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주차. <사마리아여행> 불을 던지러 왔다
“(49)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이,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12:49-53)
1. 불 시험
예수님의 발걸음은 점점 십자가 언덕 위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지나는 곳은 그의 마지막 방문지가 됩니다. 주님 이외엔 아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주님은 자신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선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 수난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50절에서 “나의 받을 세례‘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심정도 복잡합니다. 그래서 ”답답하다“고 토로하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성은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도록 되었습니다. 또는 알려주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답답함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 뭔가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우월적인 감정이자 한편으로 연민의 감정입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주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로마제국에서 유대를 독립시켜줄 유대인의 왕이라 믿고 따르고 있는데 그들에게 자신이 죽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어떤 제자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이런 제자들을 마냥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늘로 돌아간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날 일들을 이미 다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잃어버린 그들이 마주할 텅 빈 공허함과 그들에게 닥칠 여러 가지 위험들을 주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떠난 이후 제자들은 엄청난 핍박과 분쟁의 참화속으로 끌려들어갈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현실들을 이미 파악하고 제자들에게 닥칠 혼란스러운 현실을 미리 가르쳐줌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대비토록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앞으로 자신이 떠난 뒤에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을 뻔히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아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과 복음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 대개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여기서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자신의 주권하에 바른 선택과 결정을 내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저 좋은 인생만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든 좋은 일만 계획하시고 결정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운한 일들을 하나님이 다 막으셔야 한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그런 주장이라면 세월호가 침몰한 것도 하나님이 막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실제 일어날 상황을 미리 고지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 상황은 한 마디로 ’불‘의 상황입니다. 49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나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성경에서 ’불‘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1) 성경에서 ’불‘은 종종 환난과 역경을 통한 연단을 뜻합니다. 다음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시66:1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2) 다음으로 ’불‘은 신앙과 관련하여 두 개의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 하나는 신앙인들에 대한 ’불‘의 의미로 예수님에 대한 불같은 신앙의 열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이후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나타날 것이며 그들의 신앙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것을 예견하신 것입니다.
~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의 미움과 적대 감정을 거센 불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일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신자들에겐 성령의 불꽃이 가슴 속에 점화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루에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보도했습니다.(행4:4) 특히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무시무시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관원들과 장로들 앞에 일어서서 당당하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예수 외에)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12절)고 선언하였습니다.
3) 그리고 ’불‘은 언제나 심판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 이 불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엄히 다스리십니다. 물론 신자의 형벌은 책망에 그치나 불신자들이 당할 불 심판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두 개의 말씀 구절을 비교해 봅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나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사66:15)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7-9)
그렇다면 왜 주님은 미리 제자들에게 닥칠 ’불‘의 상황을 알리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정확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대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에도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 했고 ’有備無患‘이라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 미리 알고 있으면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앞으로 일어날 ’불 같은 일들‘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는 것이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한 평생 친부모인 줄 알고 자란 양자에게 이웃집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을 들은 한 양자의 고민거리를 해소하기 위해 부모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계속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의사는 때로 불치병에 걸린 환자나 그 가족에게 사실을 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을 숨긴다고 그의 병이 호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알리고 암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치고 함게 대처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일 것입니다.
2. 이미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어쨌든 주님은 자신이 떠난 이후에 제자들이 닥칠 상황을 ’불‘의 상황으로 전제하신 다음, 자신이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49)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불이 이미 붙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인해 이미 고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불의 고초가 닥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게도 불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더이상 무엇을 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받으실 세례입니다. 한 마디로 ‘불의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받을 불 세례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겐 물세례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후 주님은 당신께서 예고하신 대로 무서운 고통의 홍수에 던져졌습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오래 전에 이 일을 예견하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42:7)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불평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사실은 고난을 자처하신 만큼 능동적이시고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다른 아기들은 태어남에 있어서 피동적이지만 에수님은 능동적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스스로 떠맡고 자기 백성 대신 지옥의 고통을 당하기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여기서 주님이 자기 마음이 ‘답답하다’고 토로한 부분을 가지고 다른 해석들을 가합니다.
~ 그러나 이는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자원했다 해도 고통 앞에서 기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이 당할 고초 앞에서 가장 인간적인 심경의 일단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토로가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입니까? 나아가 이 말씀, 즉 주님의 ‘답답함’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순간까지도 앞으로 제자들 앞에 닥칠 죽음의 고초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신이 죽으러 가는 마당에 자기 걱정은 하시지 않고 되레 제자들이 닥칠 죽음과 고초를 더 염려하신 것입니다.
3. 화평이 아니라 분쟁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은 이상한 말씀을 또 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이 화평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케하기 위해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와 읽는 자들에겐 하나의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9:6)이며 특히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7절)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평강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어떻게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1:79)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들 중에 평화로다“(2:14)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이 모든 성경 말씀은 가장 강한 어조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평화를 전달하는 자로서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분쟁을 조장하는 자로 스스로를 소개함은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는 ‘역설’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마샬’이라 하는데 이 마샬은 유대인들의 어법에서 자주 발견되는 용법입니다. 예를 들어 마 5;34의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하는 어구를 보면 이런 표현을 통해 읽는 자로 하여금 갑자기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맹세를 금한 것이 아니라 맹세에 관한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말씀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오늘 주님도 자신이 세상에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세상이 둘로 분열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제자들이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은 평화로웠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까지 세상은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자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만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대신에 교회의 종탑에서 평화의 노래개 울렸습니다. 악한 영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천상의 포효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주님이 이렇게 소리치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51절)
이제 제자들은 세상의 분쟁을 볼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 많은 환난과 고초를 겪을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얼마나 많은 분쟁들이 목격됩니까? 주님은 이 분쟁의 상황을 가장 가까워야 할 대상으로까지 확대하여 경고합니다. 제아무리 세상이 요동친다 해도 인륜의 근본이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경고한 분쟁의 세상에는 부자지간과 모녀지간과 고부지간에 불화가 발생하고 서로 다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딸을 죽이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죽이는 세상입니다. 어제 오늘 뉴스는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그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린 한 젊은 여인의 이야기로 도배를 했습니다. 아, 얼마나 더 독한 일들을 우리가 보고 살아야 할까요? 이 정도이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짐승들의 세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세상의 본질임을 주님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4, 결어
지금도 우리는 요동치는 세상을 바라보며 삽니다. 영적으로 칠흙 같이 어두운 세상의 한 가운데서 촛불 하나 달랑 들고 빛을 밝히고자 하는 일은 세상이 보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깔보고 복음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최근의 한국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즐길 것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교회의 소리를 무시하고 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옛날 고리타분하고 퀘퀘 묵은 이이기로 치부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질풍노도와 같은 쾌락과 방종의 세월에 치닫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온통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세속문화는 교회 안까지 침투하여 많은 신자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타락입니까?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위해 고초 당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이 땅에서 복락을 누리려는 그런 세속적인 욕구와 바램들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환난을 겪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결국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바람 앞의 등잔불이요 쓰러져 가는 갈대 같은 것입니다. 물론 결국에는 승리하고 좋은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녹녹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25)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환경을 통해 자신의 제자들이 교만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면 늘 깨어 근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환란의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말씀으로 믿음을 더욱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사람만이 어떠한 환난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강한 확신의 힘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신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우리를 깔보고 능멸하고 조롱해도 결코 성도 한 사람의 믿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작은 존재라 해도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힘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어둡고 춥고 냉혹한 곳이라 해도 햇살 한 줌을 사라지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결코 의심하지 마시고 이 번 한 주도 승리하시길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24주차. <사마리아여행> 불을 던지러 왔다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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