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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차. <사마리아여행> 시대를 분별하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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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차. <사마리아여행> 시대를 분별하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리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54~59)




1. 세속주의




우리가 처한 시대를 일러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통칭합니다. 많은 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 시대의 특징으로 진리상대주의를 꼽습니다. 이것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 따라, 혹은 여러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너에게는 옳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틀린 것일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주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근거는 오직 성경에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이지 모든 세계를 총괄하는 진리가 아니며 절대적인 진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세속주의가 잉태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곳에서부터 세상은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물론 세상의 세계관은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 각자가 자기 입장에 따라, 자신의 유익에 따라 기동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단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속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속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주의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주의가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요, 반기독교적이며 이신론적이며 반신앙적입니다. <세속주의>의 저자인 찰스 테일러는 서구사회가 세 가지 지성의 변화를 겪었다고 진단했습니다. , 계몽주의 이전에는 불신앙이 불가능한 시대였고, 계몽주의 이후에는 불신앙이 가능한 시대였다면 지금은 신앙의 불가능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18세가 유럽을 강타하고 전 세계의 철학과 사상 체계의 근본적인 구조를 변혁시킨 주체가 계몽주의라는 점에서 우리는 계몽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잘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로 대변되는 계몽주의는 한 마디로 이성에 눈을 뜨자라는 운동이었습니다. 이성의 밖에 있는 것들은 버리고 이성이 곧 선이고 절대적이며 이성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세계에 굳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단지 신앙의 차원에서만 논할 대상이지 실제 인간의 삶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이 바람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전 세계의 지성적 상황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계에선 18세기 이후, 즉 계몽주의 이후 시대야 말로 하나님이 인류로부터 최고의 부정을 당한 시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서구 문화의 지성적인 상황은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습니다. 찰스 테일러가 지적한 대로 미국 내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일하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그런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 문화의 세속화, 즉 탈기독교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학교마다 당연히 가르쳐졌던 성경의 교육은 거의 금지되었습니다. 나아가 지금은 성경이 금지한 모든 경계선을 허물고 성경에 담긴 하나님중심 사상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시험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속화 문화와 공공정책들은 더 이상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모든 사람은 세속화의 문제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주의는 매일 부딪치는 일상에서의 대립과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두 세계관의 충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둘은 그 내용과 결과에 있어서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세계관은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적 세계관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모든 기독교 세계관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신론적 세계관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앞의 것은 하나님 중심이지만 뒤의 것은 인간중심입니다. 세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두 세계관은 모든 사회적 문제들 앞에서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겪습니다. 한국사회만 해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1) 동성애

~ 최근들어 가장 핫 이슈는 동성애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이미 서구사회에서부터 촉발된 이 문제는 이제 서서히 한국사회의 현안으로 등장했습니다. 동성애 지지자들은 과거에 음지에서 머물던 자신들의 위치를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동성애 반대자들은 거세게 항의합니다. 특히 보수적 기독교계의 반발은 매우 거셉니다.

2) 낙태

~ 낙태의 문제도 시끄럽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낙태는 분명히 생명권에 대한 인간의 개입으로 묵과할 수 없는 불법적이자 반인륜적인 처사입니다. 그러나 이신론적 입장에선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낙태로 인한 여성들만의 피해사례를 열거하면서 낙태죄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원칙을 위배한 위헌적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3) 다양한 영역 싸움

~ 두 세계관의 충돌은 비단 사회적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교육, 공공정책의 입안과 입법 과정을 비롯한 모든 국가의 문제에 이릅니다. 가히 두 세계관의 충돌은 전면전입니다. 그런데 점점 한국사회에선 기독교적 세계관의 패배가 역력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신뢰 추락이 더해져 기독교의 힘이 쇠락 중입니다. 아마 동성애와 낙태와 차별금지법 등에 있어서 이신론자들의 승리가 예상됩니다.




