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사 66:1-4 / 하나님이 돌보는 사람

박석중목사(대전)

by 김경호 진실 2025. 1. 13. 08:42

본문

비가 흡족하게 내리는 땅과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사막 땅은 크게 다릅니다. 햇빛을 충분하게 받는 식물과 햇빛을 전혀 받지 못한 식물은 많이 다릅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 아이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1.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

1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사야가 전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인 것을 밝힙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계시고 온 우주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만물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성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성전을 지으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성전 자체를 싫어하십니까? 아닙니다. 처음 성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세 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고 솔로몬 때는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제사하는 제사 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는 성전 건축을 독촉하시며 성전 건축을 힘쓰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생활이 너무나 형식적이고, 제사가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이렇게 할 바에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양을 잡아 제사하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개”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애완견이나 반려견을 생각하면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짐승, 더럽고 추한 동물, 그래서 욕하고 저주할 대상을 “개”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다”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돼지도 부정한 짐승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기르지도 않았고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돼지 피를 바치면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3)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하는 것과 같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향을 피우고 제사하는 것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싫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형식적으로 잘못된 제사를 드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마음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이 싫어하셨습니다. 이런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것은 2절 중간에 나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돌봐주고 싶은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 복의 내용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기에 사람이 짓는 집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가정과 자녀들과 나라를 돌보신다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돌보는 사람

첫째,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곧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부한 마음보다 가난한 마음을 좋아하시고 높은 마음보다 낮은 마음을 좋아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도움이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 말한다면 그것은 부요한 마음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마음까지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6:24-25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가난한 마음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높아져서 교만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은 겸손하여 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시지만 낮고 겸손한 자에게 함께 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또 마음의 가난이란 철저하게 비어있는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 지식, 자기를 위하는 욕심을 다 버리고 빈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잘 받고 순종을 잘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마음이 낮고 겸손합니까? 마음이 비어있습니까? 아니면 내 주장, 내 지식, 내 욕심, 내 고집으로 꽉 차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하셨습니다.

 

둘째. “심령에 통회하며” 시편 51:17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통회하는 마음’은 슬퍼하고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입니다.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탄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을 때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무법하며 음란하게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심령이 상했습니다(벧후 2:7-8).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탄식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오늘날 죄는 많아졌으나 통회하는 심령은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죄를 통회하는 사람은 자존심이나 체면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책망이나 징계도 달게 받고 회개의 결과 어떤 손해가 날지라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은 죄를 슬퍼할 뿐입니다. 이렇게 죄를 통회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사야 57:15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셋째.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떤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어기면 벌을 받을 줄로 알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건한지 아닌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지 아닌지, 그 사람의 신앙을 알아보려면 무엇을 봐야 할까요?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의 사위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주께서 강림한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할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으며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랬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대로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말씀을 무시해 버립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말씀을 지키다가 잘못 지키면 벌 받을 줄 알고 떨어야 합니다. 에스라 10:3에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떨면서 준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다가 다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주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3. 하나님이 주는 위로와 복

10-14절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첫째. 기뻐하게 됩니다(10절).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는 슬픔이 사라지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만족하게 됩니다(11절).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서 젖을 빠는 것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와 만족을 얻게 됩니다. 셋째. 평강을 강같이 주십니다(12절).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때 마음속에 강 같은 평강이 넘칩니다. 기쁨이 샘솟듯 하고 즐거움이 넘칩니다. 넷째. 위로를 주십니다(13절).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위로할 것입니다. 위로를 받으면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다섯째, 연한 풀같이 번성할 것입니다(14절). 새싹이 자라는 것처럼 왕성하게 자라서 번성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어야 합니다. 죄를 찾아 회개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대전 복용교회 박석중 목사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