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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관해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8. 1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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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er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부활을 신자들이 축제하는 특별한 날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계란을 낳은 토끼가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냐?”라는 질문도 없이 부활절 토끼를 생물적 괴짜의 형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축제가 기독교 축제들 가장 거룩한 것이라 여길 수 있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기독교가 지키는 날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수한 것입니다. 제 말은 성경 어디서든 찾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31년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유월절을 준수했습니다. 어디서도 부활절이 교회에서 지켜졌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활절’(Easter)이란 단어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지 않고 튜턴족(Teutonic, 게르만족) 다산 여신 ‘에스테레’(Ester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녀에 대한 축제는 4월에 있었고 그 달에 여신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희생제들을 요구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 가보면, 부활절은 고대 여신 ‘이쉬타르’(Ishtar)로 돌아갔으며 메리를 신성화하려는 서방종교, 즉 로마 카톨릭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역사가 Hyginus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크기의 계란은 하늘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떨어졌습니다. 비둘기들이 둑에서 뛰어 놀던 그곳에서 고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그 알이 부화되어 베누스(Venus)가 나왔습니다. 그런 후 그녀는 시리아 여신, 즉 아스타르테(Astarte)라 부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계란들은 이집트 신전들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드루이드(Druid)라는 이름으로 봄철에 의식들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절 토끼(Easter Bunny)는 역시 에스테레 또는 아스타르테의 튜턴의 이교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교도들은 다산성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로 산토끼를 찾는 축제를 행했습니다. 이 축제의 동안 계란들은 새롭고 풍부한 봄의 상징으로서의 산토끼에서 나왔다고 믿어집니다.

튜턴족의 다산 여신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신만이 알고 있는게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부활절을 축제해야 합니까? 부활절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현대 기독교에 초기 발전들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유대파 개종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최초 제자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회당들에 복음적 메시지를 가끔 들었습니다(사도행전 9:20~21). 복음이 어떻게 이방세계에 이르게 된 이야기는 극적인데 사도행전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문들은 먼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개방되었을 때 초대교회는 기독교를 구약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준수되었던 구약성경의 거룩한 날들과 특별한 시기들은 기독교의 새로운 신앙에 중요했고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월절 준수와 더불어 지속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방인 개종자들 가운데 부활절 전통은 발전했습니다.

135년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격렬한 유대인들이 제거되다보니 로마제국은 유대파 신앙에 대한 적대적인 법률들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적 폭동, 즉 Barkokeba revolt(132~135)에 대한 보복으로 예루살렘은 거의 전멸되었고 개명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전멸하라는 하드리아누스 칙령들은 거룩한 날들을 준수하는 것과 같은 유대주의 관습들을 추방했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근절하려 했습니다. 유대 국가를 파괴하려는 시도로 인해 초대교회의 성직자들은 10명 중 1명을 뽑아 죽였습니다. 그때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사회로부터 유대인들을 추방시켰기 때문에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회중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신비주의에 뿌리박힌 종교적 문화를 배경 삼고 있었고 구약성경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차이점을 보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적 지식을 알지 못하는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오해했던 율법과 선지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세기 교회 지도자 오리겐(Origen)은 율법이 복음 메시지를 이해하는 면에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만큼 그리스 철학이 이방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경을 버리고 기하학을 연구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2세기부터 다양한 ‘기독교’ 종파들은 이교적 관습들을 기독교 관습들에 유입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교회 지도자들은 옛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기독교를 가르쳤습니다. 135년 부활주일(Easter Sunday) 준수는 이방세계에서 종교적 중요한 날로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은 로마제국의 종교적 사회에서 ‘존경할만한 태양의 날’(Venerabili die Solis-태양의 신성한 날)로 준수되었습니다. 이것은 잠정적 이교 개종자들에게 발전된 허위 기독교로 변화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연적 전파의 뿌리로서 바로 그리스 전통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미묘한 바람은 인준된 기독교 휴일로서 부활절의 공식적 설립에 대해 명백한 반셈족주의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니케아 범종교회의에서 부활절을 준수할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부활절을 설립한 이유는 기독교를 유대적 영향으로부터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증오하도록 했습니다.

