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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차. <구원론 강설> 십자가의 7가지 능력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6. 2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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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차. <구원론 강설> 십자가의 7가지 능력 3. 29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자기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6~11)

 

 

1. 그리스도 죽음의 은혜

 

오늘은 십자가의 죽음이 가지는 영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대부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게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아서는 아니 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죄를 씻기는 능력이 있고 영원토록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기 죄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서도 주님의 흘리신 피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브루스 데머리스트라는 조직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여러 목적을 세 개의 동심원을 그리고 설명합니다.

 

1) 가장 큰 원은 온 세상을 나타냅니다. 구주께서는 온 세상의 죄에 합당한 속죄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4:14)

 

2) 중간 원은 모든 신자의 총합, 즉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베푸신 구속의 효력이 실제로 적용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노라”(15)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0:28)

 

3) 가장 안쪽 원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속죄하신 신자 개인을 나타냅니다.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께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나 같은 추악하고 부패한 자를 위해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직접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은 정말로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았습니다. 그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로 말미암아 내 죄가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 몸이 찢어지심으로 원수관계였던 나와 하나님을 화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고통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루터는 이때 나를 위해라는 말을 크게 강조해서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화된 사건이

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의 고통당하는 눈은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은 또한 자기 양 떼에게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은 자비로운 눈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와 당신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2. 십자가의 7가지 능력

 

 

사람은 타고난 성품과 기질, 그리고 취향이나 특성들을 스스로 바꿀 수 있을까요? 많은 전문가들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 자연적인 상태의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독교에 대입해본다면, 만약 기독교가 한 사람의 자연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해 변화되고 거듭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에는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심장이자 진수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 능력에 의해 한 사람의 악하고 게으르며 부패한 성품과 행실이 완전히 선한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진 복음의 능력이자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객관적으로 십자가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며, 죄의 죄책과 오염을 씻어 내고, 신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불구대천의 영적 원수들에 대한 종국적 승리를 성취합니다. 다음, 주관적으로는 모든 점에 있어서 모범 되신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의 정신과 실천은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더해 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는 언행심사에 있어서 모범이 되고자 애를 씁니다. 그뿐 아니라 살면서 당하는 각종 억울한 일과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불굴의 의지를 제공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신자는 인생의 목적을 달리합니다. ‘나의 유익을 제일로 추구하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으로 돌변합니다. ‘나 중심하나님 중심으로 바꿉니다.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7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1) 겸손한 삶을 살도록 도우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 칼빈은 에베소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신 방법을 깊이 생각하는 만큼, 모든 오만과 주제넘은, 모든 교만, 모든 과격함과 악독함을 내려놓은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 어떻습니까? 아직도 당신이 잘난 사람이라 우쭐대고 싶습니까? 아직도 성질을 못 죽여서 괄괄하고 씩씩거립니까? 아직도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이 솟아오릅니까? 투덜거리고 비아냥거리고 비딱하게 말하고 남 좋은 꼴을 못 보아 시샘하고 폄하하고 혼자 독차지하려 탐욕을 부리고,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겠다고 서두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당신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겸손은 지상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의 이름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가장 잘 감추는 방법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제일 먼저 발견되어지는 보석입니다. 겸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의 그림입니다. 이 아름다움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향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1:22~2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거듭난 이들에 대한 죄의 지배를 깨트리고 그들을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합니다. 칼빈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듣습니다. “악은 우리 심령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우리가 우리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은 우리 마음을 반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 앞에 하나님의 본을 제시합니다. (중략) 모든 강퍅함과 지나친 정욕과 무정함과 교만과 높아진 마음과 모든 악독함을 온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신 일들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우리 대신 죽게 하셨다

 

3) 사랑과 긍휼의 삶을 살도록 자극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1~2)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 18

 

~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말로만 하는 자선을 차가운 자선이라 하였습니다. 배고픈 이에게 다가가서 언제부터 굶었느냐, 지금 상태가 어떠하냐고 묻기만 하는 것은 실태조사이지 자선이 아닙니다. 소에게 무엇을 먹일까를 궁리만 하다가 소를 굶겨 죽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희생을 본받으려면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다른 이들의 필요를 돌보고 채우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세요. 그리고 그 사랑을 증거해 보이세요. 속으로만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도 이기주의적인 사람입니다. 사랑은 표현입니다. 한 마디 사랑의 말로 한 사람의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표현입니다. 한국인들의 치명적인 질병은 속으로만 사랑을 하다가 죽은 다음에 무덤 앞에 가서 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랑입니다.

