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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신윤식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9. 7. 2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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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서 급속히 전파되어 유행하고 있는 것 중에 ‘관상기도’라는 것이 있다. ‘향심기도’‘센터링기도’‘침묵기도’‘숨기도’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관상기도라는 것 역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교회가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운동이다.

문제는 성경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교회가 분별하여 먼저 차단하는 것이 옳은데 오히려 교회가 수용하여 참여하고 문제 있는 프로그램들을 교회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고 스스로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하는 이름 있는 교회와 목사들이 마치 신앙에 아주 유익한 것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교회 역시 이름 있는 목사가 옳다고 하니까 순진하게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목사가 성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다면 도무지 말도 되지 않은 운동이나 프로그램을 교회에 끌어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뭔가 이상하고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 성장을 위해 포기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교회되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기를 포기한 결과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에 치우쳐 있으니 성명말씀은 눈에 들어오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주변의 커다란 예배당만 보면서 거기에 헛된 꿈을 두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관상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자.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곳 중에 고려수도원이라고 있다. 그 곳을 운영하는 박노열 목사라는 이가 말하는 관상기도는 이렇다.

< 관상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는 테오리아로 데오레인에서 유래되었다. 데오레인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

이것을 보면 관상기도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의 체험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관상을 통해서 초월적인 세계와 존재를 인식함으로 하나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부터가 이미 관상은 신비주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노열 목사는 관상기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기도를 세단계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구송 기도인데 이 기도는 입술의 기도라고도 하며, 말을 강조하고, 읽거나 노래로 하고, 기도의 내용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보통으로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둘째, 묵상 기도 또는 명상이 있는데, 이 기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하는 기도라고 한다.

정신은 하나님과 그의 경이로우심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하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정신은 이해와 통찰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묵상에서는 입술은 조용하고 정신은 활동적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셋째가 관상기도인데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라고 하고,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한다.

관상기도에서 입술과 정신은 쉬고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고 한다.

묵상기도가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하고, 관상기도는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실제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관상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초월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음을 자각한다고 말한다. 말 자체는 하나의 종소리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하늘 멀리 존재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분으로 자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라 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 멀리 계신 분으로 여겼다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안에 계신 분으로 자각한다는 관상기도가들 보다 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지 못한 분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들은 또 관상기도와 묵상기도를 구분하면서 묵상기도는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기도라고 하고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존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묵상을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관상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관상이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관상기도를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으로 나누는데, 습득적 관상은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믿음으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고, 주부적 관상은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도 자각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관상기도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성적 사고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며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는 것이다.

현대적 관상기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 중의 하나인 천주교 사제 토마스 키팅은 “말로 하는 기도는 깊이 있는 기도가 아니다”라고 했고, 또 다른 천주교 사제인 토마스 머튼은 관상을 “우연적인 실체들 안에서 모든 실체의 근거이며, 참된 실체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관상기도가 언어나 생각, 상상을 벗어나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철학과 종교에서 행하는 직관, 혹 체관 행위를 기독교적인 기도 행위와 접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아니라 관상이라는 것에 중심을 둔 명상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또한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신비주의적인 성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관상기도가들의 잘못은 하나님을 인식과 자각의 대상으로 여기고 접근한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식되거나 자각되어지는 분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관상기도가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어가는 것은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묵상기도의 한 방법이면서도 하나님을 자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깊이 살펴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그 개념부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뢰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신자는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오직 성경만이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깨닫고 알아가는 것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체험하는 것에 그 목표와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이 성경 묵상과 다르다. 아예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관상기도를 선전하며 권장하기까지 하는 목사들이 그 근본 개념은 은폐해 버리고, 마치 기존의 묵상보다 더 수준 높고 차원 높은 묵상인 것처럼 오도함으로 인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신앙은 이미 다원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십자가로만 향해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 그 정신을 세상에 나타내고 증거하는 교회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짐, 즉 약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약함의 자리에서도 약하지 않고 강한 자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추구하는 힘이 진리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현대 교회는 성장에 효과적이라는 명목으로 성경적인 진단도 없이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다원화된 교회의 현실이다.

종교 다원주의를 경계하는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과 교회조차 자신들이 다원화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다원화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의 원칙과 본질을 잃어버렸다.

