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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된 자들이 가진 믿음(약2:14-26)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9. 3. 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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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된 자들이 가진 믿음(약2:14-26)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야고보서 가운데 가장 오해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을 해석하는 자들이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고,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부자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향해 경고와 심판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215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사도가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와 배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읽고 이해하여 마치 야고보 사도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받는 다고 하는 것도 주장한다고 말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터넷이나 SNS상에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있다는 거짓 복음을 가르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전혀 그런 의도로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도리어 업신여기는 위선자들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말씀을 듣는 이 내용은 다름 아닌 바른 믿음, 의롭게 된 자들이 지닌 믿음이 무엇인지를 증거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말씀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계속해서 그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생활에 있어서 방종하면 안 된다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야고보 사도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빙자하여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태도를 가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그런 생각이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여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무 율법주의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이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표준으로서 우리들에게 주신 율법의 용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들을 살펴보고 성도들에게 율법의 소중함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식의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단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는 이 거짓 복음 때문에 어쩌면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복음과 율법이라고 하는 이 두 바퀴로 굴러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과 율법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를 포함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믿음이 정당하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위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렇게 강하게 책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513-15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율법의 속박아래에서 자유하게 되었는데 이제 자유하게 되었다고 하여 율법 없는 자들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여전히 믿음으로 자유하게 된 성도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성도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부자들에게 아첨하고 아양을 떨면서 오히려 가난한 형제들을 멸시하고 천하게 대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형제들에게 배가 고프냐! 그러면 가서 먹고 배가 부르게 하고 추우면 가서 옷을 덮어 덥게 하고 힘들고 고난 가운데 있으면 가서 평안하게 지내라고 하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보다는 돈 한 푼 안 드는 말로 상대를 위로해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부자들에게는 아첨하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이런 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그런 믿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헐벗고 있는 자들, 배가 고픈 자들에게 옷과 빵을 나눠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귀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살리기 위해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즉 마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마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는 자들을 구원케 하는데 이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단지 형식적인 이해만을 가진 자들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마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적존재만 믿을 뿐이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또한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섬기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가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를 한 몸을 이루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부착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령을 통해 살아가고, 또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바로 이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마치 마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문맥을 통해서 보면 지금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 성도들 의롭게 하여 주는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들, 즉 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칭의가 되는지? 믿음과 행위를 통해 칭의를 이루는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는 것이 바로 18절 말씀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계속해서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성도와 어떠한 행함도 없는 오만하고 위선자의 모습으로 사는 자를 비교하여 헛된 믿음, 거짓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함이 없는데 믿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자신이 마치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계속 강조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로만 강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 믿음이 있느냐? 그렇다면 보여 다오!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야고보 사도는 지금 거짓 믿음과 참된 믿음을 거론하고 있지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그렇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로부터 받는 많은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질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외형적인 입증, 즉 믿음을 어떻게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외식적으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이 많은 시대 속에서 우리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고보는 모든 사람의 행위가 곧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단지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있는 형제들을 보고 있는데도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저 말로만 하는 자들이 가진 믿음이란 헛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칭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를 찾아도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강조점을 보면 믿음입니다. 그것도 헛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방편을 통해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믿음은 긍휼을 베풀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하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위선자들, 마귀처럼 믿는 그 믿음은 헛되고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입술에 박힌 말에 불과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헛된 믿음, 죽은 믿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이런 믿음이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혹 저와 여러분은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으로 교회를 이룬 지체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일반 복음주의계열의 교회들이 말하는 사랑보다 개혁교회 성도들이 더 뛰어난 형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진리의 말씀을 계속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바른 교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형제 사랑하기를 더 발휘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바른 믿음을 가진 믿음의 조상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시작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방 여인 라합 입니다. 야고보는 기생 라합을 인용하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의 자녀, 자신들과 같은 믿음의 자매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야고보 사도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221-25의 말씀을 가지고 칭의를 말씀해 주고 있다고 아주 날뛰고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이 부분을 가지고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새관점 학파들도 이 부분을 가지고 믿음과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다른 사도들과 다르게 그리고 성경전체와 다른 칭의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칭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선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5장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의 의가 확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그 의를 순종을 통해 확증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바울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도는 다릅니다. 곧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자신의 행위로 입증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의 구원이 믿음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지만 야고보는 그렇지 않고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같지만 야고보는 한 발 더 나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가진 그 믿음의 진실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고 하는 이 말씀에서 그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믿음이 그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성도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행함을 같이 동반한다고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행함으로 완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행함이 믿음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이미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기도 전에 그가 단지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자 아들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믿음으로 자원하여 바친 그 순종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자원하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1:25)라고 하는 것을 거듭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과 같이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든 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순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칼빈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 부분을 그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아 알려지고 인정받았다고 바르게 해석하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기생 라합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누구든지, 어떤 민족이든지, 어떤 혈통의 사람들이든지, 낮은 자나 천한 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이제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합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자적으로만 말씀을 이해하여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전체 문맥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결국 앞에서 말씀드렸던 헛된 믿음, 마귀도 알고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완전한 인간으로, 그리고 완전한 신성을 가지시고 오셨다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 만왕의 왕으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며 섬기고 교회의 한 몸 된 지체로 서로 협력하는 것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가 정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형제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고통 가운데 처해있도록 나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부나 고아에게 돈 한 푼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도 가난한 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은 결국 헛된 믿음이었습니다. 마귀가 믿는 그런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마귀도 믿고 있는 그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부인하고 타인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율법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의롭게 된 자는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는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개혁신학연구를 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저서.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218&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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