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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다루기 힘든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차식목사(김천)

by 김경호 진실 2020. 11. 11. 09:33

본문

여호와께서 다루기 힘든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2020.3.30.)

 

본문 : 사사기 13:22,23 (NKJV)

봉독 : 사사기 13

시편 113:1.2, 38:10, 78:22,24,25,26, 찬송 16:1,3, 시편 11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범죄 후에 얼마나 자주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저는 벌레만도 못합니다. 구더기만도 못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주의 피로 씻어 주세요! 주의 의와 거룩으로 입혀주소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의에 대한 답을 알거나 뭐라고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계속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 거듭거듭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렇게 늘 반복적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그렇게 자기의 삶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양심에 큰 죄악감을 자주, 반복해서 느낄 때는 어떻습니까? 나 자신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같은 죄를 저지를 때 어떻습니까?

그럴 때도 거듭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끈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느 시점에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그동안 한 것으로 충분하다. 더는 용서하기에 지쳤다. 내가 네게 기회를 줬는데 너는 실패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용서는 없다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의 마음이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히고 회개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을 어느 시점에 멈춰야 합니까? 선을 행하다 낙심해야 합니까?

어느 순간에 내가 네게 할 만큼 했거든. 더 이상 네게 신경 쓰기 싫다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 선을 행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력과 의지와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할 만큼 했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 그분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그분은 그의 언약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그분은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솔직히 우리는 늘 죄를 범합니다. 종종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반복해서 주님을 노엽게 합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시 그분께 돌이킬 수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있을 수 있습니까?

 

오늘 사사기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죄악의 시궁창에 있을 때, 가장 낮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의 우상과 신들을 좇아갔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마음이 세상 사람과 타협적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섬기는 것을 포기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여전히 신실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말씀을 안 듣고 다루기 힘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한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갖지 못한 어느 부부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께서 다루기 힘든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주제로 말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소망 없는 자에게 희망을!

2. 죄악 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1. 소망 없는 자에게 희망을!

 

사사기는 언약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후에 몇 년 동안의 역사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축복하셔서 애굽에서 빼내셨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났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동안 모든 필요를 여호와께서 제공해 주셨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거절합니다.

 

사사기 2:10~12 “그 세대 사람들이 다 죽어서 그들의 열조에게로 묻혔고 그들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이런 배신은 사사기서에 거듭거듭 나타납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후렴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사기 13장은 이전 말씀들과 패턴이 다릅니다.

사사기 39, 16, 사사기 4, 사사기 6, 사사기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원수의 손에 내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 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회개합니다. 그러면 다시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13장에서는 회개가 없습니다.

13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셨고 그들이 4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원래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해안선을 따라서 정착한 해상 생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 전 아브라함 때도 이미 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삼손 사건이 있기 전 BC 1200~1100년 사이에 그 수가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아스돗 가자지구, 아슈켈론, 가트 그리고 에크론이라는 5 도시 주위에 정착해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남서쪽을 침략했습니다. 그곳은 단 지파,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사는 땅입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졌습니다. 골리앗 같은 거대하고 힘센 군인도 많고 이스라엘보다 뛰어난 장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청동을 사용했는데 블레셋은 철기로 만든 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기로 만든 창이 훨씬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런 블레셋이 40년이나 이스라엘을 군림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 106절에 서 보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므로점점 망해갔습니다.

물론 아직도 소수의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당에 올라가서 매년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엘리 제사장 시절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그 자녀들 교육을 잘못시켜서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악하게 행했습니다. 그 사악한 행실은 결국 사무엘상 4장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아벡이라는 곳에 진을 친 블레셋과 싸우러 나아갑니다.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인 사천 명이 죽습니다. 1차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요. 그때 장로들이 말합니다.

왜 여호와께서 오늘날 블레셋 앞에서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고?” 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지 라고 이 질문만 했지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상 43절에 보면 그분이 우리를 돕도록 하자”,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와서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2차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이번엔 삼만 군인이 죽습니다.

엘리, 홉스, 비느하스 등 제사장 가족이 다 죽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깁니다. 이렇게 되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고 그 마음은 더 악해졌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이 사사기서에 6번 정도 나옵니다.

그것이 삼손이 태어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혀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블레셋 국경에서 몇 Km 매우 가까운 조라라는 조그만 마을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여호와의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그 여인은 마노아의 부인입니다.

우리는 그 마노아나 그 아내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에 대해 상세하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마노아의 아내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으면 힘든 일이지만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는 훨씬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마노아와 그 아내는 부모 된 기쁨을 가질 수 없었고, 특히 구약에서 결혼한 부인에게 아이가 없다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표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장에서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면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불임이 없을 것이며”(7:1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아내는 불임이었습니다.

