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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코스

신윤식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9. 7. 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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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교회성장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각광 받고 있는 ‘알파코스’라는 것이 있다. 한국 기독교에도 꽤 깊이 넓게 만연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항상 교회성장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알파코스라는 것이 좋은 대안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알파코스를 도입하여 실시하고 있는 교회들 중 상당수가 좋은 효과를 보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하겠다. 교회 성장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에 마음을 뺏긴 목회자들이 알파코스가 주장하거나 추구하는 내용들이 성경적으로 옳은지를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채 도입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만연된 분위기는 성경의 핵심 진리인 십자가 복음을 마치 시대적 사명을 다한 유물 또는,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골동품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 복음만으로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늘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한국교회에 유행하다 사그라진 프로그램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 도입 했다가 한계를 느끼면 또 다시 교인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 도입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는 것은 커지고 많아지는 것이 진리의 증거물이 아니란 것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발생하는 운동이나 프로그램들은 말씀을 기준해서 점검하고 분별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관심을 교회 부흥에만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효과적인 것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알파 코스란 무엇일까? 알파코스는 영국 런던에 있는 ‘성 삼위일체 브롬프톤’ 성공회 교회에서 불신자들을 접촉하기 위해 1976년에 당시 주임 신부였던 찰스 만함에 의해 시작된 전도 프로그램이다.

이점만 생각한다면 단순히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알파코스는 성령 체험에 초점을 맞춘 은사주의 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라도 알파코스는 건전한 전도방법으로는 권장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에 초점을 둔 전도 방법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는 체험과 표적을 앞세워 사람을 모으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기독교에서 성행하고 있는 여러 전도 운동도 사람을 모으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알파 코스라는 프로그램만을 권장할 수 없는 전도 방법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분명한 것은 그동안 여러 전도 방법들을 성경적 점검 없이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교회 성장을 꾀했던 한국 기독교의 무지함이 알파 코스를 도입하게 했다는 것이다.

알파란 명칭은 다섯 구절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한 것이다. 첫 글자 A는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는 뜻의 Anyone can come으로 기존 신자, 새 신자, 불신자 모두를 환영한다는 의미다. L은 ‘웃으면서 재미있게 배웁니다’는 뜻의 Learning and Laughter로 유머를 통한 마음 열기라는 의미다. P는 '음식을 함께 먹습니다'는 뜻의 Pasta로 환영의 의미고, H는 '서로 섬기며 돕습니다'는 뜻의 Helping one another로 격려의 의미가 있으며, 마지막 A는 '무엇이든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는 뜻의 Ask anything로 인정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알파 코스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점을 함께 나누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돕는 전도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과연 ‘전도’의 의미를 무엇에 두고 있는지 부터가 의심스럽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파하는 것이고, ‘도’는 곧 십자가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빠진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단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개 교회를 확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이 골 4:3절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한 것처럼 바울이 말한 전도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일에 매임을 당하였을 뿐인데 과연 전도를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전도의 성공으로 여겼을까?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된 선지자라 하자 그들이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그래도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시며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요 6:26-27).

또한 예수님은 표적 보여주기를 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고 하시며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말씀하신다.

교회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집중한다면 전도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알파코스의 오류와 빗나간 성경관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현대 교회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교회로 집중되어 있기에 말씀을 기준으로 한 분별력은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들도 알파코스의 건전성을 변호하며 옹호하고 있다.

더구나 목사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목사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하든 감히 성경을 기준으로 점검하려고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목사가 하는 일에는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이라고 알고 있고,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목사가 더 뛰어난 지식과 안목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목사의 무지와 무분별력이 교인들도 함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알파코리아 홈페이지에 있는 알파코스 소개 내용을 보면, 영국에서 알파코스가 시작될 당시 영국교회의 상황이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으며 교회는 썰물처럼 성도들이 빠져 나갔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17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0%가 교회를 떠났는데 떠나는 젊은이들이 남긴 말을 두 가지로 요악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하지 말고 보여 달라’는 것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의 말을 어떻게 하면 충족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신약성경의 전도 원리를 찾아 30여 년간 끊임없이 보완 발전되어 오늘의 알파코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알파코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보여주지 못해서 청년들이 떠나갔기에 결국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신사도운동이 ‘보여주는 신앙’에 역점을 둔 것처럼 알파코스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증거를 보여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남을 것이고, 떠난 자들도 돌아오며, 예수를 알지 못한 불신자들도 예수를 알게 된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음을 주지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아라는 증거, 즉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이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유일한 표적으로 삼아 이미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신 것이 된다. 문제는 인간에게 십자가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다. 말씀이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기대한다면 결국 이미 성취된 표적에서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기대한 것을 보기 위해 다른 것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메시아는 이래야 하고, 성령의 역사, 믿음의 역사는 이렇게 나타날 것이다’라는 잘못된 선입견으로 인해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타난 예수님을 해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심으로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확인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십자가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과 활동에서 메시아 되심의 증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고전 2:8-9절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인간이 자신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 스스로 십자가를 이해하고 믿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어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는 말을 한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써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증거를 근거로 해서 생각하게 되면 성령의 오심과 성령의 역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인 십자가를 남기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남기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성령의 오심의 이유에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근거하여 생각해 봐도 성령의 역사를 보이고 체험하는  것에 집중하여 강조하는 알파코스라는 프로그램은 이미 성경에서 멀어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알파코리아에서 소개하는 알파코스의 원리를 보면 ‘신약성경에서 찾은 여섯 가지 전도원리’를 말하면서 그 주제 성구를  고전 2:1-5절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전도 원리가 한마디로 가관이다.

