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2주차 <구원론강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6. 19. 09:29

본문

12주차 <구원론강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2020. 3. 2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3~9)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더라”(27:27~31)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1. 구속협약

 

신학적으로 죄인의 구원을 논할 때 제일 먼저 거론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삼위 하나님 간의 구속협약이라 말합니다. , 죄인된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속을 통해 구원하기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의 위치와 직분과 사역을 나누고 상호 긴밀히 협력한다는 것을 영원 전에 서로 협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부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원 전에 예정하셨고,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인류가 지은 모든 죗값을 치루어 구속할 죄인들을 도로 사서 하나님께로 돌리는 임무를 완수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값을 치루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의 믿음을 주입시키어 새롭게 거듭난 인생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구속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속죄를 뜻하는 코페르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반적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속박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1) ‘파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주로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초태생의 사람이나 가축을 대속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할 때 바로 속죄를 뜻하는 코페르가 사용되었습니다. 13:13이 이를 잘 나타내줍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 것이니라

 

2) ‘게울라가 있습니다. 이는 다시 구입한다는 뜻인데, 즉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곤궁한 친족을 구속해야 하는 의무나 이미 팔아버린 친족의 땅을 다시 구입해야 하는 의무와 관련됩니다. 게울라에서 고엘이 파생되었는데 이를 룻기에서는 기업 무를 자라 하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속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빼앗기고 잃어버린 자녀들을 값을 치루고 다시 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25:25)

 

 

신약에서도 여러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1) 먼저 지난주에 설명한 바대로 보상이라는 뜻의 뤼트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노예들 혹은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해 바치는 돈이 될 때 뤼트론이 됩니다.

 

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얻게 된 현세의 구속과 장래에 얻게 되는 종말론적 구속 모두를 지칭하면서 아포뤼트로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악형의 고통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 바울 사도가 의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결국 지옥의 형벌을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운 해방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는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구속관입니다.

 

3) 동사로 아고라조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로 시장에서 사용되는 말인데 어떤 물건이나 노예 등을 구입하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하나의 의미는 구속입니다. , ‘값을 치루고 구입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세상에 공짜 없다영국 속담에도 공짜 점심 없다고 했듯이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은 결코 그저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배후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라는 구속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긴 사람이라면 이제 성찬식 때 먹는 포도주 한 잔이 결코 무의미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포도주라는 음료를 마시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그것이 단순히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구속협약의 내용과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구속협약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속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혹은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humbleness)’라고 규정하고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해석합니다.

 

 

첫째,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물론 성육신이라는 단어는 성경이 없습니다. 라틴어로 ‘Incarnatio’인데 이는 몸을 취하다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화신(化神)‘이라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몸소 죄로 오염되어 부패하고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이 땅에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비록 육신을 가진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분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키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 관계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러 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4복음서 기자 중 성육신의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먼저 언급한 마태나 누가와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이전부터 하늘에 계셨던 분이며 그 자체를 말씀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성육신을 말씀이 육신이 된 것으로 풀이합니다. 이런 구절을 기초로 성육신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혹자는 신학 용어들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을 가지고 신학 자체를 터부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요 가엾은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금을 광산에서 캔 금만 인정하고 모래사장에서 캔 금은 금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와 연구들 및 또 이에 반대하는 논쟁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이중상태에 대한 논쟁혹은 신성과 인성 논쟁또 혹은 높아짐과 낮아지심의 논쟁이라 말합니다. 우선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뿐 아니라 높아짐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381년에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존재가 동시에 하나님이면서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 말씀의 성육신은 자기 비움으로 이해되는 대신에 그의 신적인 속성들을 자제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취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신적 속성들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포기했거나 그 속성들을 잠재적인 형태로 지니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판넨베르그 같은 신학자들의 경우, 지상에서 행한 예수님의 삶을 오직 인간의 삶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개혁파 신학은 말씀의 성육신을 신적인 영광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거나 감추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거지와 왕자>라는 희극처럼 왕자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거지 체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모든 논쟁을 정리했습니다.

