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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는 말씀이 이뤄진 현장을 살피는 것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2. 9. 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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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함께 오다

해마다 연중행사로 시드니 호프신학대를 방문하는 학자가 있다. 그가 올 때는 혼자가 아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꽤 유명한 사람과 동행하여 온다. 그 유명한 사람은 여럿일 때도 있고, 혼자일 때도 있다.

그와 함께 온 ‘그 유명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존 인물이 아니다. 짧게는 1백년 전부터 2천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렇게 동행해온 그들을 주루룩 줄을 세워 살려놓는다. 그들이 살아나 육성을 들려주고, 그동안의 아픔과 애환,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살아생전 겪었던 신앙을 들려준다.

 

 



지난 9월 26일 오전, 예년과 달리 그는 한 사람을 시커먼 관속에 안치하여 나타났다. ‘그 한 사람’을 부활(?)시켜 주연으로 활동하는 사이 잠깐잠깐 엑스트라로 몇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여기 ‘그 한 사람’은 종교개혁자 칼빈이고, ‘시커먼 관’은 830여 쪽이나 되는   <기독교 강요>를 해석한 시커먼 장정이 그의 저서이다.

그가 바로 몇 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에서 새롬교회 담임목사로 말을 갈아탄 교회사 학자 라은성 목사이다. 공항에서 내려 잠시 쉴 틈도 없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고’ 바로 40시간 ‘강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기독교 강요>(이하 ‘강요’)는 원래 ‘구원의 교리에 꼭 알아야 할 것과 경건의 총체 또는 경건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기독교의 요람’이라는 상당히 긴 제목처럼, 기독교 전체를 가장 잘 표현한 책으로, 구원의 교리와 경건의 총체를 담고 있는 기독교 요람입니다. 기독교의 총체적 진리를 이해하는 길은 조각적 진리를 하나씩 맞추어갈 때 가능합니다. 총체적 진리는 우리가 배우는 ‘강요’를 통해 가능합니다. 오늘도 그 조각적인 퍼즐 진리를 맞추어 수정처럼 분명한 그분의 뜻을 알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강요 예찬’을 좀더 들어보자.

 “‘강요’는 칼빈이 23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처음엔 16장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후 그가 55세에 돌아가기 전, 50세까지 즉, 30-40-50대에 걸쳐 4번이나 개정을 했습니다. 정말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강요를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칼빈이 다른 신학자들과 차이점은 그가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초판은 목회를 하기 전에 적었지만 목회하면서 개정에 재개정이 이루어진 책으로 그만큼 실천적인 책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주석가이기에 굉장히 성경적입니다.

 ‘강요’ 원본에는 많은 성경구절이 인용되었기에 ‘강요’는 주석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칼빈은 역사가이기에, 교회사 사건들을 다루고, 비판하고, 인용하고, 보완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조직신학자로서 칼빈은 ‘강요’에서 신론에서 종말론까지 모든 교의를 다 다룹니다. 그래서 ‘강요’의 묘미는 23년이라는 세월, 가장 필요한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실천신학이 다 들어있다는 것과,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경건’이란 말로 함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490년 전, 칼빈은 이렇게 살아났고, 그가 만든 시커먼 관 속의 ‘강요’는 40시간 동안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고, 마치 대형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쉬지 않고 매섭게 풀어헤쳐졌다.

 
동굴 속에 비친 서광

그는 소위 ‘늦깎이 신학자’였다. 이국땅에서 쉐퍼와 칼빈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들어섰다.

 


“고신대 학부를 거쳐 총신 신대원에서 공부했습니다. 부산에서 공부할 때는 서울이란 넓은 곳에서 마음껏 공부하며 도전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늘 서울을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서, 아니 총신에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목사 안수 받고 늦게 떠났습니다. 유학을 가려는 목적은 학위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학자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지요. 그냥 7~8년 정도 바깥에 나가서 제 의식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외국을 통하여 기독교 문화란 뭔가, 다른 세계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사는가 이런 게 보고 싶어 91년, 영국으로 갔습니다. 언어를 배우며, 영국의 신앙과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이후 94년 1월,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샘 루이스를 거쳐 커버넌트 신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프랜시스 쉐퍼 연구소를 발견했다.

