 않는 그런 여자가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고 있었던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생 라합이 자신들과 같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증거되고 한 형제자매라고 하지만 어떻게 기생이며 이방인이 자신들의 조상들과 같이 믿음의 조상에 들어 있을까?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의 믿음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여리고 성을 정복하러 온 것이 아님을 알 고 있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유목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무기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기병대나 대포, 또는 강한 무기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라합이 믿은 것은 그들의 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할 때 홍해를 가르게 하신 일을 들었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 믿음에 근거하여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4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그 일을 이방 여인 라합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홍해사건도 주변의 이방세계에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땅에 증거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의 일도 쉽게 잊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순종한 자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의도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호수아와 라합의 관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여자이고 심판 받는 아모리 족속의 사람입니다. 기생입니다. 무너지는 여리고 성의 시민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을 찾는다고 하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은 신분과 지역과 혈통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믿음은 민족주의를 뛰어 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바르게 읽고 있다면 저렇게 팔레스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여호수아와 라합이 믿음으로 같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라합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주 의도적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한 것을 기록할 수 있지만 라합을 마지막으로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기드온을 시작하여 많은 사사들, 그리고 위대한 왕인 다윗과 사무엘도 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11장 33절 이하의 말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행한 것들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나라들을 이기고, 의도 행하고, 약속을 받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연약한 가운데 더욱 강해져 전쟁을 하였고 승리하였습니다. 35절에 나오는 여자들은 이방의 여인들로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엘리사는 이방의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이방여인은 죽은 아들을 다시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자신의 남편을 잃은 여인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모든 여인들이 믿음으로 부활을 믿었다고 하는 사실도 됩니다. 이렇게 다시 사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사건들도 있지만 지금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 형제자매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곤고와 환난이 있습니다. 성도는 늘 세상 속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시편기자는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바로 환난의 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되고 고난도 없고 환난도 없다고 하는 것은 사탄이 예수님께 시험하였던 그런 메시지와 같은 것입니다. 참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 때문에 고난과 환난을 당하지만 끝까지 이길 것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모든 조상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지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받는 이 땅에서의 환난은 우리가 받은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 가운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더 좋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된 것을 모두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약속된 것이란 무엇입니까?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좋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계시, 더 좋은 참된 제사장, 더 좋은 제사, 더 좋은 언약의 피, 그리고 더 좋은 영원한 본향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조상들은 더 좋은 것을 믿음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약의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었다면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 믿고 복음을 듣는다면 더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40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께서 하신 그 큰 구원의 일을 친히 다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참된 지성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이 날마다 저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늘 자신의 자녀들에게 비춰주시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부족해서 우리가 죄악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세상을 이기며,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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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053&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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