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10. 2. 12. 09:15

본문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
고재수  (N.H. Gootjes, 캐나다 개혁교회의 신학대학 교수, 교의학)

 
 지난 연재 [원문 출처: 「클래리온」(Clarion), 글쓴이: 고재수 교수, 옮긴이: 최혜선]
 

․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성약출판소식 36호 (2002. 12.)

․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성약출판소식 42호 (2003. 12.)

․ 동정녀 탄생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약출판소식 47호 (2004. 12.)

․ 동정녀 탄생: 여성주의 신학의 걸림돌····성약출판소식 52호 (2005. 12.)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두 복음서 외에는 없음


동정녀 탄생은 위대한 기적입니다. 물론 기적과 관련하여 우리가 더 위대한 기적과 덜 위대한 기적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신 일은 바다를 잠잠케 하신 일보다 덜 위대한 기적입니까? 우리는 잘린 귀를 붙이는 데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한순간에 잠잠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기적을 행하는 데 관련된 능력을 모르므로 기적들을 비교하여 가장 위대한 것을 가려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동정녀 탄생이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 기적들을 비교하는 것은 그만두고 한 가지 기적이라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성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가운데 동정녀 탄생이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고의 귀를 고쳐 주셔서 보기 흉한 상처를 없애고 잃을 뻔한 청각을 돌려주셨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셔서 생명의 위협을 받던 제자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두 기적이 모두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어떤 성격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동정녀 탄생은 우리의 구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방법에 주목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기적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 두 복음서에서만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른 두 복음서인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신약의 다른 서신서들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단지 마태와 누가의 두 증언이 뚜렷이 있을 뿐입니다.


동정녀 탄생이 다른 복음서나 그 외의 신약 성경에 명백히 언급되지 않은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까?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서 주석에서 복음서들을 단순하게 조화시켜서 연결합니다. 먼저 누가의 동정녀 탄생 기록을 다루고, 다음으로 마태의 기록을 다룹니다. 마가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시작을 기록한 부분을 다룰 때에도 이 복음서에서 동정녀 탄생이 빠진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1)


우리 시대는 이런 순진함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불트만은 동정녀 탄생이 헬라주의적 기독교에서 유래한 전설이라고 거칠게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 전설을 바울 사도는 몰랐고 예수의 근원에 관해 마가와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견해가 달랐다고 합니다.2) 불트만이나 다른 신학자들은 신약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통일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인하고서 그렇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을 여러 저자들이 예수에 관해 각각 자기의 견해를 제시한 책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견해들은 모두 계시된 것이 아닐뿐더러, 차라리 예수 이야기에 관한 인간 명상의 산물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가와 마태는 헬라주의적 기독교인의 해석이 아닌 사실의 진술로서 복음서 기록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저 칼빈으로 돌아가서 동정녀 탄생이 네 복음서 중 두 곳에만 언급된 사실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이 기적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단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그 답변이 필요합니다. 이 기적을 몰랐거나 혹은 부인하여 침묵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왜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3)


마가와 요한


마가가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 않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전까지는 그 생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전면에 나서신 순간부터 기록하려는 것이 마가의 의도였음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마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기록했다는 초기의 전승(傳承)과도 일치합니다.4) 동정녀 탄생은 베드로가 직접 알았던 사건에 속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미에 기록된 책의 목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31, 21:24-25 참조)


이 목적에 맞게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고(1:1-18), 계속해서 그와 다른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된 것과 중복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려 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자기의 목적 안에서 요한은 동정녀 탄생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가와 요한의 복음서가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를 말하지 않습니다.5) 그 내용은 오히려 동정녀 탄생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1:1),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을 기록합니다(5장). 두 복음서 모두 예수께서 단지 비범한 사람을 뛰어넘는 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침묵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1ㆍ2ㆍ3서, 베드로 전후서에서 동정녀 탄생에 관한 암시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서신들은 매우 짧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 책들은 특정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소 다릅니다. 그의 서신 13편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중에는 내용이 상당히 많은 글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동정녀 탄생을 다루거나 혹은 적어도 언급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까? 어떤 이들은 갈라디아서 4:4에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지만 우리의 논의에 이 본문을 적절히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 이상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동정녀였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바울이 예수께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암시도 주지 않습니다. 그의 진술은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지도 승인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심으로써 율법 아래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셨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태어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6)


바울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쓰지 않은 이유는 아직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두 가지 답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답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부분은 바울이 알고 있었는데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7)