 “제가 지적 신앙의 갈등이 있을 때, 저를 채워주었던 것은 프랜시스 쉐퍼 전집이었습니다. 지성인에 대한 답변이 분명한 책이었지요. 물론 커버넌트는 보수 신학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쉐퍼 연구소가 있었기에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 뜻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간 미국이었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 문제는 돈이었다. 10년이란 긴 세월이 말해주듯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삶을 지탱한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을 조금 넘어설 정도였다. 항상 대기 상태였다. 값싼 렌트를 찾아 이사할 준비는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늘 텐트에서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았다. 좀 좋게 말하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떠나는 순례자의 삶과도 같았다.

 “그냥 장학금도 없었지요. 저를 위해 도와준 분들은 있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한 달에 60만 원은 집세, 생활비도 안되는 액수였지요. 그래도 그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요.”

누구나 겪는 언어의 한계, 재정문제 등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실력도 달리자 캄캄한 동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때 그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바로 ‘강요’였다.

 “<기독교 강요>를 일 년 동안 배웠습니다. ‘강요’를 배우면서 목회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설교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말입니다. 이것을 배우면서 기독교에 대한 전체 아웃라인과 개요를 알고 나니 ‘아, 설교는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9만 불에 산 교회당

이렇게 목회에 자신이 생길 즈음, 전혀 뜻밖에 이민 목회의 길이 열렸다. 신학생 시절 인디애나 에반스빌에서 토요일마다 200마일(360킬로) 길을 오가야 하는 길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 교회를 맡게 되었다.

 “매주 일 년 반 동안 다녀왔습니다. 이를 통해 목회에 대한 꿈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95년도 졸업하면서 인디애나에서 바로 목회를 시작하여 98년도 1월까지 했습니다. 교회 건축도 했고, 하나님의 기적들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건축하자’ 할 때는 교인들이 말을 안듣습니다. 그동안 목사만 오면 건축하자고 했다고 해요. 그 당시 교인들이 12명 모일 때였는데, 놀랍게도 건축헌금으로 모여진 9만 불이란 종자돈이 있었습니다. 교인수로 보면 엄두도 못낼 정도였지요. 그래서 제가 ‘첫째 건축헌금 하자는 말 안하겠소. 둘째 은행에 융자 받지 않겠소. 그래도 반대하면  손드시오’하니 아무도 안들더라구요.

마침 2에이커 규모의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어요. 15만 불에 나왔습니다. 그분들이 통장과 도장 들고 찾아가서, ‘이것밖에 없소’하니 황당해 하더라구요. 당연하지요. 그런데 한 달 후에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9만 불에 그 건물을 샀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자극을 받는 거예요. 자원하여 건축헌금 하더니 25,000불이 들어왔습니다. 필요한 교회 비품을 다 샀습니다. 그렇게 봉헌 겸 건축 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목회에도 성취감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습니다. 목적이 있어서 다시 공부하자는 마음이 불타올랐습니다. 커버넌트에서 성경신학을 공부했지만, 목회하면서 ‘목회에 도움이 되는 공부가 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실’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사실’이 교회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말입니다.

