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1주차. <구원론 강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근거는?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6. 18. 09:11

본문

11주차. <구원론 강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2020. 3. 1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은지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10:14~1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8)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3~14)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실로 이 계획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영적인 존재 중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 사탄마저 이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슨 계획이었습니까? ,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이 지은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몸소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의 삶을 살고 죽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도록 한 계획입니다. 바로 이 위대한 죽음의 사역을 감당하신 분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자 하나님이시자 우리의 구원자시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일러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라 부릅니다.

 

속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코페르는 원래 덮는다라는 뜻을 가진 카파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속죄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죄인의 죄가 덮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뤼트론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구해 준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속죄의 의미를 구약에서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첨가한 것으로 봅니다. , 죄를 단순히 덮어주는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죄인에게 자유를 선물한 것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이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가 스스로 속전을 위한 제물이 되어 값을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물 혹은 속전이라 말합니다. 20:28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느냐고 물으신다면 곧 대속의 값을 치루려고 죽으셨다는 것이고, 왜 대속의 값을 치루셨냐고 묻는다면 바로 나를 살리려고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였습니까? 천하에 악인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주님을 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이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속죄하심으로 내 죄가 사라졌습니다. 죄가 사라지니 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무런 공로도 없는 나를 구원시킨 것도 감사한 일인데 그런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감옥게 갇힌 죄수를 무죄방면 해 주신 것도 감사한 데 자유를 얻은 나를 이제 의인이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의심하고 합리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불신자들 입장에서도 이 조치는 매우 비논리적인 처사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불합리한 논리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오늘 소개한 본문 중 로마서 5:8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8)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씩 살펴봅니다.

 

첫째,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죄인이었습니다. 주님이 언제 죽으셨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둑이요 강도로 알려진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마 그런 죽음은 가장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도둑이나 강도보다 더 흉악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증언합니다.

 

둘째, 그리고 이 죽음으로 증명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정말로 인간을 사랑한다면 죽음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장난삼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나 대신 죽을 수 있어?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린 말로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이를 실천했습니다. 진짜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셋째, 그 결과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소개한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경청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도 인간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만들지 못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피를 흘렸기에 우리의 모든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속죄의 핵심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3~14)

 

한편으로 이 피 흘림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수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6:14 참조)고 말했습니다. , 십자가가 피 흘림의 상징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수난과 피 흘림을 기억하고 주님의 속죄가 아니었다면, 거룩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악이 깨끗하게 씻겨지지 못했을 것이라 믿게 된 것입니다.

~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기피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내용들을 황당하고 꾸며낸 신화 같은 것이라고 폄하하고 단지 그분의 가르침과 자비로운 행적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본보기로 삼기에 가장 훌륭하고 모범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양반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여러 훌륭한 성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2. 하나님의 진노하심

 

넷째, 5:8의 하반부의 증언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회장님으로부터 눈 밖에 난 사람은 생활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매일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더럽고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진술을 참고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아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2~3)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이 진술에 따르면 한 마디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은 희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은 무슨 일을 해도,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쓰던 물건 하나도 쓰레기장에 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는 쓰레기 같은 신세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프, 헤마 /. 뒤모스, 올게, Wrath)는 어떤 것입니까?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반응을 가리킵니다. 이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항하십니다. 인간은 의롭지 못한 일을 보고도 그냥 수수방관하거나 회피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상 절대로 불의한 일을 그냥 눈 감고 지나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아프라고 표현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라는 뜻입니다. 아마 콧구멍을 불거나 떠는 것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사람도 화가 나면 콧바람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콧바람이 거셌는지 시편 기자는 하론 아프’(18:8)라 했는데 우리 말로 진노의 화염이 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모든 것들을 다 불태워버린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등장합니다. ,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는가?’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베푸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했다“(31:3)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의 범죄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도록 허락하셨지만 결국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모든 자녀들을 구원하도록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진노를 보이셨습니까? 주로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자연재해를 통해서이고 둘째, 개인적 재앙을 통해 셋째,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행동, 즉 구속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통해서 진노를 표시합니다. 요즘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히 자연재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주가 만들어지고 운행되고 자연이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언제라도 구속사에 필요하거나 뜻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 태양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빛을 감하고 바람마저 불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보응이기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온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아담의 죄와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진노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1)

 

3. 속죄논쟁: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바로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아들의 죽음 이외의 방법으로는 죄를 대속할 방법이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가?”라는 것입니다. 답은 그렇다입니다.

