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계속 배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된 서신서입니다. 과연 야고보서가 성경의 말씀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루터의 말처럼 지푸라기 서신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교회사에서 아주 많은 공박이 있은 후 교회가 이 서신을 받아들였는지? 이러한 것들은 아마도 야고보서가 말하려고 하는 전체적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생긴 공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먼저 야고보서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통 교회의 칭의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야고보 사도가 믿음과 행위를 통해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로마교회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이제 우리는 야보고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며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만 주장하였다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방적인 거짓 주장은 결국 개혁주의 신학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아주 나쁜 짓이 분명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루터가 제대로 증거하기 위해 루터는 행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이런 식으로 활동적이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믿음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며 선행을 찾아다니지만 믿음이 무엇이며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지껄인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루터는 야고보서신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성경 66권 가운데 하나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복음서보다 덜 중요하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일부 타락한 학자들에 의해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가 전체를 통해 증거하려고 하는 것과 루터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루터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인터넷에 올리자 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너무 귀한 자료라고 하면서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정보에 의해 마치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그저 들은 것을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야보고 사도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한 결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이 야고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우리는 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자신들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종으로 그렇게 언급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녀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들을 그렇게 구분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놀라운 기독론적인 교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영적인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들이고 종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지금 야고보 사도가 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 문장 속에 새 언약 백성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아주 쉽게 그리고 중요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새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흩어진 12지파에게 야고보 사도가 문안한다고 한 것입니다. 흩어진 12지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아 각 지역마다, 나라마다 흩어진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2지파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할 때 12지파라고 하는 개념으로 항상 사용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12지파,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상에 고정되어 있는 이스라엘 땅이라고 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고 사는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야고보 사도가 흩어진 12지파에게 문안하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문안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흩어진 12지파에게 문안한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의 서신을 받는 자들은 12지파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 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구원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야고보서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한 행위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가르친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이 서신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강조를 1장 2절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시련 즉, 믿음의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 권고가 바로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 믿음 때문에 시험을 당하거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을 통해 그 당시 유대인으로써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삶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이라고 하면 로마제국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멸시와 업신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원수는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 메시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정죄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 때문에 당하는 많은 환난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성자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믿음을 시험하는 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의도는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이란 것은 끝도 없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그 처방을 위해서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신앙의 유혹을 받습니다. 몰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심과 정욕과 욕망 때문에 계속 죄를 짓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에 실패할 때가 한두 번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당한다고해서 낙심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고난 성품 때문에 고통을 당하거나 환난을 당하면 그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시험을 받으면 괴로워하고 슬퍼하기 마련입니다. 힘든 일을 당하면 누구나 주저앉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시험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 있어 믿음의 시험이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연단을 위해 도움이 되므로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가 고통을 받을 때 기뻐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결과부터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이유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성도들에게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복주의 신앙은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에게 어떻게 고난과 환난이 닥칠 수가 있느냐고 가르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신앙을 가졌거나 아니면 교회 안에서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몰아갑니다. 또한 순종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러한 어려운 환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헌금을 많이 내거나 충성을 죽도록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시고 환난을 면케 하여 주신다고 성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한 고난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시련을 통해 인내를 만들어 주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끝까지 믿고 나가는 신앙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도가 살면서 당하는 환난과 곤고와 질병과 고난,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모든 삶은 성도를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삶의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바른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를 믿고 따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 안에서 자라가야 하지만 늘 우리는 옛 사람의 모습 때문에 주님을 믿고 끝까지 순종하기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이단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방편을 위해 지혜를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통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적용하지만 지금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야고보의 의도는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가르치고 전혀 그 배경과 의도와 의미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육신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을 어떻게 하면 극복하고 인내를 이룰 것인가를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부족한 자들이 있다면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게 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히 주신다”고 하는 것은 기도하면 “바로 즉시 주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을 극복하고 인내로 그 신앙을 끝까지 가지기 위해 지혜를 구라하고 하는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들도 순종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사용하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믿음을 위해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면 언제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순간마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것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꾸짖지 아니하시는” 이라고 하는 이 말씀으로 자주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 구라하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마음이 넓고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주 도움을 구하게 되면 짜증이 나고 지난번에 도와주웠는데 또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구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자주 도움을 구하게 되면 수치스럽게 여겨서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계속 복을 주시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는 의도로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있지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 어떻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지혜를 구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후히, 그리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주신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의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의 정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오늘날도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그 신앙 안에서 자라가기를 원해서 기도한다면 즉각적으로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향 미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두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신실하셔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언제나 이행하시고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실상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것인지 의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지혜가 없다면 자신의 판단으로, 방법으로 헤쳐 나가야 하지 않나 하면서 정함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참되게 하나님의 아들을 끝까지 믿고 인내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참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기 전에는 기도할 수도 없고,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를 이루지도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 이룬다고 하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에게 포문을 열고 있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참된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진리의 말씀으로 안내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 즉 복음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라하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 나오는 모든 성도의 행위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순간순간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그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사는 지혜를 주신다고 하는 이 가르침이 야고보를 통해 우리들에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 현대사회 속에서 늘 믿음으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고 후히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을 지체 없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179&msection=2&ssection=5
믿음으로 사는 자는 율법을 사랑한다(약2:1-13) (0) | 2019.02.18 |
---|---|
믿음의 시험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다(약1:9-18) (0) | 2019.02.07 |
무엇을 다짐하며 결단하십니까? (히13:20-25) (0) | 2019.01.21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히13:16-19) (0) | 2019.01.07 |
우리에게 있는 제단(히13:10-15) (0) | 2019.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