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와 “MINISTER”의 차이점과
성경적인 분석
“PASTOR”와 ”MINISTER“는 둘 다 목사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PASTOR”는 “PRIEST” 라는 단어가 파생되어진 것인데
이 “PRIEST”는 비록 목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로마 카톨릭의 신부와 사제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PRIEST” 가 파생되어진
“PASTOR” 는 목사라는 의미를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로마 카톨릭의 잔재(殘滓 - 쓰고 남은 찌꺼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PASTOR”의 의미 중에 ‘주임사제’ 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MINISTER”는 봉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자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직분들을 열거해 놓은 것이며,
이 말씀 다음인 12절에 이러한 직분들을 주신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 한다.
이 12절의 말씀에 기록된 “봉사의 일”을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에서는
단순하게 “for works of service” 라고 기록하는 반면에
KJV(King James Bible Version) 성경에서는
“for the work of the ministry”라고 심도 깊게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NIV 성경에서는 “봉사의 일”을
말 그대로 “for works of service”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KJV 성경에서는 “for the work of the ministry”라고 기록하고 있다.
NIV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service’ 즉 봉사에 해당하는 단어를
KJV 성경에서는 “ministry”라고 기록하면서
봉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봉사에 해당하는 단어인 “ministry” 에
인칭 어미인 ‘ER“ 이 포함되어 ”MINISTER“ 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를 뜻하고 있는 ”MINISTER“ 는
정확히 말하면 ”봉사자“ 인 것이다.
이와 같이 봉사자는 말 그대로 봉사만 하는 것이며,
자신이 봉사하는 대상자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PASTOR” 는 권한이 있는 반면에
“MINISTER” 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교회에 관한 전반부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가르켜 목회라고 하는데, 이 목회는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봉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목회를 봉사의 의미로 보는 관점은 초대 교부인 어거스틴 때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도 목회를 봉사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목회는 라틴어로 ‘ministerium’ 이고, 프랑스어로 ‘ministere’ 인데
여기에서 영어인 ‘ministry’ 가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 목회에 ‘servare’ 를 사용하여
노예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목사가 교회를 위해 행하는 모든 목회적인 일을 수행한는 것이
노예의 일과도 같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을 뒤이은 칼빈도 목회를 봉사의 개념으로 보았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목회(牧會)라는 말 대신에
사목(司牧)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영어로도 제사장의 뜻을 가지고 있는 ‘priest’ 로 표기하였다. 칼빈도 간혹 성직자를 제사장으로 볼 때도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과는 바라보는 관점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직자에게 권위가 주어지는 반면에
개신교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로마서 15장 16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하며,
그 직무를 행함으로써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고 한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자인데,
이 구절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다.
교회 구성원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사람이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성도들을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도록 만들려면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여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바로 증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드려질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 것이다.
칼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질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복음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께 드려질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목사는 설교할 때 에베소서 6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휘두르는 자이다.
그 일을 통해 성도들의 죄를 낱낱이 도려내고,
하나님께 합당한 제물로 드려지게 하는 것이다.
말씀의 칼을 휘두를 때 가차없이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절 말씀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 기록되어져 있으며,
이어서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덧붙여 기록되어져 있다.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성도들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로 만드는 것이 성직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목회자는 제사장의 역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제사장이지만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때는 그의 제사장 역할이 일시 중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한 번 사제가 되면
일평생 계속 지속되는 특권 의식을 가진다.
그렇지만 칼빈은 제사장직은 말씀을 선포한 그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고, 평상시에는 ‘minister’ 로써 봉사자와 섬기는 자라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제사장 직분이 속성이 되어 지속되고 특권이 되었지만 칼빈에게 있어서 제사장직은 속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부패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였으며,
칼빈 또한 그 주장을 신봉하였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인 즉 비록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가 영적으로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모든 성도들도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고
섬김과 사랑의 봉사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전파자로서의 제사장 이라는 것이다.
혹자들은 목사를 가르켜 하나님의 전권대사라고 말하는데,
이는 지극히 어리석고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것이다.
전권대사란 한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된 자를 의미하는 말인데,
그를 파견한 나라가 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전권대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황당(皇堂)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왜곡하는 죄악이 가득찬 소리에 불과하다.
굳이 하나님이 보내신 전권대사를 말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에서 보내심을 받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전권대사(全權大使)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 위에 서서 군림하는 자가 결코 아니며,
성도들의 아래에 서서 성도들을 봉사자로서 섬기는 자이다.
이에 대한 모범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 친히 보여주셨다.
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저녁 잡수시던 중에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5절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목사들 또한 예수님처럼 성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봉사자인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은태어날 때부터 권리나 의무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가릴 것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도 아닌 교회 안에서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다. 사람위에 있는 사람은 잘못된 권위의식을 내세우는 목회자들이며,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가난하여
교회에 재정적인 이득을 끼치지 못하는 성도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기에
사람위에는 사람이 있지 않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이 계실 뿐이며,
사람 밑에는 사람이 있지 않고 짐승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사람 위에서 잘못된 권위의식을 내세우며 군림하는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며,
가난하여 교회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성도들이 짐승과도 같은 자들이다. 이는 엄연한 인권유린(人權蹂躪) 이며, 이 인권유린이란 사람을 저울질하여 무참히 짓밟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 2장에 경고하시면서 말씀하신다.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는 것이다.
2절로 4절에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차별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5절로 6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자를 더 돌아보시기에 그들을 차별하거나 괄시하지 말라는 것이며,
오히려 부자들이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어서 8절로 9절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는 것이며, 너희가 와모로 사람을 취하면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범죄자로 정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금전적인 빚이 아니라
사랑의 빚만을 지고 살라는 것이며,
그 사랑의 빚을 사랑으로 갚으며 살라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며,
그러한 결과가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뒷면 표지 안쪽에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 1절로 17절에
모든 율법의 축소판인 십계명이 기록되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이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랑인데, 이 사랑을 두 가지의 계명으로 구분하여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꼭 지켜야만 하는 필수적인 규범이라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한국 교회는 목사에 대한 영문을 하나같이
봉사자의 의미를 가진 “MINISTER” 가 아닌
권위자의 의미를 가진 “PASTOR”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목사를 목자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목자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치기이다.
이 양치기라는 말속에는 어느 정도의 권위가 함축되어져 있는 것이다.
양치기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소지하고 있다.
지팡이는 양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지팡이를 내밀어
양으로 하여금 지팡이의 구부러져 있는 부분에 앞다리를 걸치게 하여
끌어 올리는 것이며,
막대기는 양들에게 공격해 오는
이리나 늑대를 저지(沮止-적의 공격을 막아서 못하게 함)하는 것이다.
목사가 목자가 아니라 진정한 목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진정한 목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권위의식을 가지고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급기야는 실족케 하는 목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다.
또한 아울러 그러한 목사들의 잘못된 만행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6절에 분명하게 경고하며 여전히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훨씬 오래전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늘 현재형(---------------------------------ING)인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blog.daum.net/ktsdmin9182/762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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