 

삼위 일체 중에 제 2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자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중략) 전체적이고 안전하며 구별되는 두 본성들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 없이 합성 없이 혼합됨이 없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시었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지만 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82)

 

 

이러한 낮아지심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영광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의 낮아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국 그의 낮아지심은 그를 극한에까지 이르게 해서 그를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굴욕적인 수준으로 낮추자 하나님은 그를 가장 높은 중보자의 자리로 끌어 올리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2:9)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룰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이 고난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예고가 예수님보다 7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오늘 소개한 이사야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3~9)

 

 

여기서 저는 특별한 생각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아기의 엄마로 택함을 받은 마리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삶이 앞으로 수많은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한다고 정해졌다고 한다면 어느 부모가 기뻐할 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마리아라는 한 여성의 심사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가 누구인지를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이미 예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녀는 아기 예수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아기는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떠나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수없이 많은 굴욕과 모멸과 조롱과 비아냥과 헛소문, 괴소문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신성모독의 죄로 체포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아무리 인간적인 정을 끊어내려 해도 그 가슴은 절절히 아프고 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녀의 눈앞에 십자가 죽음의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사형을 당하는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도 큰 소리로 울 수도 없었던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우리는 한 번쯤은 숙연해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처럼 그녀가 훌륭한 여인이라 하여 개인적으로 신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거나 마치 무흠한 여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일 것입니다. 존경하고 흠모하고 그녀의 훌륭한 행실을 본받고자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무엇보다 그리스도 고난의 백미는 마지막 일주일 동안 벌어졌던 고난인데 이것을 특별히 신학적 용어로 수난이라 부릅니다. 특히 십자가상에 못 박히심과 죽으심을 전후해서 당하신 고난을 지칭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파데인해 받으심‘(passion)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러한 수난을 예수님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가와 누가보다는 마태가 더 리얼하게 묘사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심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기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언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로 체포되자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행동도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 기록된 바(13:7)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26:31)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배신의 길을 택하고 도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충성을 맹약하고 절대로 저는 배신하지 않습니다라고 큰 소리치지만 그런 것은 다 헛소리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자기 보신주의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기 몸과 생명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다 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인데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내 모든 일생을 다 투자하는 인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하찮고 버러지 같은 인생들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주님께 우리의 이 가련한 처지를 솔직하게 아뢰고 우리에게 질고와 간고를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연습을 하고 단련해야 합니다. 교회의 작은 일에서부터 동참하는 것을 즐겨 하십시오. 토요일은 교회를 방문하는 날로 한번 작정해 보세요. 토요일에는 세상과 교제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친목 도모를 하는 날로 삼아 보세요. 가족 친지 일가는 그렇게 챙기시면서 교회 가족은 나 몰라라 하면 그리스도의 피 값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의 일에는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90% 이상의 성도들이 주일에만 교회에 한 번 들린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교회에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오직 이기적인 성도들만 있다면 그들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로마당국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지역에서 오직 로마당국만 사형을 집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 자신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이 적중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사형 집행방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오직 노예들이나 이방인 범죄자들애개만 십자가 처형을 실시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성경이 말한 대로 나무에 달려 있는 시체는 하나님께 자주를 받은 것(21:23)으로 믿었습니다. 즉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 가운데서 가장 나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하였음이라”(3:13)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15주일입니다.

 

나는 내가 몸소 당해야만 하는 저주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떠맡았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한 예수가 죽어야만 합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시고”(고후 5:21)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가 예수에게 돌려졌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암시해 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벗어나는 모든 길이 허용되지 않음으로 가장 완벽한 희생제물이자 채무이행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 예수의 죽음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살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분의 자발적인 희생제물 되심으로 우리가 이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종료되고 은혜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3. 결어: 고난의 깊은 의미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물론 인간사에도 자식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수많은 부모들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비하하고 고난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죽음을 자발적으로 응하여 모든 구속의 대업을 이루신 예수님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잇는 모든 고난과 모욕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사람들이 행한 것은 정말로 악한 것이었습니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청한 사람들의 죄책을 명백하게 고발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가...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그를 못 박아 죽였다고 선포합니다(2:23).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그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죄인들의 본성, 곧 하나님과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를 정죄할 것이고, 이방인들은 그를 조롱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를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소개된 마태복음서를 다시 읽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더라”(27:27~31)

 

 

또한 예수님은 자기 편의 사람들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다른 제자는 그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형제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지상의 삶을 살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쓰디쓴 물이 담긴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바로 예수님의 이 고난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2:23).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는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코람 데오의 지극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은 고난 그 자체로만 고난을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가장 따뜻한 손길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지극한 사람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자발적으로 다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움직이고 마감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경륜을 시작하고 이행하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고난과 함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항상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 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시고 구원의 길,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믿고 영원토록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바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믿음 잃지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따를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이번 한 주 동안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출처] 12주차 <구원론강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2020. 3. 22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