~ 우리의 좋은 선생이자 목자였던 존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전체 구원 사역의 핵심으로서 이 사역은 영원 전에 계획되고 수행되어 오다가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된 것으로 말합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죄 사함과 구원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예표이자 임시 대리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모든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 그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직무를 3중직이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삼중직을 동시에 완전히 하나로 통합하고 성취하고 완성하신 영원한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 삼중직의 완성을 위해 그리스도는 모든 죄악을 끌어안고 삽자가 상에서 죽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 사역을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위대한 구원 사역을 십자가상에서 피 흘림으로 완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피 흘림이 언약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언약적이라는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즉흥적인 일도 아니고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 언약에 따라 나타나고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두고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어떠한 일도 무계획적이거나 무질서하거나 목적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우리는 지금 주님의 고귀한 희생의 은덕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십자가 속죄는 영혼의 세탁기요,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십자가는 그냥 나무 두 개를 포개 놓은 하나의 상표 혹은 마크에 불과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피 흘림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주님의 대속하심을 믿으세요. 그 순간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추어져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구원의 근거는 주님의 속죄하심 때문입니다. 이 절대불변의 사실을 믿고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겸손함으로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며 살아가기를 당부드립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속죄함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미리 선택하신 특별히 제한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는가? 아니면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는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속죄 논쟁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은 전 인류를 다 속죄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성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선택된 사람들만을 속죄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논쟁입니다. 정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성경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범위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속죄가 아니라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제한적이고 특별한 속죄임을 증거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1)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4:31)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에 살리리라“(6:4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6:70)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17:6)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계시하신 요점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7가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먼저 모든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협약(혹은 언약)에 의거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십자가 상에서의 속죄 사역을 치루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그 속죄의 효력을 믿는 자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어 개인의 구원을 보장하십니다.

2)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4)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로 정해진 사람입니다.

5)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6) 성자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영원 전에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림으로 속죄를 완성하셨습니다.

7) 이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실패하심이 없으시고, 그 속죄의 효력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택자들을 다시 살리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자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을 하나로 보았습니다(10:30).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고 필요하면 아버지께 구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칼빈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헤르만 바빙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예수님은 성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자신을 성부에 철저히 종속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은 절대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듯과 범위와 의도와 목적과 가치를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두고 바빙크는 그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했다고 해설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음이 명확한 것입니다.

 

작년에 소천한 R.C 스프로울 목사는 <하나님의 선택, Chosen by God>이라는 그의 책에서 제한적인 속죄사역에 대해 명쾌하게 진술한 바 있습니다. 몇 구절을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없다.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선언하신다. 이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다

 

17세기 대표적인 청교도신학자인 존 오웬은 예수님이 성만찬 때 말씀하신 보혈의 새 언약(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이 세상에는 새 언약의 복음이 널리 전파됨에도 여전히 그 언약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오로지 선택된 사람에게만 새 언약의 효력이 적용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새 언약은 완벽하게 모든 사람에게 들려졌지만 그런데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 새 언약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이유는 새 언약이 선택된 사람들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과 그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사람은 절대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4. 결어

 

오늘은 구원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속죄 사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의 대상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여 두신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제한적인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찾아 가슴에 새기고 묵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따라 된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제목입니다. 흔히 자신의 구원 체험을 주체하지 못해 간증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내가 예수 잘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뉘앙스가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신 분입니다. 내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신 분이십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속죄와 대속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단 한 순간이라도 잊고 살아선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며 삽시다. 감사의 마음에는 슬픔도 미움도 시기 질투와 분노와 다툼과 분쟁과 비관과 한숨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생명이나 인생을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다 함께 외칩시다. ”Soli Deo Gloria!. 아멘.

 

[출처] 11주차. <구원론 강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근거는? 2020. 3. 15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