이들의 전도 원리의 첫 번째는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가 가장 정상적이고 자연적이며 생산적인 방법’이다. 이것만 보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부적인 설명을 보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얻는 것이다. 평신도 전체를 군대화하여 동원하라. 우정을 바탕으로 한 전도.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단골손님은 더 많아진다.”로 되어 있다.

과연 이것을 성경에서 나올 수 있는 전도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회사에서 영업직 직원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의 한 내용처럼 느껴질 뿐이다. 또한 세 번째 원리를 보면 “전도는 전 인격을 포함한다.”라고 하면서 머리에 호소하고, 마음에 호소하고, 양심에 호소하고, 의지에 호소하라고 한다. 이것은 호소를 통하여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오도록 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누군가의 호소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고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과 양심은 부패하여 애초에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 만약 호소에 의해 설득 받고 마음을 예수께 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전도는 이미 성령과 상관이 없는 문제다. 오히려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소위 호소력 있는 말재주를 익히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에 의한 철저한 굴복이다. 인간은 말 재주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복음을 전할 뿐이고 성령이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듣고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며 주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주께서는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만 십자가의 도를 담아 전하는 그릇, 도구일 뿐이다.

이들이 전도원리로 삼고 있는 주제 성구를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전도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바울의 말재주도, 호소력도 아닌 순전히 성령의 능력에 의한 전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전도의 주제 성구로 삼았으면서도 인간의 호소를 말하고, 인간적 관계를 언급하는 것은 성구는 단지 치장용일 뿐이라는 의미가 된다.

알파코스에는 10주간의 코스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을 주말 수양회에 두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주말 수양회는 알파코스에 참가한 사람들 각 개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편안한 환경 속에서 긴장을 풀게 되고, 서로간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귀하게 여기시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삶에 심오한 변화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알파코스 전체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영적인 진전이 주말 수양회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이들이 말하는 주말수양회는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성령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표적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때로는 넘어짐이 될 수 있고, 금이빨 현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알파코리아 대표 이상준 씨의 견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지 성령 역사의 여러 현상 중 하나이지 성령 역사의 본질은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그러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주말수양회를 통해 일어난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알파코스는 이처럼 ‘능력 전도’의 방식을 도입하고 의지하고 있다. 여러 기이한 현상들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존 윔버의 ‘성령의 제3의 물결’과 흡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이들이 성령에 대해 얼마나 크게 왜곡하고 있는지는 성경이 성령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요 16:7,8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대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핵심적인 활동이다.

성령은 사물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이다. 성령은 실체가 아니라 활동으로 다가오시는데 알파코스를 포함한 여러 이단들, 그리고 많은 한국교회가 성령의 활동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다.

성령의 활동을 방언과 병 고침 등의 은사체험을 통해 확인하려고 하고,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쓰러짐과 진동, 금이빨 현상과 같은 좀 더 자극적인 것을 동원하여 성령의 활동을 보여주고 확인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세 가지로 성령의 활동을 증거 하는데, 그 첫째가 죄에 대한 책망이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보다 죄 문제에 대해 진지해야 한다. 죄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가에 따라 신앙의 진정성과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죄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참된 신앙의 의미를 알 수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알파코스는 죄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죄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가 피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한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들이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한다 해도 그 또한 진정성이 결여된 형식적인 것일 뿐이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성령 체험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그 죄를 책망한다. 죄는 요 16:9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에서 벗어난 인간의 몇 가지의 행위로 죄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없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뜻이 없는 것이 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해 책망하는데 이것을 요 16: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한다. 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교회생활에 열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의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의로 말한다. 즉 의의 기준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의가 되는 것이지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다.