교회사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2천 년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이 말씀이 어떻게 삶 속에 해석되었고, 적용되었고, 이루어졌는지를 살피는 것이 교회사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의 변화를 맞이한 위대한 분들입니다. 이밖에도 허다하고, 구름 같은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교회사는 연대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반영시켜 나갔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과 역사를 이끄셨는지를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정말 교회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공부하기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목회는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공부는 세월이 지나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교회를 사임했다. 주변에서는 앞으로 한국으로 나갈 예정이라면 트리니티로 가고, 미국에 있을 예정이라면 밥존스로 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교회를 사임하고, 한국 갈 예정으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를 선택하고, 석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혹 한국에 가게 하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본래 한국 갔어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 한국 가겠다는 약속을 했거던요. 박사과정으로 갈 것인가로도 갈등했습니다. 시카고에서 존 우드비리지 박사를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교회사 장학금 받고 석사과정을 일 년 반 만에 논문 쓰고 마쳤다. 일 년 반에 졸업하기는 ‘기이하다’ 할 정도로 희귀한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박사학위로 올라가려니, 다시 7년을 공부해야 했다. 석사학위 둘이나 있는 그는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기가 있는 남아공 프레토리아로 갔다.

 “99년도에 가서 굉장히 빨리 논문을 썼습니다. 졸업한 게 2001년도였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 신학교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친구 교수가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양대학교 신학과에 부임했습니다”

교회사 교수가 그렇게 많지 않을 때라, 아세아연합신학대, 총신대 등 여러 학교로 출강하면서 한 주에 30시간까지 강의할 정도였다. 강의에 한참 탄력이 붙어갈 때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가 그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적을 옮겨서 2003년부터 2009년까지 6년 동안 교수 생활을 했다. 그의 강의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났다. 시드니 호프신학대에서도 2008년부터 해마다 교회사, 종교개혁, 청교도, 이단과 정통 등의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인생을 바꾼 다빈치 코드

2005년도는 그에게 각별한 해였다. 그가 한국 교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하여 바쁘게 ‘불려다니는’ 명강사가 되었다. 바로 그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휩쓸었던 ‘다빈치 코드’였다. 프랑스 칸느 영화제에서 개막극으로 상영되고, 세계적으로 동시에 상영될 소설 ‘다빈치 코드’의 영화를 앞두고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민감한 운동을 전개할 때였다. 어떤 이들은 문학으로서 영화를 보는 것이 ‘괜찮다!’ ‘안된다!’ 또는 ‘관심 없다!’ 등등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소설에 이어 영화로 일반인들에게 개봉될 때 오는 파장에 대해 우려, 무관심, 또는 환영의 목소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 시점에서 ‘다빈치코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제가 여인들의 발자취, 초대교회 여인들의 이야기, 교회사 여성들의 이야기를 최초의 여성, 마리아부터 쓸 때, 마리아만 치면 다빈치 코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빈치 코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11세기 유럽의 중세문학에서 늘 호기심 있게 등장하는 주제는 영국 왕 아더와 연관된 ‘성배’ 이야기입니다.

성배에 관한 호기심, 기독교적인 적대 감정을 부추기는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 함마디’에 몇 단어나 몇 줄에 등장하는 예수가 결혼했을 것 같을지도 모른다는 표현들, 그리고 중세시대에 있어 온 여러 불미스러운 교회들의 사건들을 결합하여 만든 소설, 이것이 다빈치 코드입니다. 소설이라는 미명 아래 역사를 왜곡시키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됩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를 왜곡시켰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앞에 놓여있는 ‘유리 피라미드’의 마름모꼴 유리조각이 모두 666개라고 하지만 실제는 673개입니다.

 

 



둘째, 런던 킹스 칼리지 ‘조직신학연구소’에는 세계에서 ‘성배’에 관해 가장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즉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연구소가 있다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그런 연구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직신학에 대해 몇몇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두뇌 집단이 있을 뿐이다.