 

니산월 14일을 지지한다고 붙여진 ‘14일의 사람들’(Quatrodecimen)은 이교 부활절을 선택하는 것에 거부하고 유월절을 기독교 예배일로 주장했습니다. 초대교회 존경받는 교부이며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은 로마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와 유월절을 지켜야한다는 성경적이고 사도적 전통을 변호했습니다. 그의 제자인 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폴리캅이 아니케투스 시기에 로마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벼운 논쟁이 다른 관점들을 나타내면서 그들 간에 있었지만 손을 붙잡고 화해했습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아니케투스가 폴리캅을 자신의 방법대로 준수하라고 설득시키려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폴리캅은 우리 주님의 제자인 요한과 사도들이 준수한 대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결국 폴리캅은 아니케투스를 자신의 방법으로 지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앞서 있었던 장로들이 지켰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 그들은 서로 화해했습니다. 아니케투스는 성체 축제를 교회에 지킬 때 폴리캅에게 존경을 표현하면서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습니다. 모든 교회와 평화를 약속했습니다[Irenaeus, 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s of Irenaeus의 3장].

 

폴리캅 후에 Polycrates라 불리는 소아시아의 지도자는 유월절을 웅변적으로 변호했습니다. 194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감독 Polycrates는 로마의 빅토르 권위를 거부하고 아시아에서 행해진 전통을 준수했습니다.

 

유월절 축제 시작으로서 그달의 14일을 복음서에 따르고 신앙의 규율을 곡해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지켰습니다. 무엇보다도 나 폴리크라테스는 가장 작은 자로서 나의 가문의 전통에 따라 행하고자 합니다. 그들 중 7명은 감독들이었고 나는 8번째 감독입니다. 나의 가문은 항상 사람들이 무교병을 멀리 치울 때에라도 지켰습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래서 나는 주님을 경배했던 65년 동안 기독교인들과 평화를 나누면서 성경말씀을 가르쳤는데 어떤 위협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복종해야 합니다.

 

폴리크라테스 이후 부활절 지지자들은 성경적 전통에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을 억눌렀습니다. 개종을 거부했던 자들은 이단자들로 정죄 받았고 핍박을 피하기 위해 도망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14일의 사람들’이라 부르는데 31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교회 전통을 지켰던 자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시민체제의 보호 아래 일어난 교회는 다른 날들과 다른 신학을 고수하였습니다.

 

부활절의 역사는 고대 이교적 관습, 정치적 타협, 그리고 인종주의로 빠져있었습니다. 일어난 것에 무관하게 축제는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혀있었습니다. 그러면 부활절을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글을 쓰면서 유월절을 바로 지키라고 권했습니다(고린도전서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또 다시 데살로니가후서 3: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도바울은 권합니다. 그리스도부터 우리에게 전해준 가르침에 신실하라고 말입니다. 유월절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식들의 깊은 의미를 새기면서 지키라고 권했습니다. 유월절 준수에서 부활절 준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며 유월절 전통은 부활절 준수와 다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21~23에서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구별짓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로마교황 레오 1세는 부활절을 가장 큰 축제일로 여겼고 성탄절을 부활절을 준비하는 날로 여겼습니다. 부활절은 정한 일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셈족 달력에 따라 니산월 14일이 율리아누스 달력(Julian calendar)에 따라 바뀐 것이기 때문이죠. 참된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는 유대인이 유월절을 축제하실 때 은유적인 양을 희생으로 드려진 그 날에 죽으셨기 때문에 동방에서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유대적 일자를 따랐습니다.

매주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게 되었고 니산월 14일 이후 주일은 부활의 역사적인 날이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부활절에 여종들을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고 월요일은 남종들을 때렸습니다. 부활절 계란을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또 부활절 토끼는 정원에서 계란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토끼는 이교를 상징하고 다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부활절 불은 산꼭대기에 붙여져서 새로운 불을 피웠습니다. 그 이유는 겨울을 이기는 봄의 기운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는 부활주일을 거절했습니다.

 

라은성교수의 교회사 아카데미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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