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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위해 지혜를 주신다(약3:1-18)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3. 1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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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약3장은 거짓 교사들로 인해 복음이 훼손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형제들에게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자들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늘 자신들이 당연히 공경과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쉽게 사람을 정죄하고 헐뜯고 타인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당연히 선생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보다는 3장 전체를 통해서 보면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자가 받는 명예와 존경을 통해 사람들은 선생 되기를 갈망하고 있으므로 그 권리를 악용해서 남을 욕하거나 정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도에서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장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을 하는 혀에 집중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신의 혀로 형제를 정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음으로 복음이 훼손당하고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으로 사람의 영혼이 마치 마른 나무가 불에 타버리는 것과 같이 타들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의미보다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말로만 하고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늘 자신들의 혀로만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단 번에 또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생된 자들은 자신의 혀로만 자신의 믿음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된 자들은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야고보 사도가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선생이라고 하는 헬라어의 의미는 부정적으로 헐뜯는 눈으로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남을 헐뜯는 눈으로 남을 내려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선생들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왜 교회 안에서 선생 된 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유대교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랍비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된 자들은 일반 백성들이 율법대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고 율법을 범하는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랍비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범했다고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시험하는 질문을 늘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외적인 신앙에만 관심을 가진 자들이 바로 랍비들이 가진 특징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의 랍비들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다 그렇게 자신과 같지 아니하면 단 번에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교회 성도들이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대교회 안에서 타인을 가르치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의 이전 모습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런 분위기가 초대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는 유대교의 랍비처럼 그런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선생이 된 자들과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을 함부로 무시하고 정죄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의 위선과 외식적인 신앙이 마치 바른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 당시 초대교회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과 위치를 가지고 타인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자신이 읽은 몇 권의 책이나 파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신앙의 전부인양 함부로 말하고 급기야는 목사에게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목사의 인격과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도 있지만 그럴 때도 서로간의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야보고는 교회 안에서 남을 가르치는 선생 된 자들과 선생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 모두에게 자신들이 말한 그 말로 인해 상처를 입히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가 많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은 의롭고 타인만 실수한다고 하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신의 행동과 말에 항상 일치하지 않게 산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타락한 죄인의 본성은 늘 말만 앞세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언행을 살펴보지 않고 다만 타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려고 하는 열정은 결국 실수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실수라고 하는 단어는 쉽게 말해 영적인 실패를 의미합니다. 즉 죄를 짓고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의 교사들인 목사들은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들의 어리석음이란 자신은 영적으로 아주 탁월하기 때문에 죄를 거의 짓지 않고 일반 성도들만 죄를 짓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과 어리석음은 결국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성도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서로 간의 실수나 죄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잘못한 것으로 취급하면 결국 문제해결이 아닌 다툼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나고 탁월한 성경적, 신학적 지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늘 실패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만일이라고 하는 가정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매우 희박한 가정의 표현입니다. 즉 성도라고 할지라도 말에 실수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렇게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을 찾아보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말에 실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말에 실수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특히 선생 된 자는 타인을 너무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위선자들은 자신의 사리추구를 위해 형제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타인을 헐뜯는 일에 너무 쉽게 말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성도들의 삶의 막대한 영향을 주는 말에 대하여 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혀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혀는 그 어떤 것으로도 길들이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다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사도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혀가 없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혀라고 하는 것은 단지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도구이고 사람의 생각은 혀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이므로 결국 혀가 없어도 인간은 여전히 악한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작은 부분 가운데 하나인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혀를 가지고 불의를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성도의 인생 전체를 삶의 수레바퀴라는 의미로 말하면서 혀가 성도의 전 인격과 삶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기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렇게 길들여지지 않고 불의의 도구로 사용되어 사람을 죽이는 혀에 대하여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혀를 가장 많이 제어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의 혀를 가지고 성도를 온전하게 해야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혀로 인해 성도를 온전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들은 복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믿는 일에 격려와 용기를 주는 일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먼저 자신들의 혀로 상대방을 헐뜯고 저주하면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 즉 예수는 과연 어떤 분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저주한다면 사람들이 과연 그 사람이 말하고 가르치는 복음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여전히 초대교회가 아닌 현대교회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섞여 살아갑니다. 정말이지 성도가 자신의 말에 실수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신뢰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과 다른 모습이 없습니다. 자신의 혀로 거짓을 말하고 타인을 정죄하고 이간시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배 잘 참석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와 헌금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성도가 세상에서 구별된 모습이 없이 세상 사람들처럼 쉽게 말하고 거짓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분명 복음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의 목회와 노회와 총회의 정치를 동일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강단에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지만 노회와 총회 청치를 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되고 타인을 중상모략해도 된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위선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야고보 사도는 약2장과 연관시켜 계속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행위는 보이지 않고 부자들에게만 아양을 떨고 아첨하는 자들은 결국 가난한 형제들을 쉽게 판단하여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부자들을 좋은 자리로 인도하는 자는 선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실 때 그들이 무화과나무에서 감람나무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그 표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신실함과 정직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과 위선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기만 했지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우리가 안다면 지금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란 유대인들처럼, 그리고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혀로 형제를 위로하고 참된 복음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세치 혀가 만 리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의 말이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불의의 혀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부정적으로 우리의 혀를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성도가 말로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말고 자신의 행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313절 말씀입니다. 혀와 선행이 연관되어 계속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자신의 선행으로 믿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는 너그럽게 관용하면서 타인에게는 아주 철저하게, 잔혹하게 대하는 자는 마귀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자는 즉 세상적인 방식으로 계속 사는 자는 자신의 생각으로만 살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자는 자신의 혀를 사용하여 불태우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면서 모든 신앙의 체계를 다 무너뜨리기 때문에 결국 혼란과 다툼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자신의 것 밖에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타인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호의를 베풀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형제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것인가 고민하지,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대로만 신앙 생활하는 자는 진리도 무시하면서 그저 자신의 뜻대로만 해야 한다고 고집과 아집에 사로잡혀 진리의 말씀도 거부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언제나 다시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전통에 의해 살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의 표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표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타인을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한다고 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바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이 놀라운 복음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17-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믿음의 시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라하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참된 신앙 안에서 끝까지 믿음을 가지기 위해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한 구하라고 하는 지혜, 즉 성도가 하나님께 구해야할 지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화평케 하는 그런 의의 열매를 구하고 거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셨는데 그 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복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을 위해 지혜를 구하면 주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의의 열매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을 위해 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자는 의를 계속 심고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저 말로만 하지 않고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아닌 평화의 소금으로 화평케 하려고 하는 그 열정을 보여줄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신앙의 모습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사탄은 불의의 혀로 형제를 죽이지만 성령은 불의의 혀로 형제를 세우고 복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복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광주 한마음개혁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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