두 번째 답변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생애 중 특별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경우만 언급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찬 제도(고전 11장)는 만일 고린도에서 이 성례가 오용되지 않았다면 언급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고전 15장)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부활을 몰랐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부활과 같은 사실들은 그가 교회들에 가르친 “먼저 전한 것”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유능한 옹호자인 그레샴 메이천은 심지어 바울의 침묵도 유리하게 이용합니다. 그의 서신들에 동정녀 탄생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기적이 당시 교회 안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므로 변호할 필요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8)


이러한 의견이 타당하기는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하신 말씀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으며 공생애 삼년 동안 행하신 일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을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말씀과 똑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분의 근원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마지막 부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왜 생애의 시작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목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 사역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 로마서 1:3, 갈라디아서 4:4과 같이 여러 경우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동정녀 탄생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교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위치


이 사실은 우리를 다시 복음서로 데려갑니다. 혹시 동정녀 탄생의 기록에서 바울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는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하는 말로 동정녀 탄생을 알려 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를 덧붙이는데, 그중 하나는 마리아의 아들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는 진술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대신, 천사의 처음 말로 돌아갑니다. 자기의 현재 상태에서 어떻게 아들을 수태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천사는 이 일에 남자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성신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5)


‘이러므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마리아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수태에 남자가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성신을 통해 그 아들을 세상에 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정녀 탄생은 주된 쟁점이 아니고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기적적인 방법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위대한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모든 기적들같이 그 자체에 관심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고의 귀를 낫게 하신 것이나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이 기적들은 낫게 하시거나 잠잠케 하신 행위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적의 능력으로 이루신 내용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분은 원수라도 치료하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셨습니다. 또한 자기 제자들을 가장 큰 위험으로부터도 능히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정녀 탄생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놀라운 결과에 봉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울이 동정녀 탄생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기적적인 성격을 가진다 해도 동정녀 탄생은 결국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중심 내용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일’을 이루는 방법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강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에 동정녀 탄생의 언급이 없다고 해서 이것이 헬라 사상을 가진 신자들이 지어낸 전설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사실로서 보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종속적인 위치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의 침묵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초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동정녀 탄생의 방식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합니다.9)






------------------------------------------------

1) 칼빈이 마가의 기록을 처음 소개하면서 설명한 내용은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살펴본 내용도 복음서의 일부이지만, 마가가 마가복음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전도로 잡은 것은 이유가 있다”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repr. Grand Rapids: Baker, 1984) 1권, 1873.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18세기의 중요한 주석학자 J.A. Bengel은 마가복음 1:1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이 복음 기자의 특별한 목적은, 그가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과 연혁과 동기와 진행과 결말을 기술하는 것이다.” Gnomon Novi Testamenti (8. ed. P. Steudel; Stuttgartiae: Steinkopf, 1891) 173쪽 참조.


2)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1) 1권 131쪽. 같은 견해를 W.G. Kümmel, Theology (Nashville: Abingdon, 1973) 124쪽(누가와 마태에 관해), 165쪽(바울에 관해), 271쪽(요한에 관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견해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J.N.D. Kelly의 사도신경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의 기초가 되었고(Early Christian Creeds, 3판; New York: Longman, 1983, 11쪽 이하 참조), H. Berkhof의 동정녀 탄생 부인의 바탕이 되었다(Christian Faith, Grand Rapids: Eerdmans, 1979, 292쪽 이하 참조).


3) 특별히 사도행전을 다룰 이유가 없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속편이며(행 1:1)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요약된 몇몇 연설들은 완결을 의도한 것이 아니다.

        

4) 파피아스(Papias)의 이 자료는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Ecclesiastical Histories 3권 39장 15쪽 참조).


5) 요한복음 6:42을 다룰 필요는 없다(“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것은 동정녀 탄생을 명백히 알지 못했던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한 말이다. 요한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고 그들의 말을 그대로 기록했다. D. Guthrie의 New Testament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81) 370쪽도 참조하시오.


6) 예를 들어 H. Ridderbos의 주석서, The Epistles of Paul to the Church of Galatia (Grand Rapids: Eerdmans, 1953) 155쪽 이하를 참조하시오.


7) Y. Feenstra, Geboren uit de maagd (Kampen: Kok, 1959) 15쪽.

    

8) J. Gresham Machen, The Virgin Birth of Christ (2판; repr. Grand Rapids: Baker, 1985) 262쪽 이하 참조.


9) 원문 출처: Clarion, 44권 (1995) 580-581쪽. 번역: 최혜선. 이 원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