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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주차 <구원론 강설> 부드러운 마음의 은혜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3. 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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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주차 <구원론 강설> 부드러운 마음의 은혜 2020. 8. 23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들은 말을 의논하건대(26),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2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28)”(대하 34:26~2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게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선지자를 통한 말씀

 

오늘 역대하의 말씀은 여선지자 훌다가 선한 왕 요시야에게 보낸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이 본문 앞의 세 구절은 백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고 이 본문은 왕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질서를 중하게 여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왕과 백성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적인 전달 방식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선 그 누구도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거나 음성을 듣거나 영광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권능으로 옷을 입힌 대리인을 통해 말씀하시고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마치 5만 볼트 전류를 가정에 공급하기 위해 중간에 변압기를 설치하듯이 선지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무엇보다 마음이 정직한 백성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십니다.

 

2. 요시야 왕

 

성경에 보면 요시야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요 여호와 보시기에 바르게 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정직하고도 바르게 대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자기와 자기 백성에게 선포된 두려운 심판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어 선지자인 훌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요시야에게 훌다와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들이 있어 그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들의 소원에 맞는 교사들을 주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 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거짓된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교사들이 주어져 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다. 악한 왕 아합에게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가 있어 아합을 거짓된 길로 인도합니다. 나아가 악한 사람은 좋은 하나님의 메신저를 만나도 그를 오히려 핍박합니다. 헤롯 대왕은 세례요한의 충고를 거부하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써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이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거짓되면 하나님은 다른 교사들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뜻대로 가르치지 않고 우리의 뜻에 영합합니다. 우리의 정욕을 부추기고 우리가 멸망의 길에 들어서도록 유도합니다. 이단에 속한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치 혀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사람을 마수의 길로 유혹합니다. 청교도 리차드 십스는 “이런 자들은 지옥에 갈 때에도 그럴싸한 복장을 차려 입고 간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자들은 교만합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교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는 너무 단순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기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새롭게 말씀을 추가하여 조작합니다. 그들은 더 많은 제사, 더 많은 의식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거들먹거리고 통치자로 군림합니다. 그들의 자세는 건방지고 그들의 마음은 완고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자신은 무오한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요시야의 반응을 찬찬히 보면서 성화의 은혜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첫째,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적인 귀머거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슴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에겐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마음이 연약하였다’(라크 레바브카 와틱카나)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특성을 가리킵니다.

 

1) 연약한 마음은 늘 민감합니다.

~ 여기서 민감하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감각을 가리킵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이 있고 생명을 보존하려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모든 생명체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민감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시고자 인간 안에 두려움과 사랑 같은 감정을 심어두셨습니다. 두려움 덕분에 인간은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절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약 두려움이 없는 인간이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 한편으로 인간은 사랑에 민감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자를 분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인간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을 일러 ‘괴물’이라 불렀습니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물리학자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창조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수없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얻은 사체들을 조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든 새 인간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습니다. 그가 만든 새 인간은 한 마디로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거대한 체구에 큰 머리, 짱구같이 툭 튀어나온 이마에 스테이풀러로 찍어 붙인듯한 흉터와 양쪽 관자놀이엔 나사못이 박혀 있는 끔찍하게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괴물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언지하에 괴물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괴물이 자신을 자꾸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며 그를 버리고 멀리 떠나버립니다. 그러자 괴물은 자기를 버린 비정한 아버지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한 가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인간의 언어와 관습들을 익히고 사유의 능력마저 갖춘 다음 드디어 마을로 숨어들어 프랑켄슈타인의 동생과 아내를 살해하고 북극으로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지 못하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 뿐 아니라 몸까지 아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촉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합니다. 이것이 오래도록 방치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의식 속에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2) 연약한 마음은 부드럽고 여린 마음으로 하나님 자녀의 초자연적 성품의 하나입니다.