그녀는 여호와를 의지했지만, 당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불임은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가 말 안 듣는 하나님 백성에게 임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133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선포합니다.

보라 네가 원래 잉태하지 못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라고 말씀합니다.

갑자기 희망이 없는 가정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이스라엘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갖게 되고 그 아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마노아는 단 지파 사람입니다. 사사기 18장은 마노아가 속한 지파의 사람들이 어떻게 심각하게 여호와를 떠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고집 센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한 아들을 잉태하지 못한 부부에게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를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먼저 당신의 백성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녹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에야 사무엘상 7장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힌 불레셋의 압제가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개하기 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고집이 세고, 세상을 너무 사랑하고 무지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당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루기 힘든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 태어날 삼손은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불의한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구별됩니다. 나실인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에 철저하시고 신실하신 분임을 보게 됩니다.

 

나실인에 관한 법규는 민수기 6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평생 나실인이 아닙니다. 한동안만 나실인으로 삽니다.

나실인은 독주를 마실 수 없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 됩니다. 시체를 만져도 안 됩니다. 나실인은 세상과 구별되어 여호와의 존 전에 거룩하게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와인이나 독주를 못 마시게 항상 주의하도록 했고 깨끗지 않은 것은 만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삶에서 사악하고 경견치 않은 것에서 여호와께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주님의 길을 잃어버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만 이 은혜라는 것은 그분의 백성이 참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성별되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다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2. 죄인에게 은혜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말한 후에 그 아내가 남편에게 가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천사의 용모와 같아서 심히 두려워서 어디서부터 왔는지 묻지 못하였고 그도 내게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아니했다.”(13: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한 모든 것을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마노아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금 우리에게 보내사 그로 우리가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13:8)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오면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부인이 혼자 밭에 있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다시 나타납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급히 달려가서 보소서 전날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습니다”(13:10)라고 합니다.

마노아가 급히 아내를 따라 그 사람에게 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입니까?”(13:11)

그분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로라”(Who I am) 모세에게 가시 떨기 가운데서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마노아가 여호와의 천사를 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천사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마노아는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서 마노아에게 말하러 온 하나님 그분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노아는 그분을 단지 한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초청합니다.

12구 하옵나니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기를 대접하는 것은 당시 문화적으로 적절하고 합리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긴 여행을 해야 했고 먹을 곳을 찾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는 자신이 주님께 식사 초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는 마노아와 함께 머물러 먹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16절에서 네가 비록 나를 머물러 식사하라고 하나 내가 너희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네가 드리려거든 그것을 여호와께 드려야 할지라라고 답합니다.

 

17절에 마노아가 궁금해서 또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씀이 이를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중하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마노아는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천사가 뭐라 대답합니까?

내 이름은 기묘라”(18)

기묘는 네가 내 이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존재는 너무 초자연적이어서 인간에겐 위대하고 신기한 존재이므로 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압니다.

이사야 96절에 한 아기(대문자)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묘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합니다.

 

그러나 마노아는 그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1319절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 여호와께 드립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이적을 행하는데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의 불꽃 중앙에서 위로 올라갔다고 말씀합니다.(13:19,20)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알았더라

 

그러고 나서 마노아가 뭐라 합니까?

우리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뵈었음이라라고 아내에게 외칩니다.

갑자기 자신의 죄를 깨달은 거지요. 또한,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해서 깨달은 거지요.

그는 자신이 더러운 옷을 입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었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뵙고 살 수 있겠느냐, 그래서 반드시 죽을 거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애 우리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 만약 주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치신다면 누구라도 당장 남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를 죽이길 원하셨다면 그분이 우리 손에서 번제와 곡물 제물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이때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죽이기를 원하셨다면 왜 삼손의 탄생을 알려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말했겠느냐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 때문에 죄 많은 우리를 죽이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그래서 이 부부의 손에서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죄로 인한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한 국가로서 회개하기 전이었습니다. 주께 부르짖기 전이었습니다.

물론 회개는 필요합니다.

곧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할 때가 올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출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컴컴한 죄악 가운데 있는 그들을 불러서 구원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죄가 많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체념할 때가 있습니다.

마노아처럼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라고 마음속으로 외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수욕과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희생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삼손의 탄생은 그가 나실인으로서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의무를 상기시키는 바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이키라는 부름이었습니다.

결국, 사무엘상 7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우리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도다라고 회개합니다.

사무엘 선지자 때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토에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정복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고집 세고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았는데도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한 백성을 가지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셨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이제 이 백성에게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 안 듣는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제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 은혜와 자비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성도는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항상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참으로 회개하고 말씀에 주목하며 순종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이차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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