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자녀가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을 가져옵니다.
읽기 : 창세기 21:1~21, 로마서 4:13~25
본문 : 창세기 21:1~7
시편 113:1,2, 130:3, 126.1,2
찬 7:1,2,3,6, 시편 113: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린아이의 탄생은 대체로 항상 축하할 일입니다.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리고 조금 후에 눈을 뜨고 기어 다니고 하는 순간들이 놀라운 경험입니다.
아이는 몇 달이 지나서 몸매가 아름답게 형성되고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누군가 그 아이를 기뻐하고 축하해주며 모두에게 순전한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 때는 그 기쁨의 웃음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아니 이 웃음은 아이로 인해서 그냥 우습다거나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너무나 놀라우면서 마음에 드는 일이라서 웃은 것입니다.
창세기 21장 6, 7에서 사라가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모든 듣는 자가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아이를 젖 먹일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수 있었겠느냐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설교에서 사라의 웃음과 기쁨을 분석하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라의 일에 머물지 않고, 사라 이후에 훨씬 더 위대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다른 탄생까지 살펴볼 것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누가복음 1장 42에 사가랴의 아내이자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이 마리아를 보면서 외쳤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누가복음 1장 46~49에서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삭의 탄생도 기뻐하고 주 예수님의 탄생도 기뻐할 일이지만 우리의 탄생 또한 기뻐할 일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의 탄생은 자연적 탄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우리의 다시 태어남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 안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는 것은 전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에 계획하신 일이고 그래야 모든 찬양과 기쁨의 웃음이 하나님께로 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음의 주제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약속된 자녀라야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을 가져다줍니다」
웃는 이유?
웃는 자들이 누군가?
웃는 이유
전도서 3장은 말씀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시편 30장 5, “밤새 울음이 지속 되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자녀에 대한 스트레스는 사라도 그렇지만 아브라함도 대단했습니다.
자녀를 갖기까지 그 밤은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기쁨과 웃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웃음이 컸고 오래 지속 되었습니다.
당시 상항을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라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0에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부터 성경은 줄곧 자녀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후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25년이 더 늙었습니다.
사라도 25년 동안 스트레스를 받고 울었습니다. 25년간 잉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계속 거듭거듭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시행할 것이며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한 내용과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그 긴장감을 이해한다면 사라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 경험 사이에 갈등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비교할 때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마 우리가 인내심이 더 부족한 것을 제외하고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방면에서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여호와를 기다리고 그를 믿고, 온 마음으로 의뢰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분의 손안에 모든 것들을 갖고 계시고 당신의 통제 아래 두시며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신자들이 생각지 않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간절히 소원했던 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으면 삶의 기쁨이 없어집니다. 희망이 사라져 간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마음에 부담으로 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래를 보세요, 15년 전 창세기 16장에서 사래가 그녀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종을 통해 아들을 갖도록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아브라함과 사래가 자식 문제로 실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 가정에 좌절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사래에 대해서 쉽게 비난할 것입니다.
사래가 제정신이라면 자기 남편을 여종과 함께 자라고 하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당시 문화적인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과 좌절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1에 “아브라함의 아내는 생산치 못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는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자녀를 갖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뼈있는 말입니다. 사래가 당시에 여호와께 늘 간구했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왜 내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십니까? 왜 내 탄식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왜 제게 아들을 갖도록 허락지 않으십니까?”
대개 자녀가 없거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몹시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가 안 생기면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커집니다.
그래서 아이에 대해서 엄청난 부담을 갖고, 고민도 되고 상실감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래 에게는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녀를 반드시 갖도록 해 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3장 16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15장 5 “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15장 5 “네가 저 별들을 셀 수 있으면 헤아려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실수록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녀에 대한 약속을 하셨나요? 그리고 수년이 지나고 또 지나도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한 자녀를 주시마 약속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약속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땅 위의 가족들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한 약속으로 묶여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그에게 확신을 주셨을지라도 수년 동안이나 침묵의 긴장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마귀입니다.
창세기 3장15에서 여인의 씨, 후손 한 사람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고 말씀하실 때 태초에 사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어떻게 아들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울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탄은 웃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이렇게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여! 너희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분이 네게 말한 약속들과 일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는가?
현실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리라는 소망을 정말로 갖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의는 오늘날도 사탄이 계속 써먹는 수법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15, 16장에서 ”네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아들을 낳을까? 사라가 90세인데 어찌 자식을 낳을까?”(창17:17)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아닙니다. 이스마엘이나 그 하나면 족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오십니다. 이제는 장막 문 곁에서 듣고 있던 사라가 웃은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10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11절에 보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임기가 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라도 웃었습니다.