~ 본래 우리 마음은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일에는 매우 완고하게 저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성도들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육신적으로 접촉하고 느끼고 판단하기 일쑤입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일, 보통 살아가는 일들에는 너그럽고 성인군자같이 굴다가도 영적인 일, 초자연적인 일들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고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인간의 마음처럼 딱딱한 것은 없습니다. 차라리 짐승들이 말을 더 잘 듣습니다. 돌은 망치로 깨부술 수는 있지만 어떤 형체로 빚지는 못하듯이 인간의 마음도 깨부술 수는 있어도 빚는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 성경에서 마음이 완고한 자로 바로보다 더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에게 불순종한 대가로 무려 열 가지 재앙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정도 혼이 났으면 바로가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오히려 재앙을 겪고 난 뒤에 열 배나 더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 우리는 진노 아래 태어나 영혼이 죽었던 자들입니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태어난 저주의 상속자였습니다. 지옥의 벌린 입은 언제나 이런 추악하고 더럽고 부패한 죄인들을 먹잇감으로 삼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스런 사람을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돌 같이 굳어 딱딱한 마음을 유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불 같은 말씀으로 바위를 부스러 뜨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에도 그가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거하는 자요 거듭나지 못한 자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뜨거운 태양열에 얼음이 삽시간에 녹듯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렇게 깐깐하고 까탈스러웠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유순해 집니다.

~ 무엇보다 연약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다이아몬드는 불로도 녹일 수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 녹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난 이후, 내일, 모레, 내 년에 계속 점진적으로 거룩해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가 연약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네 가지 방편을 소개합니다.

① 제일 먼저 성령께 의존해야 합니다.

~ 성령님은 우리가 빌 바를 모른 것 까지 다 아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간구를 드리시는 우리의 도우미십니다. 성령님께 나의 마음이 곤고해지거나 완악해지거나 딲딲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도움을 요청하시길 바랍니다.

② 성경을 읽고 쓰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윌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일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③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 가담하거나 죄악된 일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 사람은 죄를 지으면 양심이 발동하여 마음이 아프고 아픈 마음을 오래두면 다시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죄,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큰 죄는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④ 되도록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 교만한 자들과 어울리면 자기도 교만해집니다. 세속적인 일, 육신의 정욕을 위해 쾌락과 방탕함에 취하면 헤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33살에 회심하기 전까지 이미 17살에 가출을 했고 19살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을 정도록 방탕했습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생애를 돌아볼 때마다 이런 아들의 회심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를 떠올립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치고 훌륭한 자식은 없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이 교만했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은 교만의 자리에 앉은 인간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천하를 내려자 보며 호령하고 지배하고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인간을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지 낮아지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인간에게 겸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겸손을 들려야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겸손은 주권자이시고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듯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지하면 벼가 역지 못하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교만을 부리는 자가 됩니다.

~ 요시야의 겸손은 곳간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깨달았기에 가능한 인격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격이야 말로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로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겸손을 요청하고 동시에 겸손하기 위해 부지런히 하나님에 관한 신적 지식을 갖추기를 열망하고 분골쇄신의 노력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옷을 찢었습니다.

 

1) 옷에는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① 먼저 알몸을 가립니다. 죄인은 자신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을 회피합니다. 알몸은 자신의 치부로 여깁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옷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옷을 찢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결연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② 다음으로 옷은 바깥 세상에서 악천후의 피해를 막아 줍니다. 더운 날은 더위를 피하는 가벼운 옷이면 되고 추운 날에는 몸을 보호하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면 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 입는 복장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③ 다음으로 옷은 장식품입니다. 육신은 원래 천한 것이라 천함을 가리는 육체적 장식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복이 발달된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백화점에는 온갖 옷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저에게도 새옷을 입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 갑자기 안에서 왜 옷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단지 알몸을 가리면 되는 것인데 왜 패션을 찾고 유행 따라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것이 옷에 대한 탐심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앞으로는 지나치게 장식을 위한 옷을 자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절제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④ 끝으로 옷은 성별과 신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집니다. 옷 차림을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거지가 신사복을 입고 부자는 헐렁한 청바지를 입는다 합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남자아이 같이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애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그러니 옷으로 남녀를 가린다는 것도 옛말인 듯 싶습니다.

