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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주춧돌, 하나님의 예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6. 3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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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주춧돌, 하나님의 예정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공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박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아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여 하심이라”(1;3~10)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조심히 다루어야 하는 예정론

 

오늘은 구원의 서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 주춧돌인 작정 혹은 예정에 대해 논하기로 합니다.

 

대다수 설교자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설교 주제 중 하나는 예정론입니다. 이 주제는 사실상 신비에 속하는 일이며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아십니까? 고대 프리지아의 왕 고르디오스가 전차에 매어 놓은 매듭을 말하는데, 그는 이 매듭을 묶은 다음에 이 매듭은 매우 풀기 어려운 것으로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정복자가 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매듭을 풀기 위해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은 이 매듭을 너무 쉽게 풀었습니다. 그는 칼을 들어 단칼에 매듭을 잘라버렸는데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 뒤부터 몹시 해결하기 힘든 진퇴양난의 문제를 일컬어 그것은 고르디오스의 매듭이라 불렀습니다. 예정론이 바로 이와 같은 매듭입니다. 유명한 아더 핑크는 예정론을 일러 신학적 고르디오스의 매듭이라 했습니다.

 

이 주제의 핵심은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당혹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혹자는 이것을 운명론으로 각색하여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정해졌다면 뭣 하러 복음을 믿으라고 전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역으로 공세를 폅니다. 그리고 예정이 맞다면 하나님은 폭군이라고 공격까지 합니다. 자기 사람만 구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시키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다고 시비를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법한 예정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유명한 교의학자인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오직 하나의 답변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뜻의 원인을 탐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큰 다른 것을 요구하는 자이다. 그보다 더 큰 것은 발견할 수 없다”(2292)

 

마찬가지로 예정을 왜 하셨는지에 대한 답은 우리는 모릅니다. 단지 하나님이 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믿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감추신 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답을 계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답을 하자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임스 도브라는 미국의 유명한 성경학자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신 범위를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멈춘 곳에서 멈춰야 합니다. 실상 성경에는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역설과 모순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계시하신 데까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Huc Usque’라고 하는데 여기까지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러 경계선 신학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그 권한과 한계를 작정해 두셨습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때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38:8~11)

 

실제로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이 경계선을 넘습니다. 매우 모호하고 혼동된 부분에 자기 나름대로 답변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호한 문제에 대해 언급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정답은 아닙니다. 모든 이단들은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악용합니다. 자기 유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말씀을 풀어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그래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미혹되어 넘어가서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단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 변조합니다. 필요하다면 없는 말씀을 교묘하게 가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있을 것으로 아시고 성경에 다음과 같이 무섭게 경고해 두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4:2)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30“6)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30~32)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22:18~19)

 

무엇보다 칼빈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람들은 사소하지만 많이 일어나는 난제들로 넘어진다. 특별히 예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접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더 심하다. 예정은 정말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헤쳐나갈 수 없는 미로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고집스러운 호기심 때문에 그 연구 영역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더욱더 노골적으로 돌진해 파헤치려 한다. (중략) 성령님은 우리가 꼭 알아서 유익한 것만 계시하신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만 벗어나지 않으면 예정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유익할 것이다

 

성경은 필수적이며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반대로 필수적인 것이 아니면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 성령의 학교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의 교리를 청중들에게 숨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기강 321)

 

칼빈의 말을 정리하면 하나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분명히 게시하신 것에 대해선 침묵해선 안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을 절대로 잘못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음에도 그것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아 달갑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외치는 것을 일부러 꺼리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예정론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정론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신비롭고 인간의 이성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진리를 선언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에 따라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그런데 예정론의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제기되는 두 상반된 영역의 대립 혹은 마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 예정론을 반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노예적 의지일 뿐이라고 논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정론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그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결정권은 없고 시키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노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조화된 관계는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이며 영원한 신비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를 무시하거나 삭제할 수 없이 동일하게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둘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정작 이 둘이 어떻게 조화되는지 확실하게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이 천국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며 어떤 형태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며, 무엇을 하고 살며, 어디서 거주하며 사는지 등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상징적이고 묵시적인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 대해 로레인 보에트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거대한 성전을 지탱하고 있는 두 쌍둥이 평행 기둥과 같다. 이 두 쌍둥이 기둥은 인간의 시력 안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구름 위에선 다시 만난다.”