 

4)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잇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19~20)

 

~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시적으로 사탄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속죄 제사를 통해 사탄은 자신의 수하에 감금했던 죄인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지난 모든 허물과 죄악들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모두 덮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가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씩 따지고 들었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원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대하고 관계를 맺고 살라는 숨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라 하고,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라 하는데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바로 십자가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지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시비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진정한 화평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까?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가 서로 싸우고 갈라서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까?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나의 영역과 이익을 침해하는 입니다. 이 무서운 불화를 주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모두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세요.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용서하세요. 용서하시고 끌어안으세요. 그것이 화평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5) 참고 인내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12:2~3)

 

~ 누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까? 그는 아마 복음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는 자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인생은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 됩니다. 조금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게 미친 인생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인생은 이 세상에서는 가시밭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손 마이크를 들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는 한 사람이 우리 마을에도 있습니다. 저는 거리에서 저편 길을 걸어가며 전도하는 그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그 누구도 그에게 눈길를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다른 사람이 관심을 보일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무엇이 고난이고 핍박입니까? 나의 소리에 어떤 반응도 없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분은 거리를 걸으면서 동시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단 한 마디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지 못했기에 진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소리치셨습니다.

 

6)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 의미심장하게 요한은 여기서 이기다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소유하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세우고 목에 걸었다고 해서 주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권능은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만 발휘됩니다. 마치 전기는 나무토막을 통해서가 아니라 쇠를 통해 흐르는 것처럼 주님의 능력은 믿음이라는 전도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성도는 세상을 이깁니다.

~ 잠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내 무릎 앞에 꿇리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긴다는 것은 모든 입술이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이 창조주이시며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그것이 이긴다는 뜻입니다. 이 승리를 위해 우리의 굴욕과 모욕과 비참과 고난이 예비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고난의 승리입니다. 그 광경이 계시록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10~11)

 

7)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2~3)

 

~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이미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이제 자신의 인생은 주님께 다 맡겨버리고 오직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선물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뜻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선행은 십자가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한 사람의 재능이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이타주의로 변화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아직 그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체험하세요. 십자가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세요, 그 피의 순결한 피의 능력을 의지하시면서 살아가시길 원합니다.

 

 

3. 결어: 그리스도를 당신의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영접하라

 

 

이제 결론입니다. 앞의 7가지 내용을 교리적으로 정리해 봅니다.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직분을 크게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3중직이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신자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3중직의 현재적 사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7가지 변화된 인생은 모두 그리스도의 3중직 차원에서 이해되어지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1) 왕직

 

~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왕의 직분을 가지고 통치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1:22~23)고 증언합니다. 또 베드로는 하늘에 ㅇ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한다”(벧전 3:22)고 증언합니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 삶을 주관주장하십니다. 우리를 마르지 않는 샘터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떤 방해와 도전과 핍박에도 결코 꺾이지 아니하도록 철저한 왕권으로 우리를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전을 다른 곳에 의지해선 아니 됩니다. 무당 굿이나 점쟁이의 예언이나 기타 사특한 방법에 우리의 인생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왕권을 가지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우주를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2) 선지자직

 

~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선지자 직분을 행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 사역이 선지자적 사역입니다. 그분은 아버지 품속에 계시고(1:18), 몸소 아버지를 보셨으며(3:32),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2:3)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천국의 이야기를 드려주는 예언자이셨습니다. 얼마든지 천둥소리보다 더 큰 소리롤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 잔잔하고 부드럽고 작음 음성으로 속삭이듯이 우리에게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소리를 낮추어 말합시다. 따뜻하게 말하고 사로 토닥이며 격려하고 위로합시다. 이것이 선지자 직분을 행하는 일입니다.

 

3) 제사장직

 

~ 그리스도는 영원한 우리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제사장으로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이 땅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일거에 행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8~10)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표의 자격을 가지고 하늘의 성소에서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지금도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한 우리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게십니다. 바로 이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는 하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4:16).

~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할 다른 어떤 대표나 중보자가 필요없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대신하여 중보자가 될 수도 없고 대표자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시오 대표자이시오 우리 구원의 보증자이심을 믿고, 한 주간 동안 십자가의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하는 인생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13주차. <구원론 강설> 십자가의 7가지 능력 3. 29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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