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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차. <구원론 강설> 회개한 자의 특성-거룩한 근심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8. 1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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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차. <구원론 강설> 회개한 자의 특성-거룩한 근심 2020. 5. 31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나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1~33)

 

 

1. 회개의 특권

 

갈수록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회개의 가치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중대한 죄를 짓고서도 나는 하나님에게 회개했으므로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세상 앞에서 고개를 들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위선적인 교인은 주일에 교회당에 나와서 형식적인 회개 기도를 한 다음 스스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돌아갑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이 회개를 싸구려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회개는 물품을 사고 파는 화폐이거나 어떤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잘못을 해 놓고 그것의 중대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무심하고 매정한 태도로 나는 회개합니다고 입술의 고백을 드리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영화 <밀양>이 생각납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감독의 철저한 의도에 따라 반기독교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한 여자의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픔을 잊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아픔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다 여인은 목사님의 설교에 감흥을 받고 용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감옥으로 찾아가 범인을 면회합니다. 그런데 범인은 미안한 표정 하나 없이 자신은 이제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인은 순간 허탈감과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 전단지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으로 마감됩니다. 이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싸구려 회개, 값싼 용서와 구원이 얼마나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인가, 얼마나 기독교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풍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펠라기우스라는 영국의 수도사 한 사람이 로마를 방문했는데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방탕한 삶을 살고있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알고 보니 로마사람들은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죄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미 회개를 했으므로 더 이상 회개도 필요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어거스틴이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었는데 펠라기우스는 단정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어거스틴에 대항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내미시는 구원을 손길을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잡을 때 일어나며,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 해도 방탕한 삶을 살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경고하여 훗날 펠라기우스주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지적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들이며 회개하고 지금도 회개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방종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성령님은 중생하고 영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죄악된 삶을 살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며 한 번 받은 구원의 효력을 잃어버리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거듭난 자라 해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여전히 죄를 짓고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같은 잘못을 짓지 않도록 도우시며 또 끝까지 천국에 입성토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고 싶어도 성령님의 은혜로 인해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중죄를 짓고 방종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실제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펠라기우스주의의 후예들이 교회 안에 기생합니다. 소위 유사칭의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화의 삶으로 증거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받은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거듭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처음 받은 칭의가 취소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런 주장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사람이 바꿀 수 없듯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선언을 인간이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것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이자 절대 법칙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연약하고 미숙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변화되고 성화되어 거룩한 성도가 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자랑스럽게, 자격을 갖추어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구원의 일에는 인간적인 결심이나 결정권이 개입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모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의 일환이자 요소들입니다. 마치 무지개의 색깔들처럼 구원의 여러 요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요소들을 어찌 가볍게 다룰 수 있습니까? 제아무리 현대인들이 값싼 구원을 말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행사를 피조물인 인간이 가벼이 취급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증거하였듯이 진정한 회개는 과거의 일들, 즉 죄 된 생각들, 행동들, 가치관과 세계관, 탐욕들, 그리고 거룩하지 못한 사소한 습관들까지도 단절하고 하나님에게로 완전히 돌아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이 가볍게 취급할 문제라고 보여집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이렇게 무심하고 무정하게 다루어도 된다고 보십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이번 기회에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배우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회개의 7가지 부분들(칼빈의 기독교강요 )

 

역사상에서 회개에 대해 여러 선각자들과 신학자들이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우리는 이 사람의 견해를 특별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는 바로 칼빈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와 여러 설교들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특별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3315항에서 고후 7:11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한 사람에게 주로 나타나는 7가지의 주요한 현상들, 다시 말해, 회개한 사람들은 무엇을 근심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고 살펴봅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이 말씀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근심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마 6:33의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스도인은 이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뜻과 소원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간구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근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근심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입니다.

~ 우리는 거듭나기 전에는 세상일로 근심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했음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생한 불만을 느끼게 된 사람은 동시에 사탄의 올무에서 피하고 사탄의 궤계를 미리 대비하며, 다시는 성령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였습니다.

