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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를 위한 바른 신앙 (약4:1-10, 시18:20-27)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4. 1. 09:19

본문

야고보서 4장 이후부터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말씀은 단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권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사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증거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율법을 타인에게만 적용시키려고 하는 위선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만 특별히 더 순종해야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 사도는 지금 자신들은 특별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선자들의 신앙은 쉽게 말을 하고 사람들을 자신들이 사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치 혀에 불과한 작은 혀로 형제를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타인을 판단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모든 사람은 말의 실수를 다 범하고 살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 또한 자신도 말의 실수를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을 겸손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마치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남들만 실수를 하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그곳에는 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욕이란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통해 만족을 얻는 아주 사악한 욕망입니다. 이런 정욕을 가지고 있다면 항상 싸움과 다툼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 아주 치밀하게 죄를 짓습니다. 한번 이런 욕망에 빠지면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 스스로에게 끔직한 고통을 가하는 것인데 그것을 모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다투고 있는 것을 야고보 사도가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인도구를 가지고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서로 타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 위선적인 모습으로 말로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 3장에 에 대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살인하기까지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런 정욕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한다면 항상 빈손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 하반절의 말씀만 가지고 오늘날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이해한다면 사도의 가르침은 신앙의 위선에 빠진 자들은 기도조차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한들 자신들의 정욕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만 자초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바른 신앙은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만들고 타인을 존중하게 합니다. 이런 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합니다. 하지만 위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들의 말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다투고 싸우는데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싸우고 다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압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들의 편입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기도하여 구하는 것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내용에 있어서도 입에 담기 부끄러운 것들만 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기도하였던 기도문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만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이방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참된 기도의 내용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에는 보통 6개의 간구가 있다고 신학자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런 기도가 나타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요구합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기 위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맞물려 일어난 운동이 바로 기도원 운동입니다. 자신의 건강과 사업, 그리고 자식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과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내용의 기도가 있는지? 이웃을 향한 성도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와 눈물이 있는지 묻는다면 당연히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정욕을 위해 구하는 기도만이 가득하였고 지금도 그런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괴기한 소리를 마치 방언이라고 하면서 몇 마디 말로만 계속 하나님께 하게 만들었습니다. 새벽부터 옆집 개가 짓는 그 소리처럼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현대교회의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두 가지 요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을(딤전4:5)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는 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말씀이란 바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이 성도들에게 증거되고 가르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이 선포되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 현대교회 강단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기도는 어떻습니까? 몇 마디 같은 말로 하는 것을 방언으로 알고 계속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전혀 우리의 정욕을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러운 정욕을 계속 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는 이 진리가 단 한 번도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시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도 쉽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자들은 더 많은 부정부패에 연관되어 살고 있습니다. 올바른 기도를 시행하는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날마다 고백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섬김과 사랑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기도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정욕만을 위한 기도일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싸움과 다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44절 말씀은 앞문장과 연결된 같은 내용의 메시지입니다. 간음하는 여인들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타락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있어 신랑으로, 그리고 성도들은 정결한 신부라고 하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정결한 신부로 주님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벗이 되는 순간 자신의 정결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간의 사랑과 정절을 저버리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순간 그 가정은 무너지고 깨지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도가 지금 말하고 있는 세상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것들에 중독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과 같아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과 기도를 바르게 듣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것은 가장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위한 구원사역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을 통해 거룩한 삶을 향한 여정을 합니다. 물론 지상에서는 완전히 거룩하여지지 않지만 계속 거룩한 삶을 향한 걸음을 쉬지 않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신다고 하는 것을 통해 더 큰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탄은 질투와 시기를 조성하지만 성령께서는 그것들을 무너뜨리고 더 풍성한 은혜들을 주십니다. 인간의 천박한 욕망과 정욕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과 말이 바른 것 인양 계속 주장하는 자들, 즉 위선자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야보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겸손한 자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모든 것을 다 부족함 없이 가졌다고 해도 그런 사람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교사든지 일반 성도들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섬기고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인격을 훼손하는 자에게 어린아이들은 가지 않습니다. 자신만 율법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신앙생활만 보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대로 네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 너도 너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 봐라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주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먼저 보고 타인에게 향한 적대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순종해 함이 마땅하는 것을 배움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가 원수가 아니라 사탄이 원수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사탄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마귀를 대항하면 할수록 마귀는 더 치밀하고 예리하게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귀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한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는 우리가 저항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을 더 과시합니다. 성도가 한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다른 한 쪽에서 또 다시 도전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마귀를 성도가 이길 수 있습니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피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무너집니다. 그러나 계속 일어서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려고 한다면, 마귀가 공격해도 성도가 마귀의 신앙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마귀는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도에게 마귀가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마귀가 제시하는 것들을 따른다면 계속해서 싸움과 다툼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이 말씀을 오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축복의 삶을 살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축복의 삶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 한걸음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인간의 의무가 마치 따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생겨나고 있는 신앙의 현상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구원을 이루는 신인협동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도 없고, 지금 야고보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는 이 말씀도 우리의 행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의 신앙이란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가짐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하는 거짓 신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처음부터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은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원하는 것을 바라지 말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바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두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두 마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형제를 저주한다면 그것이 두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눅 6장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이 지금 야고보 사도가 9절에서 동일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도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말을 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두 마음을 품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칭찬을 받는 자는 전형적으로 부자들이나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 또한 칭찬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가진 신앙이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이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그 소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회개는 먼저 외적인 생활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먼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적인 것이 회개의 시작인 것입니다.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만 인정받고, 자신의 신앙생활대로만 타인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교만이 꺾이지 않고서는 바른 신앙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선자들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 교만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 온전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높아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들,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는 자들을 높이 올리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세상 역사에서도 교만한 자들이 쉽게 무너지고 겸손한 자들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 겸손한 자들을 높이시고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오직 위에서 난 지혜는 싸움과 다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을 위한 지혜는 계속 분쟁을 일으키고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정욕을 위해 불의의 혀를 사용하여 형제를 죽일 것이 분명합니다.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참된 믿음을 위해 성도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자신의 정욕과 자신의 칭찬만을 위한 지혜라고 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독이 되는 것처럼 성도는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계속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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