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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탄생: 여성주의 신학의 걸림돌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10. 2. 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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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탄생: 여성주의 신학의 걸림돌
고재수  (N.H. Gootjes, 캐나다 개혁교회의 신학대학 교수, 교의학)

 
 지난 연재 [원문 출처: 「클래리온」(Clarion), 글쓴이: 고재수 교수, 옮긴이: 최혜선]

․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성약출판소식 36호 (2002. 12.)

․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성약출판소식 42호 (2003. 12.)

․ 동정녀 탄생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약출판소식 47호 (2004. 12.)

 

여성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마리아


여성주의 신학은 신학계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 되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여성주의적 접근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개신교 교회들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처(到處)에서 여성들이 여성 해방의 문제들에 성경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묘사된 여인들에게서 그들의 영감(靈感)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그 여성들이 그들의 시대에서 그들의 권리를 어떻게 옹호했는지를 살핌으로써 이 사람들도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인식시키는 자기들의 투쟁을 계속하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세기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주의 모친인 마리아는 영감을 얻기 위해 바라보는 여성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곧 실망에 이르게 됩니다. 마리아는 지나치게 복종적인 듯 보이므로 여성주의의 맥락에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초기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마리아를 여성주의 모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했습니다.1)


그러나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마리아에 대해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은 마리아가 결코 소극적이고 유순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여장부였음에 주목합니다. 라비니아 번느(Lavinia Byrne)는 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 그의 남자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마리아는 그를 지지했던 사실을 지적합니다. 아이본 릴(Ivone Leal)은 마리아가 아들의 모험적인 삶에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시도가 실패할 것임을 알고도 마리아는 계속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신학자인 메리 오드리스콜(Mary O"Driscoll)은 마리아의 찬송을 들어 그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옹호했음을 증명하려 합니다.2)


이제 마리아는 다른 여성들과 더불어 현대 여성의 모범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모범 사례를 드는 설명 방식에 대해서는 이만큼 하기로 하고,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접근의 중요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3)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은 아직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인데, 바로 이것 때문에 마리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갔습니다.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눅 1:48)


하지만 많은 여성들은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마리아는 복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이 부분이 여성주의 신학에서는 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두 가지 문제점


동정녀 탄생이 간과되는 이유는 마리아의 생애에서 이 부분이 여성들에게 아무런 영감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방 신학의 변종인 여성주의 신학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사회와 교회 안의 복종적인 위치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기를 원합니다. 여성은 남성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여성 자신일 수 없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은 여성을 전통적인 복종적 위치에서 해방시키려 합니다. 여성은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여성의 견해나 방법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성은 어떤 남성의 아내나 어떤 아이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리아, 특히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마리아는 이점(利點)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이 부분에서 마리아는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타납니다. 한 개인의 모습이 아닌 예수의 어머니로서 그려집니다. 단지 예수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마리아라면, 혹은 독창적인 인물인 그 아들과 대조적으로 수동적인 여성이라면, 마리아는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4)


여성주의 신학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를 강조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 됨의 영광으로 귀결되고, 마치 그것이 여성의 유일한 참된 목적지인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단지 가정에 복속되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여성의 또 다른 예일 뿐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이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로마교 신학을 개신교 신학보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이것이 여성의 성(性)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5) 여성주의 신학자들에게 동정녀 탄생은 즉시 제거해 버려야 할 부분입니다. 여성 해방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해결책