관상기도는 4세기경 수도원 수도사들의 명상훈련으로부터 시작한다. 은둔 수도사들이었던 이들은 세속을 떠나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며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근심과 걱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포기하고 세속과의 접촉을 최대한 단절한 채 옥제된 수면과 고행, 노동을 통하여 수도에 힘쓴 것이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수도사들의 명상법과 생활의 규칙은 고대 힌두교와 불교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도사들의 명상훈련은 일반 신도들에게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는데 세계 가톨릭 주교 2000여명이 모인 바티칸 제2공의회(1962-1965) 주교회의에서 예배 의식 갱신을 위한 법을 제정하였는데 그 목적은 가톨릭의 예식을 좀 더 쉽고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여 일반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한 예배의식 개혁운동이었다.

그러한 예식개혁운동에 발맞추어 개발하기 시작한 것 중의 하나가 수도사들이 사용한 관상기도를 현대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현대 관상기도의 선구자라고 하는 토마스 키팅 수도사이다.



토마스 키팅은 관상기도를 현대화하고 타 종교와도 교류하기 위해 힌두교, 불교 수도사들과 만나 초월적 명상을 연구 하였고 심취되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키팅이 현대화시킨 관상기도 사상은 힌두교, 불교, 뉴에이지 신앙과도 혼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힌두교의 요가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관상기도를 오래하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가 말한 무아의 경지란 힌두교나 불교가 말하는 해탈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상기도를 교회가 하나님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수단, 또는 통로로 인정하고 도입하여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적 방법과 훈련을 통하여 접근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비성경적인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했고,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하고 악하고 더럽다. 이러한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자각한다고 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인간의 악한 마음은 그 어떤 수도와 명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와 격리되어 산속 수도원에서 홀로 평생을 수도한다고 해도 인간의 악한 마음은 정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수도원의 홈페이지를 보면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고 말하면서 이 깨달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무아지경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무아지경은 “정신이 어느 한쪽으로 통일되어 자신을 잊어버린 상태”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도 말하고 노자도 도덕경에서 무아지경을 말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불교에서는 이 무아지경을 해탈의 경지로 말하기도 한다.

관상을 통해서 이러한 무아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해 온 생각이 집중됨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감각이 없어진 상태에 이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설사 관상을 통해 그러한 무아지경을 경험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불교나 도가에서 말하는 무아지경도 사실 일시적인 경험으로는 가능하다 할 수 있어도 계속해서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는 없다. 부처가 해탈에 대해 말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삼 전체가 무아지경의 상태에 머물려면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가령 당장 중한 병에 들어서 온 몸이 고통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관상을 하고 무아지경의 상태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무아지경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 키팅은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진정한 기도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심과 중단 없이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란 자기의 성찰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기도(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전통적인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 한다.”고 말한다.

관상에 대한 이러한 내용들만 봐도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즉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자각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마음이 깨끗해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부패의 상태 그대로일 뿐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깨끗하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다. 때문에 관상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도외시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관상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였고 마리아의 기도였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고 하셨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이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체험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간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이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하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을 가지고 오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의 몸이 아니라 죄인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성은 부패하고 더럽고 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다는 주장은 예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이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하고,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한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성경에서 벗어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고 하신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적인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되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고 체험하는 것은 관상기도라는 방법을 통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고 그 사랑과 긍휼에 붙들리고 기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인해 우리의 안에서 역사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지 관상기도라는 방법과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인간이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과 약점들(예를 들면, 조급한 비판, 화내기, 심한 말들, 적대감, 우울증에 빠지기)이 있는데 관상기도를 통하여 그러한 결점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으로 죄의 뿌리와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성화와 흡사하다.