이신론자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추방코자 하는 것은 세상의 본질에서부터 기인합니다. 특히 세상 지도자들은 법과 인권과 복지를 중시함으로써 하나님 같은 신성한 존재의 개입을 철저하게 차단하려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양자택일, 곧 성경의 하나님 편에 서든지, 세상의 복락을 함께 누리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총신대에 파견된 이신론적 이사들이 회의 중에 기도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뉴스는 우리 사회도 이제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는 사회로 진입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 사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기엔 많이 힘든 세상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아마 초대교회의 상황, 즉 로마제국에 의한 공공연한 핍박으로 인한 환란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이 세속화되고 타락의 길에 들어서는 계기는 성경의 권위를 배척할 때입니다. 칼 헨리가 지적했듯이 세속적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지는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신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세속화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다시 말해 불신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세속주의’(secularism)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속주의 세계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한 마디로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은 모든 점에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겉은 같아 보이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현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속적인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두 부류는 같은 인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3.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대 분별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교훈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반드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 시대(time, era, age)란 현존하는 인류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상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어찌 되든지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가 알아서 살면 된다고 말하지만 이 말속에는 당연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모순이 담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나 살지 못합니다. 의식주 모든 부분에서 시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간혹 산속에서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모든 편의적 제공을 거부하고 산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현대사회가 만들어준 전기를 사용하고 전화나 핸드폰을 사용하고 TV를 보고 음식을 조리할 때 각종 양념을 사용하고, 차량을 이용해 짐을 나르고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합니다.

~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를 역행하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시대적 산물들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의 방편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는 더 많은 시대적 은혜를 입고 살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혜택들이 반드시 정신 건강과 영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 현시대는 복음의 상시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역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시대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은 시대를 분별하라고 했지 시대에 함몰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각 시대는 자신이 가지는 특정한 문화와 조류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한 마디로 세속주의라는 것인데 이 세속주의는 시대마다 다른 내용과 모습과 특성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다른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와 관계없이 단 하나의 근거를 가지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성경만 있으면 어떤 시대에도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은 시대마다 자신이 생존하는 비법이 다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사는 방식도 다르고 목표도 다르고 내용과 질과 방편들도 다릅니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분별력을 잃고 시대정신에 미혹되어 세속적 가치관을 소유하거나 잘못된 신앙지식을 가지고 잘못된 신앙 행위를 할 때입니다. 가령, 동성애를 지지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창조적 질서로 만들어주신 경계를 허무는 결과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의 위치를 바꾸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속성들과 위치와 자질과 특성과 개성들이 주어졌습니다. 해는 해대로 주어진 위치와 역할이 있듯이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주어진 위치와 기능과 역할과 존재적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남녀 구분없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시고 차별 없이 상호 협력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남자의 역할을 여자가 대행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인권적인 차원에서 평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전혀 본질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로 다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법도를 어긴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동성애를 반대하면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호도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상대를 미워하거나 핍박할 권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두 가지 전제를 이해했다면 이제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는 주님의 교훈적 가르침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두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첫째 질문.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주님은 시대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쉬운 비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천지의 기상변화에 따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날씨가 어떠할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대를 분별하는 일도 당연히 쉽게, 뚜렷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그다음 말씀 57절에서 주님은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문제를 꺼내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일에 미혹되었다면 그는 충분히 자신에게 주어진 판단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으로 사리 분별을 하지 않고 그냥 세속적인 흐름이나 사람들의 조류에 편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철저한 이성주의자입니다. 동시에 이성은 바로 이런 일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 아마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무분별함을 염려하신 것일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은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니지만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주님의 현재 위치와 사역의 내용과 현재 위치와 입장과 거대한 구속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지점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안목이나 지혜나 분명한 인식이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일, 선포하시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모르는데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주님은 이를 안타까워하십니다. 아무도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 주님에게 닥칠 십자가 수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과 철저한 세속화적 경향에 대해 주님의 안타까운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그래서 56절에서 사람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여라고 소리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외식분별함이 없는 무지를 지칭하지 않는다고 누가 반문하겠습니까?




둘째 질문. 옳은 것이 무엇입니까?

~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 믿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 근거가 옳은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나 지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단지 자신이 옳은 것이라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를 가지고 길이를 잰다면 어떤 길이가 맞는 길이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이렇듯 사람들은 모순적입니다. 이를 두고 유명한 변증학자인 반틸은 불신자들 안에 내재한 합리주의와 불합리주의의 모순과 충돌이라 하였습니다. 실상 인간은 모순을 가지고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불신자들만 모순을 가지고 잘먹고 잘산다는 데에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불신자들의 불행의 원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모순을 지닌 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옳다하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 하면 그른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자신이 모순덩어리이면서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 주님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이 세상의 절대적 기준과 법칙과 중심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왜 이 사실을 얼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서도 아직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는 질책섞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앞서 주님은 너희 보물 잇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12:3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라는 유일하고 가장 값비싼 보물을 앞에다 두고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이야 말로 세속에 현혹된 가장 큰 외식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주님만이 진리이십니다.