 

이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조화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선 해결할 수 있는 신비에 속하는 일임을 증거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하시고 묘사하신 것을 어렴풋이나마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나무그림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나무의 뿌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예정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뿌리에서 두 나무줄기가 생겨나는데 하나는 선택’(택함받음)의 줄기요 하나는 유기’(버림받음)의 줄기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두 나무줄기를 일러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모든 열매들은 이 줄기에서 자라난 가지의 잎으로부터 열리고 맺힙니다. 선택의 가지에서는 구원의 열매, 즉 알곡들이 맺어지고 유기의 가지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쭉쟁이들이 달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구원 나무의 실체입니다. 이 구원 나무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답 이외에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선택과 유기라는 구원의 예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기인한 절대적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금도 훼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꼭두각시나 로봇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구원하시며, 그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선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대립적 요소들을 두고 교회사에선 오직 인간의 의지와 책임과 능력을 강조하는 무리가 있었고 지금도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결정에 따른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에 따라 인간을 구원시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시고 한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적 능력으로 선택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도 올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하나님이 조종하는 로봇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그래도 둘이 과연 어떻게 조화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 두 대립되고 모순되고 반대되는 주장을 어떻게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으로 보이는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의 문을 열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답을 말합니다. 그런 증거들이 수두룩합니다. 가령, 요셉과 그 형제들을 보세요. 그들은 각각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 언약(15:12~21)을 하실 때의 그 예정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42:21, 45:3).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드시고 그 마음을 선용하시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도록 사용하셨습니다(9:16). 바사 왕 고레스도 자신의 자유의지적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귀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정하시고 예언된 일의 성취였습니다(1:1~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확실히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과정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자발적인 결단으로 나타났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자유의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보호받고 인도받는 범위 안에서 허가된 독립된 자유의지입니다. 이 두 부조화를 하나님은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며, 모순이 없으시며,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이십니다. 개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이 역설이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함께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대할 수 있다.”

 

(저는 이것을 내비게이션 법칙이라 부릅니다. 모든 운전자는 가는 길에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안내를 받습니다. 그런데 운전자 생각에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잘 따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운전자는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치 않는 범위에서 기어이 예정된 목적지로 이끄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예정론의 논쟁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두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유념할 것은 주권의 우선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행사되는 것임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압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공로가 앞장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인정되나 그 공로의 가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주권적 역사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조화되고 하나가 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성경을 쓰신 과정을 통해 자세히 나타나고 실증됩니다. , 성경은 최상의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말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기에 인간의 손으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모든 신비로운 현상을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다른 두 쌍둥이 기둥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할 때 많은 인간 저자들을 활용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 기록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기록할 때 하나님은 그대로 기록자의 개성과 특성들을 무시하거나 변경하지 않으신 채 당신의 말씀을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와중에서 기록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바로 이 신비로움 때문에 저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대하고 그 경이로움에 감탄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되고 인간의 지식으로 충분히 조화되어지는 하나님이라면 정말로 그분은 매력을 잃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의 신비한 일들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나님 알기를 애씁니다.

 

3. 결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예정하심을 신적 비밀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놀랍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택함을 받은 주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결코 우리는 우리의 공로나 잘남 때문에 작정되고 예정되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비한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감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를 사랑하시기로 예정하셨기에 나를 택하셨고, 그 택하심에 따라 때가 이르러 나를 구원시키시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실 때 언제든지 그분의 섭리대로 역사하셔서 심지어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안에서 조절되고 이루어지도록 이끄신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구원의 현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은 겉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우리 자유의지요 자발적인 결단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힘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나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발적인 자유의지의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십니다. 마치 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아빠가 뒤에서 붙잡아 주므로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노력하도록 북돋우시고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협력해서 구원을 이룬다는 신인협력설(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을 주장해선 아니 됩니다. 이것은 철저히 계약적인 이해로서 100%의 일 중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맡아야 할 일부분을 나누어 일을 이루신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100% 사역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일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참여케 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 되도록 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선물과 영광의 상급을 받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교훈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본성대로 선택하는 죄성을 가졌습니다. 모든 동물들도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사자는 배가 고플 때 고기를 선택해서 배를 채우지 식물을 택하여 배를 채우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자의 본성은 고기를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모든 죄인들도 그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죄성 대로 선택합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본성이 타락하여 불신앙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그 자유의지는 그저 생긴 대로 본성대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의지일 것입니다. 리어카 바퀴 하나가 작다면 리어카는 계속해서 작은 바퀴 방향대로 기울어져 그 자리에서 돌고 돌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잡는 길은 속히 정상적인 크기의 바퀴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정의 비밀과 그 속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정은 여전히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정에 힘입어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우리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일이 창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후서의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고 감사를 드림으로써 마치겠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할렐루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출처] 14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주춧돌, 하나님의 예정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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