셋째로 성령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데 이것을 요 16:11절에서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한다. 세상 임금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머리를 의미한다. 머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몸이 심판에서 피할 수 없음을 자명한 사실이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마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 모든 뜻을 두고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성령이 없는 자로 사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신자로 하여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깊이 자각하게 하고 오직 소망은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게 한다. 그런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고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현상을 붙들며 그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집중적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야 말로 성령과는 무관한 것이다.


가시적인 현상과 체험이 있다 해도 그것은 부수적이고 외적인 것일 뿐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현재 알파코스를 맡고 있는 니키 검블은 공식적으로 이런 현상에 대해 소개하지 않는다. 가시적이고 외적인 현상들은 복음의 주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알파 코스인 알파 코리아가 알파코스를 소개하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알파 코스의 문제를 연구한 일부 신학자는 알파 코리아에 대해 영국 알파 코스보다 훨씬 신비주의적, 샤머니즘적으로 나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알파 코리아는 자신들은 빈야드운동이나 신사도운동과는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들의 주장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말 수양회에서 인도자가 성령을 초청하여 그 능력을 회원들에게 전하는 사역을 함으로써 그들이 방언이나 기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한다.

즉 성령을 초청하여 자신들의 집회에 오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사상이기에 성경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령을 초청하여 그 능력을 회원들에게 전하는 사역을 통하여 방언이나 기이한 현상들을 체험하게 하는 것을 주말 수양회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알파 코스는 이렇게 능력 전도의 방식을 도입하여 능력에 의해 나타난 기이한 현상들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자신들에게 나타난 성령이 진리임을 서로 간에 확증하는 이것들이 존 윔버의 ‘제 3의 물결’과 닮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역시 능력 사역을 강조하는 빈야드 운동, 신사도 운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자가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내주를 말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영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알아가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이다.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보게 하심으로써 온 마음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신자가 자기에게서 죄를 보고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고, 주님이 가신 그 길로 가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알파 코스처럼 성령의 능력을 외적 현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결국 표적을 구할 뿐이다. 알파 코스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대체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없고 성령만 남게 됨으로 외적인 현상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크게 잘못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자기 백성을 다스리며 진리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있다. 즉 말씀 자체가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말씀에 대해서 우리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받아들일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동의하게 하고 말씀이 이끄는 길로 가게 하신다.

하지만 알파 코스는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 말씀이 스스로 진리임을 계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동의를 기다리고 사람에 의해서 증거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알파 코스가 성경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변화하고 사랑과 섬김이 나타났으며 진정한 구원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사의 교회를 향한 욕구가 바른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알파코스를 시행하는 목회자들의 말은 하나 같이 교회 부흥에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모래 위에 세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겉모습은 번듯하지만 기초가 약하여 오래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모래 역시 참된 복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등의 체험적 신앙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신자를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세우는 신앙으로 이끌어 간다. 반면에 알파코스는 철저히 체험위주의 신앙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비성경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알파코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알파코스는 단지 전도의 한 프로그램일 뿐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잣대로 비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변하지만 이미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체험에 기초한 증거를 따르는 이상 알파코스는 성경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알파코스는 신사도운동가들과 동일하게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사도들의 복음 전파가 계속된다고 주장하지만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절대로 체험으로 진리를 설명하거나 체험을 증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십자가가 그 중심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신자가 자랑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이지 체험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알파코스는 복음을 실용적인 것으로 변개시키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대체해 버림으로 그리스도는 없고 성령만 남게 되어 그들이 이해하는 성령의 역사, 즉 성령의 가시적인 현상에만 매달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부흥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라며 부흥을 앞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하지만 그 또한 성경의 권위와 복음의 참된 의미를 무시하고 훼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 4:6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을 한다. 진리를 거슬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오직 진리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고후 13:8). 그 증거가 교회 부흥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진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은사와 체험 위에 신앙의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한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사는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세례를 주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고전 1:17).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 설교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나타내고 있는가를 깨닫고 성도에게 전하는 일에 온 마음과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일의 결과가 교회 부흥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설교자는 오직 말씀의 능력만 믿을 뿐이다. 행 26:18절의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는 말씀처럼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능력을 믿는 것이 교회고 성도다. 제발 쓸데없는 가시적인 현상에 정신 팔리지 말고 말씀에만 마음을 두자.




대구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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