 

2) 옷을 찢었다는 것은 마음을 찢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 비탄에 잠긴 요시야는 ”내가 왜 이런 옷에 갇혀 나의 본 모습을 하나님 앞에 숨겨야 하는가?“하고 생각하며 옷을 찢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백성들에 대해 진노하고 계신데 왕이란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자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알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진실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유대인들은 자신의 결백과 진실함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간혹 옷을 자주 찢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관습이 없으므로 우리는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욜 2:13)고 요청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슬픔이 아니라 가장된 외적인 슬픔의 표시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안과 밖이 잘 아울러져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한 쪽 팔이 다른 쪽 팔보다 길지 않을 때입니다. 모든 신체부위가 이런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외적 표현만 있고 내적인 참회가 동반되지 않은 것은 위선입니다. 어느 시인은 마음에도 없이 고개를 숙이는 갈대를 보고 겸손의 시늉만 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만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다섯째, 통곡을 했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고 마음이 부드럽고 유순하며 겸손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슬퍼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곤란에 대해 함께 통곡합니다.

~ 모세는 자기 동포가 이집트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어느날 한 애굽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괴롭히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애굽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자신의 조국의 상황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방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을 것입니다.

~ 유대인 출신의 총독인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고국의 동포들을 보니 모두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앉아서 울기를 며칠동안 계속했습니다.

~ 오늘 요시야 왕도 이들처럼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므로 체면을 차리며 울지 않았습니다. 우는 일에 지위고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울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축복

 

이제 마음이 가난하고 연약하여 통곡한 요시야 왕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하십니까? 28절을 보면 선한 왕 요시야에게 주시는 상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첫째, 너희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갈 것이라 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어둠에서 시작하여 빛 가운데 생을 마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빛 가운데서 시작하지만 어둠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성경에는 이 두 인생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롯과 소돔인들을 보세요. 노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를 보세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에게 반역한 고라 일당의 차이를 보세요. 롯과 소돔인들의 차이는? 롯은 구원을 받았지만 소돔인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땅 밑으로 꺼져버렸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죽음을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조상들에게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낯선 땅을 지나는 순례자처럼 우리는 이 척박한 곳에서 고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돌아간 바로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조상들의 영혼에게로 가고 그의 몸은 조상들과 함께 무덤에 눕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 거두심은 그만큼 우리를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가치한 것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추수 때에 쭉정이는 불에 태워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알곡만 창고에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의 피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사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앞으로 나라와 백성에게 닥칠 재앙을 보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 사실상 요시야는 편안한 가운데 죽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의 군대를 막고자 출전했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적들의 손에 피를 흘리며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서 평안히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죽음이 즐비합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사는 분들의 고통을 아십니까? 밤마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돌연사가 질질 끄는 죽음보다 낫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이 여러번 죽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죽어 장례를 치루고 집에 돌아왔는데 밤에 멀쩡히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 합니다. 그리고 1년 뒤에 다시 죽었는데 이번에 아들이 어머니를 향해 이번에도 다시 살아나올까요 하고 묻자 할머니가 하시는 말이 이번엔 관을 거꾸로 묻어 나올 수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 요시야는 한 번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이 죽음으로 실로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왜냐구요? 요시야가 죽은 후에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는 망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포로로 끌려가 죽임 당하거나 눈알이 뽑혀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고 대신 우상들이 들어섰습니다. 만일 그가 살아서 이 모든 재앙들을 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죽음보다 더 큰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 현편으로 요시야의 죽음은 그를 평안히 천국으로 데려가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실천임과 동시에 역대하 35:21~22에서 보듯이 그가 이집트 왕 느고와 싸우러 가지 말아야 함에도 의분으로 전쟁을 벌인 과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자비와 고난이 동시에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죽음을 통해 요시야의 어리석음을 징계하심과 동시에 그에게 겸손의 상을 베푸셨습니다.

 

4. 결어

 

1) 날마다 성화되고 있습니다.

~ 성화의 은총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과정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성화되고 있습니다. 다만 각자 그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난님으로부터 생성되는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끝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에겐 끝이 없습니다. 목적지는 있지만 그것마저 우리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성화의 목표를 향해 날마나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얼른 달려 가야 합니다. 나의 마감이 빠르든 느리든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의 신비입니다.

 

3) 하나님을 닮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오늘 요시야는 한창 젊은 나이인 서른 아홉살의 나이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선 너무 빨리 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몇 살이냐고 묻지 말고 얼마나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축복임을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닮는 한 주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34주차 <구원론 강설> 부드러운 마음의 은혜 2020. 8. 23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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