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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히13:16-19)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1. 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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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계속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었던 제사제도들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백성 됨의 증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제사제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제단이 있다고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제단이 있다는 것은 제사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제단과 제사에 대하여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피로 단 번에 드린 속죄제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믿고 아버지께 나가는 자는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제사의 효력이 예수의 피로 단 번에 이루어졌고 이 피의 제사는 이제 복음 선포를 통해 계속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복된 예배에 나와 복음 선포 가운데 있을 때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계속 뿌림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에서 단 번에 다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 죄가 사함 받는 유일한 길은 계속 피를 뿌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아들의 복음이 선포될 때 피가 뿌려진다고 하는 가르침을 우리 조상들이 세워놓았습니다. 따라서 예배 가운데 복음 선포는 가장 위대한 일이며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제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사는 무엇인지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바로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읽었던 16절 말씀은 성도의 선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 제도 하에서 아무리 동물의 피의 제사를 많이 드려도 자신들의 선한 삶이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이고 외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제도들 주신 이유는 자신들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는 여전히 계속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동물의 피의 제사는 빠짐없이 잘 드렸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동물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에게도 원수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의 것을 더 빼앗고 패악을 저지르고, 이방의 여인들을 취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고 이혼 증서를 써서 주면서 쉽게 쫓아냈습니다. 길거리에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이 즐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과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패악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기에 늘 그 시대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내에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고 있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진 자들, 세상에서 힘 있고 명예가 있는 자들 앞에서는 존경의 표시를 하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쉽게 화를 내고 멸시하며 그들에게는 교회의 중요한 직분도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는 가난하여 굶주리는 자들이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의 정신 속에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이 의미가 바로 십계명의 요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이웃들에게 항상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면 당연히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이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제도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감사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죄제사도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혼자 존재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 중심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인간만을 사랑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 전체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언제나 한 영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서로 구별하고 차이를 두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멀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긍휼하신 하나님처럼 긍휼이 없었고 오히려 더 패역한 일들만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서로서로 고발하고 죽이는 일들은 너무나 쉽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자신만 살기 위해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그런 의식은 전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제단과 제사는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늘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게 되었는데 그 제사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잘못알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사람들로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도식이 생겼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내가 구원 받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고 순종하는 자리에 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칭의에 대한 교리에 아주 많은 의견들이 온라인상에서 주장대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칭의가 아닙니다. 칭의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칭의는 죄인이 의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까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종교개혁자들이 칭의를 예수만 믿고 구원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으로 가르쳤다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신칭의 속에 들어 있는 신앙은 죄인이 의인이 되었기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요구까지 다 함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단이 있기 때문에 그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사들의 가르침은 단지 교회 중심의 예배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가장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신을 드리는 것은 최고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 이후의 성도는 자신의 삶을 계속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선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착한 일을 계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 생애 동안 계속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는 이러한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을 행하다가 피곤할 때도 있지만 낙심하지 말고 계속 착한 일을 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교회봉사와 가정에서의 삶, 직장에서도 성도는 계속 이웃들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도는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도 함께 나누워 주워야 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좋은 것도 함께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자리에까지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바로 17절에서 말해주고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인도하는, 지도하는 교회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성도들 자신들의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잘못된 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의심하지도 말라고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모든 속죄 제사를 단 번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계속 중보자로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주신다고 하는 것 등의 모든 진리들을 의심하지도 말고 끝까지 붙잡고 서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배워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쉬지 않고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 개인의 영혼을 위한 아주 귀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나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먼저 청산함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쉬지 않고 오직 복음의 진리만을 가르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교회의 목사들이 알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가장 먼저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먼저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설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바른 복음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계속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의 책임은 바로 목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이 가르침 다음에 자신들의 책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전체가 다 중요한 진리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속에서 선하고 착한 행실을 통해 서로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언제나 자신의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참된 신앙에서는 탐심이 그 자리를 잃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가장 중심에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탐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순간, 복음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 탐심은 그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바른 신앙은 그 사람의 소유물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 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이 땅의 재물과 함께 하나님을 같이 섬기지 못합니다. 재물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먼저 탐심에 빠져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탐심 때문에 바른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성도들을 이용하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계산을 위해 거룩하고 착한 행실을 계속하라고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야보고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27).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를 높이는 공로가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영적 예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실질적이며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어려운 이웃과 형제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착한 행실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나누는 삶을 사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사가 우리가 드리는 제사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제라고 하지 않고 제사라고 하는 것은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제사라고 하겠습니까?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위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기 위해 교회의 지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도가 선한 행위와 서로 나눠주는 것을 위해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성경말씀을 통해 전해지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바른 진리의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하는 그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교회 안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직분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제 목사의 직분만 인정하고 있다면 목사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나오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진리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는 목사라고 하는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목사직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 안수 받았다고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며 성도들을 진리위에 서 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계산당하는 자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에게 있어야할 기쁨이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가 낙담하는 것은 성도가 교회에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복음의 진리위에서 살면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눠주고 타인을 좀 나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자신의 주장만 하고, 자신이 더 놓고,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참으로 한숨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의 유익을 갖기 위해서는 목사가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도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와 성도 상호간의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서만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회는 마치 성도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 쪽으로 계속 몰아가고 있습니다. 작금의 교회의 타락은 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의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이제 가르치는 자들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바른 목회가 이루어지도록 성도들은 목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는 서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 자신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쪽에만 의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를 가르치는 자들과 그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의무를 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성도는 착한 행실과 베푸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날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교회의 지도자는 이러한 일을 성도들이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먼저 그 말씀에 순종하고 바른 진리를 계속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역사 가운데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 살았는지 우리 모두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151&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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