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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도다!(눅2:25-35)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8. 12. 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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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도다!(눅2:25-3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참으로 어리석다고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그들의 눈앞에 밝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성도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들이 자신들의 두 눈으로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 후의 모든 제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들을 마치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들은 것처럼 확실하게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부활하는 것도 믿기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보다 또 다른 차원의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까? 기독교가 무엇이냐고 말할 때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장 중심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고 하는 이 믿을 수 없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존재가 어떻게 인간으로 올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이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연인이 이것을 믿는 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놀라운 표적과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일로 모든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저 탁월한 선지자나, 랍비정도로 그렇게 자신들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인지 정말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예수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이 사건은 그저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에서만 있는 신화로만 여기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고 하는 이 단어는 오직 기독교에만 적용되었던 용어입니다. 계몽주의 이전에 종교는 오직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만이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것에 종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종교는 오직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와 우상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것을 싫어하였습니다. 왜 기독교만 종교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종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기독교만 종교가 아니다. 다른 신들도 있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가 있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오직이라고 하는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난해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직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이유가 다른 종교가 없고, 다른 믿음도 없으며, 다른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예수만이 구원이시며, 이 분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지적인 지식이나 이해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신비하고 믿을 수 없는 사건을 사람의 지성으로 믿을 때 오히려 깊은 암흑 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사건을 자신들의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지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현대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다 교회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있어도 부활은 제자들의 가르침 때문에 부활이 있지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아도 된다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단지 제자들의 가르침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구원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고 하는 이 사건 속에 죄인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말씀에 이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을 본 사람들이 단지 요셉과 마리아만 아니었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잉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사람 시므온이 태중의 아이가 아닌, 어린아이로 출생한 아기 예수를 보고 자신의 두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잠시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탄을 기념하는 모습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성탄절 전야 발표들을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아기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탄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만 그려집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개신교 안에 즐비한 것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영향이 바로 로마교회의 영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로마카톨릭의 부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즉 어린아이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경배와 찬양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영향으로 그들 안에 아기 예수의 형상이 교회들 마다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 이것이 그들의 신앙전부입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이런 어리석은 모습으로 성탄절만 되면 아기 예수만 찾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났을 때 비록 어린 아이였다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시므온의 찬송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만 오신구주를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 모든 신비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신앙고백과 오늘날 현대교회가 성탄을 축하하면서 아기 예수의 오신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이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노래하는 이 신앙과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축하 공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그 차이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주는 즉흥적인 발표는 그저 자신들의 두 눈으로 축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것을 깨닫고 찬미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시므온을 통해 아기 예수를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는 시므온이라고 하는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지 그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의롭고 경건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 표현 속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그 시기에 이스라엘은 곳곳에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속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민치하에서 벗어나는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로마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기만을 소망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경건과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이 경건과 의로운 사람이하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돌 판과 관계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하는 말은 예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이라고 하는 것을 미래의 일로 여기는 것은 세속무당들이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예언을 보면 한 결 같이 다 율법과 관련되어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자신들의 주인이 되어 패역한 삶을 살아갈 때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되돌아보고, 현재 율법 안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에 이 율법을 완성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율법은 결국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 하에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가 율법 안에서 지금까지 경건과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기 예수를 보여주시자 이 아기가 구주라고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노래합니다. 이 의미는 시므온이 구주를 자신의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시므온이 지금 말하고 있는 주의 구원이란 다름 아닌 구원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 이하에 보면 주의 구원을 보고 그 구원의 내용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이 구주의 오심을 보고 이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이끌어 주실 것을 바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성육신하신 이 성탄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육체의 생명을 평안하게 놓아주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보면 시므온 보다 더 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내용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 속에 우리의 죽음을 더 평안하게 기다리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으로 주의 구원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두 눈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팔에 안아 볼 수 없지만 모든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오히려 더 복되고 빛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31절 말씀부터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 시므온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비추십니다. 세상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높아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기를 품에 품고 이런 예언을 하는 시므온의 말을 듣는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오히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므온의 예언처럼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 놀라운 찬송과 경배와 복음의 자랑을 위해 당연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폐함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며 성육신을 믿는 자들은 흥함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성육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은 성탄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성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육체의 쾌락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라고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셨는데도 악인들은 계속 악을 행하고 모사꾼들은 계속 모사를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신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의미를 알고 주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불의한 자는 계속 불의한 일을 도모하고 악인들은 악을 일삼고 가난한 자들과 소외받는 자들은 계속 고통을 받으면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의 권세 밖에 없고, 연예인들은 더 젊고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고, 한 쪽에서는 직장을 구하는 일로,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이런 일, 저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를 짓는 일이 더 다양하고 강력해진 것 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해년마다 더 많이 전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 탄생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픈 환자에게 강한 항생제가 듣지 않는 것처럼, 해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 중요한 의미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역사를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방식대로 이루시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일을 안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을 보면 또한 자랑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역사를 일으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노래하는 하면서 알려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아들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사람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충만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영광을 보는 자만이 자신의 죽음마저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 날이 어떤 날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 날에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보내는지 그렇게 상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우리의 관심은 우리를 위해 이 날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우리는 해마다 이 성탄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저와 여러분들의 삶속에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얼마나 위대하게 사랑하시는 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성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날입니다. 우리는 분명 해마다 이 성탄을 기념할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기 바랍니다. 시므온의 찬송처럼 우리는 더 분명한 주님의 구원을 다 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을 믿는 이 신앙고백이 위대한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한 신앙위에서 우리의 삶을 믿음으로 견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전 생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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