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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험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다(약1:9-18)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2. 7. 09:36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례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먼저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9:23-24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보고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고난과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믿음의 시련이 다가와도 끝가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강하게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성부께서 아들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즉시, 그리고 후하게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아들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낮은 자나 높은 자 모두에게 일반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부한 자에게 증거하는 말씀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먼저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 신분적으로 비천한 자를 동시에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신분적으로 비천한 자는 결국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가운데 처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됨을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당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작 자신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얼마나 신분이 높아졌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들이거나, 신분이 낮은 자들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사람은 아주 높은 자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향해 세례요한 보다 더 위대하고 뛰어난 자들이라고 하는 비유를 말씀하여 주신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리 미련하고 어리석고 가난할지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위대한 신분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결국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것을 가지고 얼마나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들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같이 자녀들이 자신의 자랑이고, 직장과 돈이 자신의 자랑이라면 그 모든 것은 결국 야고보 사도가 11절에서 말씀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전부다 쇠잔하여 사라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자랑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자랑해야 합니다. 물론 지식이 교만으로 이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지면 자신의 삶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 그 믿음 때문에 더 힘들고 어려운 삶에 직면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갖는다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자족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지만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하는 것을 말해도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 동기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께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 장로님께서 지난주에 일하시다가 손을 다쳐 한 20여 바늘 꿰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자신의 집에 불이 나서 가재도구가 다 쓸모없게 되어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를 몰라 그저 기도만 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도에게 환난과 고난이 닥쳐오면 목사는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죄 가운데서 영원한 심판과 사망의 형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자랑은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한 자는 자신의 부를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낮은 자와 부자들이 같이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아무리 주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의 교사라고 하지만 교회 안에는 부자들도 항상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부라고 하는 것은 단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마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요즘 말로 하면 갑질하는 식으로 물질의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의 부 자체는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아지는 것으로 인해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도가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그 말씀을 보면 세상의 부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뒤쳐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지를 진정으로 알 수 있다고 시편 기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잘되면 금세 교만해지지 않습니까?


지금 야고보 사도는 부자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금방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물질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 물질을 가지고 있는 자가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재물에 대해 그 어떤 자랑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학문과 명예와 지위, 그리고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과 기쁨을 추구하는 자는 그가 행하는 일들에 있어 다 쇠잔하여 지고 사라지는 것들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식사를 할 때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아무리 좋고 비싼 음식도 더 이상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의 배라고 하는 것은 음식을 통해 배가 부르면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배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나 다시 소화가 되면 음식에 대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육체의 모습 속에 반복되고 반복되면서 결국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부한 자들이 낮아질 수 있는 길은 세상의 것들이 덧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 낮은 자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도 쇠잔하여 사라지고 마는 그런 존재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이런 진리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깨닫고 그렇게 사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목사도 탐욕에 빠져 몇 천억 원을 비자금으로 빼돌리고 있고, 자신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를 가족의 재산으로 사유화시켜 교회를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수십억, 수 백억 원을 은퇴금으로 받아도 부족한 것으로 여겨 자식들에게 교회헌금으로 사업을 시키는 자들의 생각은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후손들이 계속 물질의 번영 속에서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나라와 세상의 모든 나라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손대대로 자신의 가문을 이어가고 일종의 마디마디 연결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그렇게 모으고 쌓아두면 자기들의 이름과 가문이 계승된다고 믿는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70-80의 인생을 살고 나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전히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육체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죽음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을 못 느낄 뿐이지 조금 있으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는 낮은 자나 부한 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살 것을 강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낮은 자가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12절을 보면 결국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그런 복입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가 모두가 복을 받습니다. 낮은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자신들이 높아진 것을 끝까지 자랑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높고 부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자신들의 거만을 꺾고 나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믿음의 시련을 견디며 이겨야 합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고난과 역경에 직면해서도 믿음을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가는 불굴의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욕망도 결국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당하는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면서까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가리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나라에 유업의 존귀함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계속 여러분들에게 지금 야고보 사도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강조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혼동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야고보서를 행위로 해석하는 목사들로 인해 계속 행위 구원이라고 하는 그런 혼란이 주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므로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한 결 같이 가르쳤던 신앙의 핵심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굳게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고난의 역경이 닥쳐도 그 시련 앞에서 굴하지 말고 끝까지 죽을지라도 믿음을 지키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에서 떠나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시험하신 적이 많다고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였고, 욥도 시험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시험하신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의 조상들을 시험하실 때는 그들에게 믿음의 시련을 통해 그들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라고 하는 신앙의 유익을 위해 시험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또 다른 시험을 언급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은 성도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서 끊어지게 하는 그런 더러운 욕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세기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유대인들로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물려준 그 신앙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다른 신앙의 체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나 요한 계시록을 통해 이미 우리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얼마나 모진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자나 부한 자 모두 믿음의 시험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시련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험을 받았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이기고 어떤 이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같은 시험을 받았지만 결국 자신들의 탐욕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났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심으로 인해 믿음을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아니면 로마제국의 신앙을 따라 간 것은 그들의 탐심 때문입니다. 부한 재물을 포기하지 못해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하는데 물질이 너무나 귀한 나머지 결국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핑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너무나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핑계 삼아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생명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는 자들은 이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성도는 속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같이 창조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악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만과 탐욕에 이끌려 죄악에 빠졌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실 뿐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을 하나님께 핑계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들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계속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시험을 하시는 것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하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망하였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였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들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 때문에 환난과 고난의 삶 속에 있는 자들을 충분히 거두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이 계속 한 결 같이 증거하고 있었던 구원의 도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우리는 동일하게 증거되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성도가 당하는 시련을 이길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고의 자랑은 신분과 지위를 떠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1세기 성도들이 당하였던 그런 환난을 당하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는 고난 앞에 서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은 더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싸움이 더 치열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판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에 쉽게 무너지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렇게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들을 성령으로 붙잡아 주시고 하늘의 좋은 은사들로 채워주시기를 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임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189&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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