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세상을 살다 보면, 맞고 틀리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자녀를 기르다 보면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안들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철이 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이 다만 법적인 문제이거나 경우의 문제가 아니라 속깊은 차원을 지니라는 요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속깊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 깊어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속 깊음까지 깊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앙 단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라는 관계적이고 감성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시고 , 무엇을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단편적으로 어느 한 순간, 한 단면을 잘라내어 그 때 옳은 자리에 섰느냐, 틀린 자리에 섰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그로 그의 인생을 살게 하사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신 것 같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 년 다릅니다. 그렇게 커나가는 겁니다. 기도가 최고였던 순간이 있고, 전도가 최고였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닌 자리에 또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때 그 열심이 쓸데 없는 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돌아보면, 그 때 많이 자란 것을 깨닫습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제 영어 실력은 고3 때 중단되었습니다. 입시 때 공부한 것이 끝입니다. 제가 성경을 언제 많이 봤냐 하면, 대학 때 많이 보았습니다. 대학 4년동안 줄잡아 50독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미친 듯이 통독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통독했습니다. 그 때 읽은 것으로 여태까지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 그러면, "아! 정말, 믿음과 관계되는 구절이 어디 있었지." 비슷하게 그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 때는 제 눈에 성경 안 읽고 딴 거 하는 사람은 사람같지 않게 보였습니다. 성경이 너무 달고 재미있으니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 때는 "뭐해? 성경 봐. 기도 짧게 해."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겁니다. 이게 다 필요한 일이지만 이게 전부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전부가 되면, 율법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노력하고 성취한 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배제되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청년부가 미니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율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확 닿는 생각이 "맞다. 우리가 이 애들을 기르지 않았다. 하나님이 기르셨다. 어떻게 저렇게 잘 컸을까?"였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다 키워봐서 알잖아요. 이게 뭐, 말을 듣는 자녀는 없습니다. 사람은 강아지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도록 되어 있지만, 생각한다고 바로 답을 얻는 게 아니고 , 갈등하고, 방황하고, 먹먹한 과정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정답을 아니까 자꾸 자녀를 다그치는 겁니다. "지금 우물쭈물 할 시간이 어디 있어? 한 시간이라도 앉아서 공부 한 자라도 더 해" 우리는 다 아는 결론이지만 자식은 반발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 갈등으로 허비한 시간을 하나님이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게 놔두지 않고 자라게 만드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만드십니다. 우리 현실이 경쟁과 승리를 요구하고, 실패하고 무능하면 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구장에 가보면 별 사람이 다 와서 당구를 칩니다. 그 별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당구칠 능력이 없는데 와서 치고 노는 사람입니다. 당구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 실력이 없는겁니다. 봐도 뻔합니다. 그런데도 당구를 치러 잘 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아마 그러시겠죠. "에구, 그러니까 저렇게 살지" 여러분 그러지 좀 마십이오. 당구도 돈 내고 치는겁니다. 무능하면 와서 당구도 칠 수 없습니다. 돈 낼 실력이 있어야 와서 당구도 치는겁니다. 그 별사람이 아무 수입도, 살아남을 조건도 없어보이는데 당구를 치는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아니 왜 야유를 보내십니까?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가지세요. 거기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말씀은 바울이 돌아보니까 예전에 그가 맞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전혀 방해가 되었더라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이야기는 "너 그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 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공중 나는 새는 다 어디로 간겁니까? 들에 핀 백합화는 다 어디로 간 겁니까? 이런 말은 사실 지난 30년간 경제 성장 속에서 돈의 위력을 우리가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더 신앙적이지 않은 부모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 예수 믿어서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너도 예수 믿어라"가 아니라 "너 지면 안된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이야기가 왜 그리로 갔습니까? 예수 믿으면 갖게 되는 최고의 덕목은 넉넉함입니다. 그 넉넉함이 없으면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다려 줄 수 없고, 겸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랑과 승리 속에서 나오는 겸손과 용서는 감춰진 오만이고 경멸이고 동정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신앙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슬러 가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박영선목사님 특강 (남포교회여름수련회)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중에서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OD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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