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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들의 행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겨라(약5:1-20, 시73:1-14)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4. 29. 09:23

본문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의 마지막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이란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통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타인을 가르치는 자들이며 대부분 부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51절부터 야고보는 부자들에게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자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통 다른 사도들의 권면과는 다르게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부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보면 지금 야고보는 부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들은 믿음의 형제들을 핍박하였고 그들을 관원들에게 끌고 갔다고 합니다. 결국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들의 죄가 율법을 통해 다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부자들의 비참한 심판과 멸망을 주의 깊게 보고 부자들의 번영과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의도에서 말씀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 부자들의 죄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를 정당하게 모으지 않았고, 그것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땀을 흘려 일한다면 그렇게 크게 그리고 쉽게 돈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방법은 거의 다 불법을 사용하여 부를 모으고 있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 부자들이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그 모습을 보면 먼저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착취하였습니다. 4절 말씀에 일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았거나, 아니면 품삯을 가로채고 빈손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4절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 2415절 말씀을 통해 반드시 노동에 대한 댓가를 해가 넘어가지 전 까지 지불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율법을 통해 정해놓으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꾼들은 그 날의 일에 대한 품삯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노동을 통해 하루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양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즉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품삯을 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율법을 통해 해가 넘어가지 전에 품꾼들에게 삯을 지불하여 주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짓밟고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들의 죄란 형제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부자들이 단순히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아가는 살인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자들은 그렇게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단 한 푼도 가난한 자들에게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이 녹이 슬 때까지 모으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재물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물을 가난한 형제들에게 사용하지 않고 재물이 썩어지는 편을 택하고, 자신들의 옷에 좀이 먹어 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추운 자들에게 따뜻하게 덮어주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해도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오히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고 자신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 신앙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부자들에게 심판과 멸망이 임할 것이라고 하는 야고보 사도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부자들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습니까?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이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부자가 되는 것을 아주 강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죄 성에서 나오는 정욕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야고보 사도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부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불의하게 부를 축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재산을 모은 부자들에게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세상의 모든 부자들에게 저주와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의하게 재산을 모으고 있는 부자들에게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물질의 축복은 은혜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과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축복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축복을 마치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여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관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좋은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은 결국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가난한 형제가 있어도 베풀지 않고 이웃과 함께 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뿐만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교회를 축복하여 주셔서 외적으로 큰 교회를 이루었다면 당연히 작고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은 당연한 처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큰 교회 목사가 과연 자신의 교회의 재정에서 아주 큰 액수를 작고 가난한 교회에 나눠줄 수 있습니까? 공교회의 신앙고백을 가진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서로 다른 지역과 형편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하나의 교회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셨다면 그것은 자신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재물이 썩어 나가도 나눠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물질에 대한 바른 신앙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물질 자체가 불의한 것처럼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물질은 가치중립적입니다. 즉 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돈을 사용하는 자에 의해 그 돈이 악하게 사용되기도 하고 선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치 돈이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겨 돈을 많이 쌓아 두면 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돈을 쌓아두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지 돈 자체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꾸리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물질의 축복은 감사한 것입니다. 이 감사를 잘 사용하는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본문의 말씀 중에 6절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고보는 부자들의 죄가 그만큼 크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증거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믿음을 가진 의로운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부자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자들이 부자들에게 저항하지 않은 것은 인간적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받을 그런 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자들은 자비도 없이 타인의 생명을 쉽게 빼앗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마땅히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는 시는 것은 신실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야 합니다. 부자들의 포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날은 이러한 참고 견디는 인내가 부족한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며 서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에 대하여 침해를 받는 일이 생기면 아주 사납게 성난 사자처럼 그렇게 물고 뜯고 싸웁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도를 통해 길이 참으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농부가 기다린다고 하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언제나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씨앗을 뿌린 농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는 비가 오랜 만에 와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고 나서 너무 성급하게 비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하늘에서 비를 주시는 것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제일 먼저 1장에서 증거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은 고난과 환난 속에 있는 성도는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주님의 강림을 끝까지 소망하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낙담하고 말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고난을 받았지만 결국은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선진 가운데 욥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마지막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욥은 세상의 물질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받은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결말을 보고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은 그 결말을 보고 항상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쉽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특히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를 믿는 자는 더더욱 신앙에서 쉽게 변질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바른 신앙과 믿음을 위해 결단을 하고 다짐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탁월한 신앙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종합해 보면 약512절 말씀은 갑자기 끼어들어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헛된 맹세, 헛된 자기 신앙의 모습을 조심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마치 뛰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시시 때때로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위선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진실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자신의 진실됨을 보여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거짓을 일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자신들의 죄가 더 가중되는 것을 알고 하나님대신 다른 것으로 맹세하여 마치 자신들의 말이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라고 하는 이 말씀은 헛된 맹세를 통해 자신의 신앙이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말이나 행동에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렇다고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이 마치 바른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말해야 합니다. 성도의 유일한 삶의 표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결말에 가서 자신들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야고보 사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들에 대하여 결말을 맺고 기타 일반적인 신앙의 교훈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기도할 것이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찬송하라고 합니다. 성도는 고난과 즐거움이라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살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계속 고난만 당하지 않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계속 즐거운 일들만 있지 않습니다. 고난과 즐거움이 항상 반복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바른 신앙이란 바로 균형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14절 말씀은 그 당시 병 고침의 은혜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병 고침의 은사는 일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 개인들에게 여전히 놀라운 섭리적 은혜로 불치병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교회적으로 이런 은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면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신비한 은사주의로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병 고침이 그 당시에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을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를 덮고 용서하며 성도의 영혼을 위해 끝까지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면서 엘리야의 기도를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비가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긍휼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가 미혹되어 진리를 떠났지만 다시 죄를 사함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형제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고 끝까지 인내하며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 죄를 덮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위선자들의 신앙을 아주 강하게 책망하고 정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고보 사도는 형제를 멸시하고 자신의 신앙만이 바른 신앙이고 자신만이 율법을 사랑하면서 마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위선자들의 신앙을 아주 신랄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는 성도는 오히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여 줄 것을 반드시 믿으며 핍박하는 부자들과 위선자들을 위해 오히려 그들의 영혼이 구원 받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십자가에 죽인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였습니다. 누가 진정 복 있는 자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죄의 허물을 사함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다윗은 노래(32:1)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허다한 죄를 덮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은혜입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는 칭의가 무엇인지 마지막 말씀에서 다시 한 번 확증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아무리 우리에게 원수같이 행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죄가 용서 받고 덮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끝까지 이겨야 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또한 위선자들의 신앙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바른 신앙 안에 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정죄하지 말고 그들이 회개하여 바른 신앙 안에서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복음의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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