4.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에는 앞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담긴 듯합니다. 갑자기 시대를 분별하라는 내용 뒤에 고소자와의 화해와 빚을 다 갚으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언뜻 보기엔 다소 어색하고 매우 난해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해설자들의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중 핸드릭슨의 해설이 눈에 띕니다. 그는 앞의 41-46절은 나는 신실한 종인가, 신실하지 못한 종인가?“를 자문해 보는 말씀이라면 49절에서는 을 등장시킴으로 갑작스러운 위기의 순간을 고조시키고, 이어 52-5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소속을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분쟁에서 당신은 어느 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분쟁에서 아버지 편입니까, 아니면 아들 편입니까? 시어머니 편입니까, 며느리 편입니까? 동시에 이 분쟁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인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까?




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 주님은 각 사람들이 먼저 이웃과 화해할 것을 주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시대의 상황을 잘 분별하는 일과 동시에 분쟁의 소용돌이에 갇히지 말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소송의 문제에서 법정 안으로 문제를 끌고 가지 말고 되도록 법정 밖에서 해결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것이 법관으로부터 받는 처벌 판결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적대자나 고소인과의 화해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하다간 당신은 꼼짝없이 재판관에 의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가치나 문화적 특성 등 시대정신을 무시하고 당신의 고집대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 가지 더 덧붙이십니다. 빚을 남기지 말고 다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에 어울리는 도덕과 윤리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빌리고서도 갚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앞의 말씀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의 제자는 무엇보다도 건전한 물질관을 소유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윤리에 해당합니다.




5. 결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는 일과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목을 추구하는 일과 다른 사람에게 빚지지 말라는 교훈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을 새겼으면 합니다.




첫째,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 줄 정확하고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 주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늘 묵상하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세요.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오 희망이시오 진리이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5)

나아 아버지는 하나다“(10:30)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둘째, 세상에 미련이나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 세상은 나의 보호자가 아닙니다. 세상은 나를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은 마치 아내를 버리고 창녀와 함께 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모든 일에 개입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런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견고한 인생, 유혹을 받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세속화에 미혹되어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위치한 곳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이것이 분별력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기초 되어야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 시대에서 나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싶은 것인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 교회사에서는 탁월한 시대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시대의 현안들과 사상들과 가치관들을 정확히 읽어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 프랑스 리옹의 주교를 지냈던 이레아니우스(130-200), 삼위일체라는 라틴어 용어의 제조자인 터툴리안(160-220), 아렑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20), ‘헥사플라의 저자 오리게누스(185-254), 아리우스주의의 추방자인 아타나시우스(290-373), 그리고 은혜박사이자 일명 어거스틴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등 초대교회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변증가들과 신학자들 모두 시대의 분별하고 탁월한 지혜를 교회에 제공한 인물들입니다. 그런 기초가 있었기에 중세의 보에티우스(480-524)와 스코투스(800-877)와 안셀무스(1033-1109)가 나타나 시대의 요구에 대답했고 마침내 종교개혁가들을 낳고 칼빈으로 하여금 기독교 신학의 총합을 이루도록 한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합시다. 시대정신에 미혹되지 맙시다. 오직 성경을 들고 살아갑시다. 그 길만이 유일한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요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맙시다.




셋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소한의 모범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 무엇보다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는 곳이지 원수를 미워하고 관계를 단절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사절단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만한 출혈이 생깁니다. 우리의 사랑을 원수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위해를 가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간단한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늘 간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 다음으로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보물 잇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주님을 소유하셨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다 하찮은 소유물입니다. 세상의 것을 탐내지 마세요. 돈을 손에 쥐고 쩔쩔 매지 마세요. 그런 것은 어린아이나 하는 유치한 짓입니다. 무엇보다 빚지지 말고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빚을 졌다면 약속한 날짜에 정확하게 갚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태도를 진실하시다고 칭찬하십니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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