과연 비판과 분냄과 심한 말을 하는 것 등이 줄어들면 인간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죄의 근원은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존재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자기 사랑으로 눈을 돌린 것이 죄다. 그런데 관상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고, 하나님과의 임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존재 가치를 확대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관상기도가 많은 교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도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확실하고 분명한 영적 교제를 나누고 싶고, 그것을 체험하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관상기도를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와 대면하기 위해 침잠하며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작업은 번민을 제거하고 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기에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이성적인 신앙보다는 새로운 정신적이고 영적인 체험이 있는 신앙을 열망하는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욕구에 관상기도를 비롯한 신비주의 운동들이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안에 확산되고 있는 신비주의적 운동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이유도 그것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는 특히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신수행과 신비체험의 추구를 합치시킨 새로운 형태의 영성운동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상관없이 어쨌든 기독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에 관상기도를 자아실현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서 드러난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이 비성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인간을 죄로 인해 부패한 존재로 규정하는 반면에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에 부패성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거나 아예 실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상을 통해 정화되면 하나님과 연합될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상기도의 생각은 토마스 머튼의 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과 이미 연합된 존재이며 관상기도는 이미 있는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된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에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의 사제인 윌리엄 쉐논은 인간이 처한 딜레마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 망각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집단 경험이다. 사실 여기서 원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신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낙원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다.”토마스 키팅 역시 “우리의 참된 자아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의 참된 자아가 지닌 선이 우리 존재의 기본적 핵심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관상기도가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관상기도를 통해서 그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깨닫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회복한다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관계적 교통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화목은 존재론적인 연합이나 일치가 아니라 관계적 교통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피조물이며 창조주와 존재론적으로 합일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에서도 왜곡된 해석을 따르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을 인간의 내면에 새겨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어떤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배경으로 토마스 키팅은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키팅의 이 주장은 토마스 머튼의 “우리 내면의 ‘나’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므로 그 ‘나’가 깨어나면 자기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하는 역설로 하나님과 영혼은 단일한 ‘나’처럼 보인다.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일한 인격체처럼 된다. 둘은 하나처럼 호흡하고 살고 행동한다. 둘 가운데 어느 쪽도 객체가 아니다”라는 주장과도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관상기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일치, 연합을 주장한다는 의심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인간을 가치의 기준과 판단의 중심에 두고 있기에 인간의 존재 가치 향상을 위해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일치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관상기도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심각한 오류를 드러낸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전적 부패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강조된다.

하지만 관상기도에서는 이러한 구원이 불가능하다. 관상기도가 인간이 죄인임을 말한다고 해도 결국 관상을 통하여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다고 하기 때문에 죄인이긴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씻을 수 있는 죄다. 그러므로 전적 부패가 아닌 죄인이고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관상기도의 구원의 의미는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신적 요소를 깨우고 그것으로 신과 합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원 개념은 영지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고 심각한 것은 거룩에 대한 철저한 왜곡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거룩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죄의 용서가 가능하고, 죄가 용서된 자가 거룩한 자로 여김 받기 때문에 신자의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관상기도에서의 거룩은 수행하는 자가 인간 내면의 중심을 향하여 생각을 비우고 욕망을 버려 침묵의 수행으로 정진하며 신을 관상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기에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신과의 합일 대신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인간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온전히 발현하는 것을 인간존재의 가장 고상한 이상으로 생각하며, 인간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유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애통도 회개도 성령의 도우심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인간을 처음부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 성경을 철저히 왜곡한 반성경적 운동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관상기도를 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관상기도의 사상적 배경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성경과 맞지 않는 부분은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보다는 교회 부흥의 욕망에 붙들려 있는 것일 뿐이며 이 때문에 교회가 무분별하게 여러 이단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관상기도 운동의 관심은 그리스도께 있지 않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과의 합일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중보자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단지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수단으로 여길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합일의 근거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사실 범신론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관상을 통하여 자신의 참 자아를 직관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그와 합일을 이루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곧 하나님과의 합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거룩 된 신분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성경적인 기독론은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관상기도운동이 성경적인 기독론에서 벗어나 종교다원주의를 향한 길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육체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관상이란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거기서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찾기에 성령에 대한 성경적 견해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관계보다는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 욕구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관상기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의식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로만 들어갈 수 있기에 천국의 백성은 항상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개인의 신비적인 체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관상기도는 개인의 체험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시 성경적인 교회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관상기도는 기도에 대한 관점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이들은 기도를 기도 속에서 정적과 침묵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호흡에도 영적인 의미를 두기도 하는데 들숨과 날숨을 통해서 죄가 나가게 하고 신적인 기운이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호흡을 하는 것이 명상에 도움이 된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한 내용 자체가 성경과 상관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들은 침묵을 동반하지 않는 기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니거나 매우 수준 낮은 기도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역시 성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는 있지만 침묵 자체가 기도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관상기도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위험한 신비주의 성격을 현대인의 정신에 맞게 교묘하게 변형하여 종교적 실천 속에 감추고 다가온 영성운동일 뿐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종교적 허기를 채우려는 수단이고 욕구의 발로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거룩하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합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 내면을 죄 없는 상태로 정화시킬 수 없으며 신적인 정결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참된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허탄한 것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된 존재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자 하는 열망만 있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자기 성찰은 자신의 죄인 됨을 뿌리 깊이 자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은석교회 신윤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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