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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은 한 개인의 사상체계일까?|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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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아직도 소개되지 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인 개혁신학자들의 계보와 저술(저작)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방대한데, 무엇보다 개혁신학 및 그에 인접한 장로교 혹은 청교도들이 산출한 신조(Creed)들과 문답서(catechism)들의 분량과 수를 보면, 여타의 개신교 분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방대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하이델베르크, 벨기에, 제네바, 1·2 스위스 신조 등이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헝가리 고백, 바젤, 앵글리칸 등의 지역적 신조들과 윌리엄 파렐. 쯔빙글리, 파렐, 칼빈, 베자 등의 인물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산출했던 신조들이나 문답서들을 보더라도 그 분량과 수가 역시 방대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대한 개혁신학의 인물들과 저술들을 파악해 보면서 알게 되는 신학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혁신학은 어느 한 인물의 개인적인 신학체계가 아니라 방대한 신학적 서술들을 유기적으로 아우르는 객관적인 체계로 된 신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체계는 절대적으로 독창적이라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공적이고 객관적인 체계로서 여러 인물들의 사상들을 잘 아우르는 것이 바로 개혁신학의 독특성이자 일관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주의의 맥락 가운데서는 신학 또한 항상 독창적이며 개인적인 것들이다. 특별히 해체주의적인 발상들이 독창성과 창의성이라는 명목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시연되고 있는데, 급기야는 개신교의 근간이 되는 신학체계나 교회정치체계에 대해서까지 다시 정립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공공연히 시도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사실 그러한 시도들이 공공연히 시도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신학체계가 확고하고 굳건하지 못한 것을 반증해 주는 현상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세례 후 도유(Anointing)’ 혹은 견신례(confirmation)’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교리문답교육을 강조했는데, 그 때에 그러한 교리문답교육의 목적은, 첫째로 세례문답교육의 시행 가운데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각성시키며, 둘째로 신자들 사이의 신앙의 일치를 확고히 도모하기 위하며, 셋째로 많은 이들의 무지(無知)를 줄이며, 넷째로 신자들이 새롭고 이상한 교리들에 무분별하게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독창적이고도 창의적인 새롭고 이상한(정통 교리와는 다른) 사상들에 많은 신자들이 현혹되는 것과, 아울러 심지어 교단들의 신학교에서조차 그처럼 새롭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들이 무분별하게 설파되고 있는 현실은, 교리문답교육을 공고히 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현대 개신교 신앙의 취약점을 그대로 파고들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장로교회들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벨직, 도르트 신조 등은 그것이 공적으로 채택한 신앙고백이라는 점뿐 아니라, 심지어 국제적인 회의를 통한 합의에 의해 채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사실 그러한 신앙고백들에 내포된 문맥들을 정확하게 풀어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회의 구성원들에 관한 연구와 이해뿐만 아니라, 그 시대까지 이어져 온 정통신학의 명맥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 그 가운데서도 내로라하는 장로교단들에서조차 그러한 배경지식과 선이해를 제대로 갖춘 신학자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심지어 신학교 교수진의 연줄을 파악하여 줄서기를 하지 못하면 자신의 학문체계조차 펼쳐볼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조직으로 된 것이 신학교들의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관련 매체(Mess Media)S·N·S를 통해 확산되는 주장이나 정보들은, 얼핏 개신교의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나마 남은 틀과 기반마저 해체해버리려는 불순한 역할을 할 여지가 다분한 경우가 많아, 더욱 혼란을 조장하게 되는 모양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신학생(목회자후보생)들과 신자들이 공히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은, 개인적인 식견을 피력하는 자들의 설명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을 대표하는 정확한 인물들(인물의 신학)에 대한 계보를 바탕으로 하는 저술(著述)들에 대한 이해와, 무엇보다 역사 가운데서 논의와 채택의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남아 있는 교리문서들에 대한 학습과 문답형식의 교육에 치중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바로 그러한 신앙의 자세 가운데서, 우리들은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게으른 모습들을 각성하며, 신자들 사이의 신앙의 일치를 확고히 도모할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무지(無知)를 줄이고, 새롭고 이상한 교리들에 무분별하게 끌려가는 일을 사전에 대비하고 차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기 시작하면 이내 발생하는 행실(行實)’의 강조, 즉 지식만이 아니라 올바른 행실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지적들이다.

 

얼핏 그 말은 일리(一理)가 있는 것이지만, 너무나 흔히 그러한 말로 인해 무르익는 지적 분위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다시 신앙의 감정이나 행실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타락한 존재는, 열 가지의 지식(십계명)이 들어가도 한 가지의 행실도 나오기 어려운 무능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단 한가지의 지식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행실들은 자신의 본성에서 나오는 온갖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과, 그럴싸하게 평토장(平土葬) 된 위선(僞善)들 뿐이다.

 

열 가지의 정확한 지식을 가진 자(그러한 자 가운데서 또 열 일수 있겠지만, 18:3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두 가지 행실을 비로소 은혜로써 입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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