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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자는 율법을 사랑한다(약2:1-13)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2. 18. 09:32

본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요점은 교회 안에서 부자를 높이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차별에 대하여 질타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 이해하면 마치 부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주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질의 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마치 죄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자세하게 보면 부자에 대한 책망보다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이 여전히 성도들 안에 남아 있고 율법의 잘못된 사용과 가르침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잔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준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고 가르치는 목사들의 사상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지도자들이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그들은 잘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잘못된 신앙관이 초대교회 안에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자가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좋은 자리로 인도하여 주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여겨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대교회 안에 세상적으로 잘 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목사들이 얼마나 굽신 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저 사람이 목사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부목사 때 서울에 아주 큰 교회에서 안수집사라고 하는 분이 농기계 사업 때문에 김제에 와서 사는 동안 잠시 교제를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서울에 있는 교회에 가지 않으면 시골 교회에 계속 나왔습니다. 저는 그분이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골교회 담임목사가 그 분에게 서울로 가지 마시고 김제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하자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 하는 말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서울에 있는 담임목사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수첩에는 십일조 100만원 하는 성도, 그리고 1,000만원 하는 성도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특별 관리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담임목사가 특별히 관리해 주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시골교회로 옮길 수 없다고 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 목사는 헌금을 많이 해주는 성도를 특별 관리하고 시골에 있는 목사는 그 사람을 자신의 교회로 데려 오려고 안달이 난 이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속의 목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사들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일반 성도들도 자신보다 더 잘살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과 교제하려고 합니다. 자신보다 배우지 못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야고보 사도가 목회하였던 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야고보 사도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참된 복음, 믿음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는 성도들 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모세로부터 내려온 두 돌 판의 법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기야 성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500여 년 동안 율법 아래에 살면서 예수를 믿고 쉽게 율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힘이 들고 어색한 삶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사도들이 한 결 같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없는 그런 자들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들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법 없는 자들이라고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지금 야고보 사도가 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율법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이 없는 시대에 어린양의 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주신 사랑의 법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마치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된 백성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의 자녀들이 된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여전히 율법은 유효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 법은 더 강화되고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부자를 편애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율법 전체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맺은 새 언약의 의미를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는 자녀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왜 새 언약이라고 하였습니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변하지 않고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산상 수훈입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단 하나도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고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언약의 내용이 새로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는 방식이 새로워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약시대는 동물의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 된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돌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방법과 그 효과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더 뛰어나고 위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 교회를 이룬 무리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의도에서 야고보 사도가 지금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율법에 순종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율법을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마치 야고보가 믿음과 더불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왜곡시켰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정신과는 아주 다른 사상이 분명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평가에 따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결국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한 몸이라고 하는 이 교회에서 자신의 몸의 일부분을 아주 불량하게도 저주하는 것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 죄를 짓는 것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일을 어리석은 인간이 행하고 있기 때문에 교만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사람을 판단하는 분입니까? 당연히 하나님 한 분만 인간을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치 율법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형제를 판단하고 있으니 당연히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시고 높여주신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보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한 형제들끼리 차별하는 것은 율법이 없는 자들이나 하는 행동이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심비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당연히 하나님과 아들의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적용시켜 믿음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성령께서 더 이상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여전히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려고 은혜를 주십니다. 자신이 죄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도록 늘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분명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신 것은 다름 아닌 부자들의 교만을 꺾어 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7). 고 하는 말씀을 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부한 자나 가난한 자들 모두를 구원하시지만 가난한 자들을 통해 부한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자신들의 의지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부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보시고 택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자신들이 가진 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얻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겨 차별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돈을 갚지 않는다고 하는 것 때문에 화를 내면서 사람을 법정에 끌고 가지 않느냐고 말해줍니다. 즉 야고보는 부자들이 부당하게 자신들의 부를 가지고 지배하려고 하는 힘의 원리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사와 같습니다. 일명 갑질 문화라고 하는 것이 바로 힘의 원리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야고보 사도는 아무런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도 없는데 단지 부자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아부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과 선의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부자들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를 가지고 사람을 억압하는 자들은 사실 성도들이 가진 아름다운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를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들이 가진 부를 가지고 사람들을 부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요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반박하는 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즉 존경과 존귀를 받지 못할 사람들에게까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 야고보는 존경과 영예를 돌리는 자들에게 마땅히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어떤 사람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급하여 판단하고 급기야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형제를 무시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여 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 율법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 말을 오해해서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이 상관없는 그런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앞부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율법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2절에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125절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즉 복음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법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그 법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13절과 연관시켜 보면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과 같다고 야고보와 사도바울이 동일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율법아래에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율법의 가혹성 아래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음을 통해 죄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는데 어떻게 이 복음 안에 사는 자들이 서로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통해 복음으로 산다면 마땅히 가난한 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야고보 사도는 교회 안에서 믿음의 성도들이 율법을 무시하지 말고 율법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왜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참된 믿음 안에 이 가르침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모아놓고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수여하여 주신 분께서 그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성도들과 불신 이웃들에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광주한마음개혁교회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199&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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