셋째, ‘시온’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시온산’이라는 말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제네바 근교에 있는 몽트 시온(Mont-Sion)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또 소설 ‘다빈치 코드’ 서두에서 ‘사실’이라는 제목으로 밝히듯이 시온수도회가 실제로 1099년에 존재했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온 수도회는 역사 속에 나오는 단체, 즉 1099년에 세워진 단체가 아니라 단지 20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설립된 사회단체입니다. 설립 목적은 저소득층이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권리와 자유권을 변호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다가 1957년에 그 단체는 문을 닫았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 나타난 거짓말들의 물적 증거로서 ‘비밀 문서’는 1960년대에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비밀문서들’을 등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7년에 출간된 ‘성전 폭로’는‘비밀 문서들’이 낡은 양피지 문서가 아니라 타자기로 쳤거나 싸구려로 조판해 찍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발견했다는 플랑타르가 거짓 문서를 파리 국립 도서관에 등록했고, 조작된 시온의 수도회 족보를 위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다빈치 코드’에 대한 허구성과 실체를 파헤치자 ‘사실’에 목말라 있던 한국 교계는 자연스레 그를 ‘다빈치 코드 저격수’로 최대한 ‘활용’했다.

 “‘다빈치 코드’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 당시엔 정말 분주하게 다녔습니다. 물집이 생길 정도로 매스컴과 온갖 TV, 신문 등 검색어 1위로 올라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2006년부터 교회사 대중화를 시도했습니다. 교회사만 가르치는 중·고등부 여름, 겨울 수련회를 비롯하여, 주말에 교회사 더 배우려는 젊은이를 위하여 교회사학교라 하여 교회사를 무료로 가르치는 주말 수련회도 열었다.

 
목회에 타는 목마름으로

2009년부터 목회에 대하여 마음이 불타올랐다. 가정교회를 하고, 전국 각지에 제자들이 목회하면 가서 설교해 주는 정도로는 소위 ‘양’이 차지 않았다. 2010년 전임교수를 그만 두었다. 순전히 목회에 전념하고 싶었다. 그가 목회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할 때, 나이도 50이 넘었으니 큰 교회로 가라는 권유도 많았다. 또 청빙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에게 또 하나의 갈등이 있었다.

 “가정교회를 할 때 정말 순수한 교인 9명이 있었습니다. ‘이 9명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갈 것인가? 그들을 데리고 큰 교회로 흡입할 것인가?’의 갈등이었습니다. 결론은 목회다운 목회를 하자! 그러려면 개척하는 것이 순전한 것이다 하여 숭고한 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 3월 20일, 성도들이 돈을 다 털어 본당을 사서 교회를 개척했다. 철저히 개혁신앙에 입각한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평신도 대상으로 교회사를 보급하기로 하고 무료강좌를 시작했다. 교회사 무료강좌를 시작하니 국민일보, 기독교 방송, CTS 등 매스컴에서 알고 새로운 길이 열렸다. 교회사 전문출판사도 설립하여 교회사 교과서,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알아야 할 내용들을 알기 쉽게 쓴 책과 만화도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내적으로 바른 교회와 바른 신앙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교회사를 공부를 통해 정립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확신, 개혁신앙은 청교도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은 결과를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정말 바르게 살자는 것이지요. 숫자와 결과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느냐가 초점이고,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우리 교회는 공부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 칠판을 만들어놨습니다. 아예 강의를 하려고 작정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린 다음 그대로 남아서 교리문답을 합니다. 6개월 공부하고 신자가 됩니다. 그게 싫어 지쳐 나가는 사람이 있지요. 모든 교역자를 비롯하여 사모, 장로, 집사도 공부하고, 정식 신자가 됩니다. 정식 신자는 공동의회가 됩니다. 등록교인은 성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교도의 목회, 칼빈의 목회, 화란 남아공의 개혁교회들이 오후에는 교리공부하고, 낮에는 예배를 드립니다. 공부 배우러 와서 정말 개혁교회를 하겠다는 선배나 후배가 많이 있습니다. 개혁교회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개혁교회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개혁교회의 전도, 기도, 예배는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청교도 신앙으로 역사적 증거를 갖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유수의 신학교 교수에서 20명 남짓의 개척교회 목사로 한없이 낮은 곳으로 찾아간 그는 쉽게 갈 수 있는 지름길만 찾아가려는 우리 시대의 풍조를 역류하며 새로운 사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사는 말씀이 이뤄진 현장을 살피는 것: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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