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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3:1-6 /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

박석중목사(대전)

by 김경호 진실 2025. 1. 31. 08:56

본문

요즘 세상을 보면 하루하루가 놀랄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 개인과 가정에도 전에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별별 어려운 일들을 다 당하면서 40년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4절에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 길은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이고 처음 가는 길입니다. 4절에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일리니” 모르는 길을 가지만 어떻게 행할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전에 지나 보지 못한 길, 누구도 알 수 없는 길을 가야 합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환난과 시험이 많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모르고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날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다 극복하고 축복의 땅에 도달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는지 알려줍니다. 이전에 지나 보지 않았던 길을 성공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비결을 배웁시다.

 

1. 건너가기 전에 유숙하니라

1절에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가 요단강 강가에 도달하여 건너지 않고 유숙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 “삼일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3일 동안 요단강 가에서 유숙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왜 3일 동안 요단강 가에서 유숙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이 큰 문제를 자기 수단이나 방법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것입니다. ‘배를 만들자, 뗏목을 만들자, 물이 얕은 곳을 찾아보자’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요단강 건너는 길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요단강 같은 난관이 올 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서두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의논해야 합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2절).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3일 동안 머물며 기도한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3일 동안 유숙하며 기도한 것이, 기도 안 하고 서둘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도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기도는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3일간 머물며 기도했던 여호수아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수 3:1),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도(수 6:12), 아이성을 점령할 때도(수 8:10)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시편 5:3에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46:5에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기도보다 앞서는 것은 다 실패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아침에 일어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인생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2. 언약궤 뒤를 따르라

3절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중요한 지침을 하달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창의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행진할 때 그냥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앞서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요단강 건너는 방법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십계명을 쓴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지팡이는 죽은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한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비결은 말씀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여행할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따라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따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만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따라갑니다. 사람을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그것은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을 따르려면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4절에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이천 규빗은 약 1000미터 정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바짝 따라가면 좋을 것 같은데 왜 2000규빗 떨어져서 따라가라고 했을까요? 왜 이렇게 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 했을까요? 그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언약궤를 가까이 따라가면서 자기가 더 앞서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 빨리 가느냐? 왜 천천히 가느냐?’ ‘내 생각에는 이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면서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목자 되시는 예수님보다 앞서서 먼저 가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 보기에 옳은 것 같아도 필경은 사망 길이 있습니다. 가까운 길 같고 쉬운 길 같아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멀고 힘든 길 같아도 생명 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좁은 길은 좁고 가기 힘들고 가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 길입니다. 넓은 길은 쉽고 편하고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멸망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바르게 살아갈 수 없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입니다.

 

3.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5절에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법은, 구약 시대에는 의복을 빤다든지, 옷을 갈아입는다든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 등 율법이 정한 의식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의식적인 방법으로 성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회개하여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욕심이나 악한 생각을 버리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데 왜 이런 일들을 해야 합니까?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정결하게 하는 것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고 도와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이적과 능력으로 요단강을 갈라주셔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함께 하실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쉽게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 싸움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아간의 범죄 때문입니다. 아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떠나고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시편 5:4-6에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4. 요단강에 들어서라

8절에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물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요단에 들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넘실대는 강물에 발을 내딛는 것은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16절에 보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마자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흐르던 물이 멈추고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내딛었던 한 걸음, 그 순종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걸어가야 합니다. 요단강으로 한 걸음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하지 말고 한 걸음 내디딥시다.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새벽기도,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복음 전도, 원수 사랑 등. 요단강을 내 힘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갈라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기적을 맛보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에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 처음 가는 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행할 길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 요단강 같은 난관과 장애물이 있어도 능히 가르고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승리하는 인생 사시기 축원합니다.

 

 

대전 복용교회 박석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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