이 거슬리는 부분을 기독교 신학에서 제거해 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중 조금 덜 과격한 해결책은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의 마지막 말에서부터 해석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 말은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순종적으로 복종하기만 하는 단순한 여종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케스(C. Halkes)는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의존 관계가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존적이 되셨습니다. 마리아는 수동적인 복종을 한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수용을 한 것입니다.6) 이 부분에서, 여성주의 신학이 로마 가톨릭 신학에 접근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모두 인류가 마리아 안에서 구주를 탄생시킴으로써 구원 사역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자체는 이 해석을 반박합니다. 마리아가 자기의 지위를 표현한 ‘여종’이나 ‘계집종’과 같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냅니다. 그 단어들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7)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의존적으로 만들어 마리아의 허락을 구한다는 암시는 아무 데에도 없습니다. 천사는 아들을 낳을 것에 대해 마리아의 동의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눅 1:31).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 해석가들은 그들의 해석이 본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지 않고, ‘여성주의 명제를 위해서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또 다른 신학자들에게는 마리아가 천사에게 허락을 했다는 해석도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종속적인 위치에서 아들의 중요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급진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성경 두 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서두의 몇 장에서만 언급된다. 이 장들은 역사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훗날 예수의 이야기에 덧붙인 것이다. 그것들은 “성육신의 신비로움을 믿게 할 필요가 있어 포함된 것”이다.8) 쉽게 말해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이 없다. 한 아이가 그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마리아에게 선언한 일이 없다. 성신이 동정녀 탄생의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신비에 대해서도 알린 일이 없다. 예수의 영광이 더 빛나도록 초대 교회가 이 모든 요소들을 덧붙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듯이 동정녀 탄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할케스는 비교 종교학 연구 결과에 호소합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 숭배는 동정녀 여신 숭배의 배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처녀성 교의(處女性敎義)는 위대한 동정녀 여신의 근원적 신비와 연관되어 있다.” 이 여신은 독립적이고 자기 충족적입니다. 자녀를 잉태하지만 남자에게 의존하지는 않습니다.9) 동정녀 탄생은 아이를 낳는 일에서조차 남성을 필요치 않는 독립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필연성 


물론 이것은 기괴한 해석입니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대지의 여신에 대한 주제의 변종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만일 풍요의 여신을 믿고자 한다면 동정녀 탄생의 기록을 통째로 거부할 것이지, 그토록 우스꽝스럽게 성경 이야기를 재해석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무시해 버리기보다는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서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물어야 합니다. 이 신학자들은 성경을 어떤 용도로 사용합니까? 그들은 여성이 복종의 위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근거를 찾을 뿐입니다. 그들은 탐색 도중 성경에서 가장 현저한 여성을 한 명 만나게 됩니다. 마리아와 그의 생애의 중심 사건인 동정녀 탄생의 일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성 해방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삭제하며, 혹은 정반대로 선회하여 여성의 성을 긍정하는 이유입니다.


여성주의 신학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근본 이유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 억압과 여성의 복종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진정한 문제는 죄입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있는 죄가 근본 문제입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잘못된 문제에서 출발했으므로 잘못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여성 해방이 아니라 죄의 제거입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인류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야만 합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한 아들을 낳은 마리아가 아니라 그를 쓰셔서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보여 줍니다.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는 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심장을 떼어내는 희생을 감수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복되다고 부릅니다(눅 1:48). 마리아가 자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작지만 영광스러운 과업, 곧 우리의 구주의 어머니가 되는 일을 완수했습니다.10)

 

1) C. Halkes, “Mary and Women” in Mary in the Churches (eds. H. Küng, J. Moltmann; Edinburgh: T & T. Clark, 1983), 66쪽
    참조.

2) 이 예들은 1991년 12월 30일 「타임」 지 55쪽에 실린 글에서 취함. R.N. Ostling, “Handmaid or Feminist? More and

    more people around the world are worshipping Mary - and it"s lead to a holy struggle over what she stands for.”

3) 이를 위해 한 예로 H.J. Schilder, “Praesidium libertatis” in De Reformatie, 51권, 121쪽 이하 참조.

4) C. Halkes, “Mary and Women,” 68쪽 이하 참조.

5) 독일 여성주의 신학자인 우타 한케-하이네만(Uta Hanke-Heinemann)은 “Handmaid or Feminist?” 56쪽에서 ‘마리아의 종신 처녀성은 그에게서 여성의 성(性)과 정상적인 모성을 빼앗아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킨 독신 성직자들의 고안물이었다’라고 말한다.

6) C. Halkes, “Mary and Women,” 68쪽 이하를 참조.

7) J. 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8), 72쪽 참조.

8) C. Halkes, “Mary and Women,” 67쪽과 R.N. Ostling, “Handmaid or Feminist?” 55쪽 이하 참조.

9) C. Halkes, “Mary and Women,” 72쪽 참조.

10) 원문 출처: Clarion, 43권 (1994) 588-589쪽. 번역: 최혜선 (강변교회 교인). 이 원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과 감수를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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