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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차. 구원얻는 믿음의 능력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9. 1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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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강설> 25주차. 구원얻는 믿음의 능력 2020. 6. 21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2:28~2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위로부터의 능력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오순절 이후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능력은 이전까지 인간에게 허락된 적이 없던 능력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받으신 강력한 기름 부음이었습니다. 드디어 이 기름 부음으로 제자들을 중심으로 초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교회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작고 연약하고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또 교회는 교회를 말살하려고 혈안이 된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생존에 급급해 왔습니다. 한국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19’ 사태에 직면한 지금 세상의 눈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주목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코로나가 발생하지만 유독 교회의 코로나감염에는 침을 튀기면서 비난합니다. 세상은 태생적으로 교회를 저주하고 미워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하도 핍박을 받다보니 교회 안에서 이상한 풍조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과 친해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미움을 받는다고 판단하고 교회의 것만을 주장하지 말고 세상적인 것도 함께 사용하다 보면 세상이 교회를 더욱 친근하게 여기고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초자연적인 능력만 의지하지 말고 세상적 능력도 가지라고 말합니다. 즉 세상이 부르짖는 이런 외침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 안에 숨겨진 능력(잠재력)을 개발하라

네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의 힘을 믿으라

마음에 믿는 대로 된다

무한에 접속하라

 

이런 주장들은 마치 마약 주사처럼 주사 한 대 맞으면 반짝하듯이 일시적으로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의 특징이 다 그렇듯이 효과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잠시 즐길 것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가령, 돈을 생각해 보세요. 돈은 있을 때엔 필요한 것을 채우지만 사라지면 모든 공급이 중단됩니다.

 

이들은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을 알지 못한 채 다만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긍적적 사고나 적극적 사고 방식의 힘을 의존하거나 그런 힘을 교회 안에서 사용한다 해도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증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다른 세계로부터 주어집니다. 이 능력은 부드럽지만 저항할 수 없는 능력이며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능력을 다 합해도 미치지 못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이 모든 능력이 한 사람의 죄인이 회심을 하고 중생을 하고 믿음을 가질 때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능력이 성령님의 능력이며 이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교회가 참교회요 참 기독교입니다. 무엇보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받은 교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속됩니다. 세상 가운데서 교회가 제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교회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교회를 핍박하고 말살하려 하지만 그들은 영원한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당을 불태우고 파괴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교회의 비가시성과 보편성 자체를 손대지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철장 권세로 보호받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 가 가진 권세요 힘이요 능력 그 자체입니다.

 

2. 사이비 기독교

 

특별히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진리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수납하는 진리의 가치체계입니다. 기독교는 이른바 계시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 중심의 진리체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교회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윤리적 기독교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은 산상수훈의 교훈들을 인간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자들을 신바벨탑주의자들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닿는 탑을 쌓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어떤 유전공학자는 한 세기 안에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발명할 수 있다고 예고합니다.)

 

토저 목사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는 일은 종교적 소꿉놀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능력은 기독교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적인 능력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며 영원히 그리스도인 안에 머무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깨달으며,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능력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적 능력이나 육체적 능력과도 다른 것이며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능력과는 다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하는 능력과도 다르고, 바닷물을 끌어당기는 달의 인력과도 다른 능력이며, 배가 고플 때 배를 채우는 밥의 능력과도 다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성경은 성령의 능력이라 말합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 접촉할 때 주어집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령의 내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세워진 믿음의 전당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겐 우리의 이 행위들이 참으로 낯설고 난해한 일들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성령의 능력을 모방하는 가짜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님은 외양을 꾸미거나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짜는 자신의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멋을 냅니다. 가짜 교회의 특징이 먼저 여기서 나타납니다. 이들은 겉보기에 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완벽합니다. 대규모의 성가대를 조직합니다. 새련된 복장을 디자인합니다. 실력파들로 구성된 대형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강단을 화려하게 수 놓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음향시설과 좋은 부대시설들을 갖추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마치 선을 보러 가는 예비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비신랑이 꾸미는 최선의 서프라이즈 잔치에 초대받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잘 갖춥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 모든 감흥들이 일시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최면에 걸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잠시 멍했다가 곧바로 제정신을 차린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엔 그 어떤 초자연적인 영적 감동이 없습니다. 예배는 드린 것 같은데 마음속의 공허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가짜 교회의 예배는 그곳에 참여한 사람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그는 한 편의 좋은 쇼를 감상함으로 성령님의 임재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좋은 교훈이고 성가대의 좋은 찬송에 잠시 흡족했지만 진심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런 가짜 교회에선 그 누구도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귀에 들리긴 하지만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창으로 찌르듯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도 매 주일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거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 한번 강력한 위로부터의 능력을 소망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3. 믿음, 참 능력

 

지금 유리 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한 사람의 신자와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 안에서 진실하고 신령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초자연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된 믿음의 능력은 모든 죽은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다”(6:6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진짜 위에서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에 인생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은 이미 죽은 것을 되살릴 수 없습니다. 환자가 이미 죽은 상태라면 아무리 좋은 인공호흡기로도 그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준다 해도 그 나무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제 아내가 새싹보리를 키우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물을 주면 매일 한 자 길이만큼 잎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자라난 새싹을 잘라 주스를 만들어 먹거나 부침개로 만들어 먹은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리석게도 새싹보리 밑부분을 싹둑 자른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새싹보리는 더 자라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안타까운 마음에 물을 주었지만 잎새의 색깔이 이미 노랗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미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죽었던 영이 믿음의 세례를 받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참된 능력이요 신비한 힘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큰 규모로 성장하고 많은 물질을 가지고 섬기고 봉사한다 해도 발생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 체험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한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교회입니다.

 

믿음을 가진 교회에는 매일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올리는 일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지속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교제가 일어납니다. 우울함과 슬픔과 실의에 가득 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발생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구현됩니다. 모든 의심과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과 마음들이 치유가 되고 영생의 참된 복을 즐기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죽은 것을 살리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능력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일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위로부터 주어지는 능력, 참된 구원얻는 믿음의 능력만 가지면 모든 것을 다 해결 받은 것입니다. 이 능력을 여러분 스스로 확신하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4. 결어

 

우리는 신령한 교회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교회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육신적이며 감정적이며 겉치레의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지만 전혀 경건하지 않은 예배가 수두룩합니다. 돈으로 치장하고 그 안에서 예능 놀이처럼 떠들고 재미있어한다 해도 거기엔 성령의 능력, 참된 믿음의 능력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영적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지금 우리가 더욱 반성하고 각자 자기 마음을 살피고 영적 능력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기 전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와 전혀 무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세상의 빛고 소금의 역할을 다햐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지막 교훈을 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으로 소개한 사도 바울의 교훈입니다. 다시 한번 읽고 묵상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첫째, 어떤 형편이든지 자족하십시오. 자족은 불만을 없애는 처방 약품입니다. 자족은 현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음으로 수용하고 만족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는 것의 기준을 돈에 둡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즐김은 하나님에게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둡니다. 누구보다 교회 가족들끼리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즐깁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라”(33:1)고 노래했습니다.

 

둘째,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배움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행복 열차의 티켓입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짐승은 배움이 없어 짐승으로 사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은 책의 사람들입니다.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선조들의 믿음을 교훈 받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능력의 무한한 가치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만약 참된 구원 얻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하나님도 반드시 당신의 일에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의 능력을 보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세요, 물론 죄악된 일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망설이거나 두려움으로 주춤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구원론 강설> 25주차. 구원얻는 믿음의 능력 2020. 6. 21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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