~ 지금 당신은 무슨 일로 근심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하며 살까, 어떻게 행복을 누릴까를 근심한다면 당신은 회개해야 합니다. 인생은 목적은 소요리문답 제 1번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변증을 위한 근심입니다.

~ 이 근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할까를 하는 근심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부인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일종의 변호, 즉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근심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고 용서함을 얻음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순종을 자기가 저버리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우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기 위해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근심은 거룩한 근심입니다.

 

셋째, 분노입니다.

~ 거듭나고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자기 내면의 추악함을 직시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배은망덕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갖는 사람이 회개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넷째, 두려움입니다.

~ 우리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극심하며 끔찍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근심해야 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겸손을 배우고 매사 조심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다섯째, 사모함입니다.

~ 무엇을 사모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을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모함이 간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안일한 상태를 근심하는 자입니다. 칼빈은 이 사모함을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부지런함과 순종하는 자세로 보았습니다. 당신이 만약 어떤 이를 사모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사모하는 사람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할 것이며, 사모하는 이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저는 사모함이야말로 가장 간절한 소망’(an earnest wish)라 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바른 회개를 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섯째, 열심입니다.

~ 칼빈은 이것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하나님이 긍휼하심으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다면 내가 과연 어디에 빠졌을까라는 생각들이 일어날 때 우리 속에서 생겨나 우리를 일깨우는 그런 열정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은혜가 없었다면, 최악에 처했을 나의 상태를 그리면서,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열심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그런 근심을 말합니다. 이런 열심을 향한 결심과 그 열심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근심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근심이요 회개에 합당한 근심입니다. .

 

일곱째, 벌함입니다.

~ 사탄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슬퍼하며 주눅이 들고 무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끔찍하게 여기고 두려움에 빠져 살기를 유혹합니다. 한 마디로 사탄은 죄인으로 하여금 영원히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양심의 전깃줄로 꽁꽁 묶어 두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사탄은 죄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벌하고 자기 자신을 죽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는 부끄러움과 혼란과 탄식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갖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가지고 나옵니다. 모든 형벌을 집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그 형벌의 심판을 맡기고자 합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의 형벌이 두려울 것입니다. 밤새도록 근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고 용서를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근심은 거룩한 근심들이자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근심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근심들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회개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근심들입니다. 우리가 불신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근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나의 꿈을 펼치고 내 소원을 이룰까 하는 근심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성공하여 떵떵거리며 여봐라하고 살까 하고 궁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사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사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졌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비유하자면 당신은 지금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올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인 회개의 다리를 건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약 당신이 지금도 뒤를 돌아보고 세상일을 염려하며 머뭇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완전하게 이 회개의 다를 건너오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 회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새로운 세계를 향할 것입니다.

 

3. 결어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회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하나님은 죄 사함을 위해 회개하는 마음과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는 이러한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같은 은혜의 효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굳게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5:3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1:18)

 

그 결과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우매한 죄인들은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이킬 영적 의지와 능력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죄의 뿌리가 너무 깊은 까닭에 불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회개하는 것은 구스인이 피부를 바꾸거나 표범이 반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13:23).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만연한 죄성을 지적하면서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5:4)하며 슬퍼했습니다.

 

성경은 시종일관 회개하는 일이 인간의 자발적인 능력이나 본성에서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헤의 결과임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15:5)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개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이자 선물이라고 했습니다(2:4, 딤후 2:25).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자 간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픈 노래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이 가능케 하신 인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환경을 조성하시고 죄인들에게 회개할 능력을 베푸십니다. 이 능력이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이 능력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때가 되면 당연히 회개의 능력을 주시지만, 그 약속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속히 달라고 간청하십시오. 큰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완전한 능력을 주시어서 하나님에게 완전하게 돌아서게 해 달라고 간청해 보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랍니다. 동시에 아직 회개의 능력을 받지 못한 이웃에게 이 능력이 얼마나 복된 것이며 이 능력으로 얻는 회개의 축복들과 특권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증거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아멘.


[출처] 22주차. <구원론 강설> 회개한 자의 특성-거룩한 근심 2020. 5. 31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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