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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있어 ‘타락전 선택’이 갖는 중요성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3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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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큰 이슈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혹은 반응)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가?’하는 물음인 것 같다. 이를 좀 더 전문적인 신학용어로 규정한다면, 의의 전가(轉嫁)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칭의성화에까지 연계되느냐에 관한 물음이다.

 

사실 이러한 물음은 북미(미국과 케나다)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 신학에서는 상당히 학문적인 바탕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 같으나, 한국에서는 주로 목회자들의 윤리·도덕적 타락이 보편적인 문제로 부각될 만큼 심각해지면서 급격히 이슈가 되었다. 그러므로 소위 유보적 칭의론(eschatological reservation)’의 반대 위치에 있는 전통적인 칭의론에,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구원을 주장하는 빌미가 되는 취약점이 담겨 있는 사실을 그러한 한국 개신교의 타락상이 실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강조되는 신학적 주제는 성화(sanctification)’이며, 그 때에 비로소 신앙과 구원에 있어 신자의 책임과 역할이 강조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재인식은, 우리의 신학(포괄하고 싶지는 않고 장로교회들로만 국한하겠음)이 얼마나 시간세계의 현상들에 착념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시대를 통해 개신교가 확보한 진리의 풍성함에서 얼마나 퇴보하거나 역행(逆行)해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태 자체가 작금 우리의 신학이 얼마나 종교개혁의 정수(精髓)의 내용에 무지한지를 심각하게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종교개혁의 시대를 통해 교회가 회복한 신앙의 정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이 돌려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관한 것이요, 그 꽃이 바로 예정에 있어서의 타락전 선택, 혹은 예정(supralapsarianism)’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우선 작정(포괄적인 신적 작정)’예정은 창조 이전의 일이다. 즉 시간적인 개념이 초월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일(의논의 결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예정에 있어서 창조와 관련한 모든 역사와 시간은 전혀 고려됨이 없으며, 심지어 창조 이후의 작정의 실행조차도 근원적으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대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의논(議論) 가운데서의 일인데, 그러한 작정(혹은 예정)에 있어서 모든 일들의 원인은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지)에 따른 것으로, 그 이외에는 어떤 것도 고려됨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작정이 창조 이전의 일이고 거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지) 안에서의 의논 외에 그 어떤 고려(考慮)도 없다는 말은, 인간(아담)의 타락()조차도 일차적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흔히 그렇게 되면 죄의 책임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그의 의지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시는 것이 ()’이냐 하는 문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악이 없으시다는 믿음 가운데서 해결이 된다. 그 실제적인 예로써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한다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아담이 그 실과를 먹은 것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하나님께서 선이시라는)에 대한 의심이요 거절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죄의 원인이 그에게 돌려졌던 것이다. 하나님과 별도로 선과 악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것이 선()이라는 사실을, 아담은 그 실과를 먹는 행동으로 부정함으로써 그 자신이 악()의 원인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의 작정이 아담의 창조 이전이요, 세상의 창조 이전일 뿐 아니라, 창조 이후의 될 일들(아담이 결국 타락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미리 아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자체에 대한 아심이며, 그 기쁘신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아심이기 때문에, 선택과 유기(버리심이 아니라 죄의 본성대로 두심)에 있어서도 그 원인은 동일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성경의 이해였다.

 

이와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산출한 총회의 중요한 인물인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 1575 - 1646)와 사무엘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의 예정의 입장은 공히 타락전 선택의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 역시 동일한 입장에서 예정을 설명한다.

 

실제로 사무엘 루터포드는 그의 교리문답 제4장에서 예정에 관하여 다루는데, 18문에서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런 차이(선택과 유기)가 생기게 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사람 속의 선한 것도 아니요 악한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카트라이트 또한 그의 문답 형식의 교리강론 제6장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어떤 이들을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을 거절하시는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하나님의 순전한 의지와 기뻐하심이라고 했다.

 

이러한 예정의 입장은 롬 9:18-22절 본문에 근거하여 명백히 입증되는데, 특별히 11절은 이르기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의지)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으니, 이삭의 후손 야곱과 에서가 각각 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아브라함의 씨로 삼으시고 에서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도록 그대로 두셨던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 때의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나 반응에 따라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는 결과이며 형식일 뿐이다. 때문에 그러한 믿음의 형식을 전혀 보이지 못하는 영아(嬰兒) 상태에서 죽은 신자들의 자녀(이를 모든 영아들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들 가운데서 모든 택자들 또한 성인들의 경우와 동일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그 형식과 결과는 믿기로 한 신자 자신이나 영아 상태의 택자가 지닌 자아(自我)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순전한 의지와 기뻐하심으로 말미암아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후 11:2절에서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자신의 열심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사도 바울의 열심이지만, 그 열심은 결코 사도 바울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의 수행이 우리들 자신에게서 산출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진정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화와 그로 인한 즐거움(복됨)은 사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에 대해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최고의 영화된 상태인 영생(eternal life)에 이르는 길이니,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과 사무엘 루터포드 교리문답 제1문은 공히 그 사실에 대한 문답으로 되어 있다.

 

또한 우리들은 구원의 확신도 우리 안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루터포드 교리문답 제210문은 삼위께서 계시다는 것에서 당신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고 물은 뒤, 놀랍게도 대답하기를 구원의 확신입니다.”라고 했다. 이어지는 답변에서 그 이유에 대해 이르기를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세 위격의 증인께서 우리의 생명(영생)이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져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구원의 확신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의지(기쁘신 뜻)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구원과 관계하여, 우리들은 아무런 권리(權利)도 기여(寄與)도 없다. 심지어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어서도 우리의 타락을 고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작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작정은 시간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고려함이 없이 삼위 하나님의 의논 가운데서, 삼위 하나님의 의지로서만 말미암는다는 입장이 바로 타락전 선택의 중요한 바탕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이를 알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는 자비와 긍휼 외에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nototia)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궁극점이다. 그 외의 모든 입장들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런(?) 죄의 행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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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증거(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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