12절에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도 노쇠하였는데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정말로 사라가 웃었습니다. 이제 그 웃음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어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가 불신해서 웃는 웃음도 아닙니다. 사탄의 조롱 섞인 웃음도 아닙니다.
그 웃음은 감사의 웃음입니다. 너무 기뻐서 웃는 웃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웃음입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사라가 왜 웃었을까요?
단지 아이가 태어나서입니까?
고령에 기적이 일어나서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사라가 웃은 것은 자신은 불신과 약함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1장 6절에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1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권고(방문)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기록합니다. 1년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창세기 18장 14절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하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2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삭이 태어난 시간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대로 정확한 시간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2절 “사라가 잉태하여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정한 시간 이었더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25년간이나 기다렸습니다. 당시 사라는 9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이 지연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탄생 시기를, 그때를, 처음부터 정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때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 하셨습니다.
왜 그때로 정했습니까?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탄생인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여호와께서 언약 백성을 갖는 것, 그분을 위한 한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적의 행위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처음부터 기적이었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고 하나님만이 그 백성을 만드실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 말씀은 참되시고 확고하며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대로 8일째 할례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를 하면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그 약속에 신실하셨고 앞으로도 신실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고백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정한 그 시간에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21장 6, 7절에 보니까 사라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의 증거를 안고 웃었습니다. 그 아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2. 웃음의 참여자?
이삭이 태어나서 가장 기쁜 사람은 사라였습니다.
사라가 너무 경이로워서 창세기 21장7에 어떻게 얘기합니까?
“사라가 자식에게 젖을 먹일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누가 말하였겠는가. 그런데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만이 웃은 것은 아닙니다.
“듣는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 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90세 할머니가 젖을 먹이는 것이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분이 하시는 일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웃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창세기 21장 9에서 이스마엘이 조롱했습니다. 이삭을 무시하고 놀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경시했습니다.
창세기 17장 21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언약을 이삭과 맺으리니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이가 있을 것이라”
그러나 이스마엘이 이삭을 무시했습니다.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이삭에게 등을 돌린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약속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약속을 성취할 이삭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행위로써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자신을 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멀리 추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무리에게서 자신을 끊어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21장 21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을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이삭을 통해서 흘러갈 것입니다.
이삭에게 속한 자들은 이삭의 탄생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과 성취는 이삭의 탄생과 함께 끝나지 않고 어떤 면에서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삭뿐 아니라 이삭의 가족, 이삭의 많은 유명한 후손들, 땅 위의 모든 믿는 가족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삭의 탄생과 훌륭한 자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 것입니다. 이삭의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라가 웃었을 때 하늘이 그녀와 함께 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확약(guaranteed)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꼭 약속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의 탄생을 고대했듯이,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탄생을 약속하셨고 그분의 백성은 그 탄생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8:14)
처녀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그때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여러분!
이삭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주님도 하나님이 정한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순간보다 더 이르지도 늦지도 않았습니다. (갈4:4)
만약 이삭의 탄생으로 기쁜 웃음과 행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기쁨을 맛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라는 모든 듣는 자가 나와 함께 웃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야를 신실하게 기다린 사람들이 구세주가 태어난 것을 듣고 보고 기쁨으로 웃고 노래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엘리자벳이 기뻐했습니다. 사가랴도 정말로 기뻐했습니다.
천사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시몬도 그러했습니다. 안나가 성전에 모시고 온 아기 주 예수님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또한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러 와서 큰 기쁨으로 기뻐했습니다 (마1:10)
그러나 헤롯왕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속된 아이, 구주 예수님을 참으로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된 아이를 통해서 주시는 언약의 복들을 이스마엘처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약속된 아이 이삭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을 가져왔듯이 약속된 자녀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쁨의 웃음을 가져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 약속들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고 행하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창21:1)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또 다른 탄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탄생입니다.
그것은 육적 탄생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으로 기인한 중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20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다”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증하신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 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우리가 웃고 기뻐할 일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죄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소생해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고 우리는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삭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은 그 웃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도 그 웃음에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 권속이 되었습니다.
사라가 웃는 것은 늙은 나이에 자식을 가져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신실하셔서 사라와 마리아처럼 반드시 여러분도 웃게 만드실 것입니다.
(by Stephent’s 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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