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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약4:11-17, 마7:1-6)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4. 2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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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약4:11-17, 마7:1-6)
  

위선자들의 신앙이란 자신이 신앙의 기준입니다. 자신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가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배운다면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비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가장 많이 비판하셨다고 하는 것을 안다면 지금 야고보 사도가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자신의 백성들에게 변함없이 가르치시는 말씀은 이웃에 대하여, 즉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판을 가장 신랄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또한 그 시대 사람들을 비판하고 저주까지 퍼부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무엇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이웃의 잘못과 형제의 죄에 대하여 우리는 비판하지 말고 침묵해야만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 것을 금지하는 것은 비판하는 자 또한 그 기준으로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눈 속에 들어 있는 티만 보고 비판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보면 야고보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만 주장하고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오히려 무시하고 율법으로 형제를 판단하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훔치는 도적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배울 수 있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기사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다윗이 죄를 깨달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비유를 말해줍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는데 부자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작은 양 새끼 하나를 기르는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의 손님을 접대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분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정죄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은 실상 죽어야 하는 자는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것인데 다윗은 자신의 입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주 비열하고 빈번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쉽게 범하고 있으면서도 하찮은 잘못을 범한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소문에 의한 것이든지 간에 아주 무섭게 찾아내서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성향이었습니다.

습관적으로 자신은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들인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우리는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눈에 아주 큰 들보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율법에 순종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청원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대교 신앙에 물들어 있는 자들이 여전히 교회 안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율법의 정신을 온전하게 알지 못하고 행함도 없는 위선자의 신앙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교의 신앙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새 언약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판단하고 율법의 집행자들처럼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야고보 사도는 율법을 제정하시고 그 율법을 가지고 판단하시는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과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권한과 심판자의 능력을 가로채는 자들이 바로 위선자들입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2). 이 한 마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피조물인 동시에 죄인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너만 율법을 지키라고 지적한다면 자신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교만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그저 형제를 정죄하고 비방하며 자신만 의롭다고 하는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율법을 비방하는 자는 율법의 용도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의도하려고 하는 그 가르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는 공통된 신앙생활의 법칙을 함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자신도 하나님의 법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교사들과 부자들입니다. 신앙의 위선에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자들은 단연코 교사들과 부자들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들은 언제나 타인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없이 그저 타인만을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자가 스스로 위선에 빠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위선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서 있다고 스스로 자만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는 자들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집단이 바로 이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도 가장 부패한 집단이 목사들이고 장로들입니다. 중세시대에 우리는 로마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과 그 밑의 사제들이 가장 타락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부자들을 보시면 그들이 얼마나 쉽게 형제를 판단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아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용하는 자들이 현대교회 부흥사들입니다. 부흥사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헌신을 다하면 모든 축복을 받는다고 외칩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이런 간증들이 성도들에게 전해지면 그 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복을 받아야 하겠다면서 많은 충성과 헌신을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바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자들처럼 그렇게 복을 받는 자들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단지 성도들의 감정만 고조시키고 참된 신앙의 길로 서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모습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말에 쉽게 현혹됩니다. 쉽게 돈을 벌고 성공하는 길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런 헛된 꿈을 찾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언제나 쉽게 사기를 당합니다. 마귀도 이런 거짓 신앙을 교회 안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 말씀을 보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도시에 가서 장사를 일 년 동안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엄히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을 계획하고 결정하는 대로 된다고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들은 쉽게 말을 합니다.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그렇게 다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경영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써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잠언 기자는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만하게 말하는 자들의 존재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자들입니다. 즉 보잘 것 없는 인생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계획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 자신들의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교만한 자들에게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들이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한 조심성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런 자들처럼 말을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내일 일도 자신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일 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을 계획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에 결국 이런 자들의 신앙이란 불법과 동행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의 기능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의 정신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는 허탄한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자는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며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허세만 부릴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모든 신앙의 형태에 대하여 악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에서 나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하는 교만, 형제를 멸시하고 자신의 말과 삶의 방법만이 바른 신앙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모습 속에서 악한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그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악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인들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습성을 억누르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을 따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거룩하여 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칭찬과 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자들은 이제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기에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율법이 선포되지 않으면 인간은 여전히 교만하고 자신만 최고라고 하는 교만에 빠질 것이며 따라서 교회는 온통 무질서 하고 다툼과 싸움만이 난무하는 그런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해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우리가 먼저 읽었던 산상수훈의 내용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계명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이 말씀은 아주 쉽게 말해 자신을 먼저 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른 신앙을 위해 눈이 밝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신앙의 바른 판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 이전에 형제를 잘못 판단하는 그런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다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율법의 기능과 용도를 바르게 가르쳐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판단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가 계속 교회 내에서 일어난다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자들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강하게 비판하고 경고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 내에서 선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것을 가지고 나눠 주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마치 부자농부가 자신의 곳간에 모든 곡식을 다 쌓아두고 스스로 만족하고 혼자 배부르면 된다고 하는 그런 거짓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생명을 밤중에 하나님께서 취하신다면 그들이 가진 부라고 하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부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왜 율법을 말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한층 더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더 사랑하고 온전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의도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고 하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유대교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율법의 정신과 기능을 올바로 알고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인간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여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자신만이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말로만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그 믿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찾고 순종하는 곳으로 먼저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기사와 이적이라고 하는 그런 외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현대교회는 말에 능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말 대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의 말을 하면 권세를 누리고 모든 질병이 떠나고 귀신도 이긴다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오순절교회와 순복음교회, 신사도 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이런 거짓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에게 말의 능력을 가르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닙니다. 우리는 이 세대의 거짓 복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이 아닌 복음의 능력에 순종하는 그 모습 속에 참된 종교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닌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우리 속에 이러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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