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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영광의 증시를 위한 직업(이승구교수)

직업관

by 김경호 진실 2010. 6. 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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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영광의 증시를 위한 직업

-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 영광의 증시를 위한 직업으로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을까?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국제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노동과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직업 이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직업 이해와 과연 어떻게 다를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직업을 선호하여 선택하고, 일단 직업을 선택한 후에는 어떤 태도로 그 직업을 수행해야 할까? 직업이나 노동 문제에서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됨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직업관과 비琉?볕돛括?직업관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에 많이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현대 산업 사회 속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대개 (1) 그 직업을 통해서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고, (2) 그 직업이 자기 발전의 기회와 수단이 될 수 있고, (3) 그 직업 활동을 하면서도 여가를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으며, (4) 다른 이들이 낮추어 보지 않고, 그 직업에 대해서 존중을 표하게 되는 직업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들로 열거된다. 이는 대개 현대를 사는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업의 상당히 세속적인 기준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의 직업에 대한 의식에서도 실질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이 비그리스도인과 전혀 차별이 없는 이런 현실은 과연 옳고 바른 것인가? 또한 우리의 직업 활동 수행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그리스도인의 활동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과연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직업 선택이나 직업 활동의 수행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 의식이 이 논의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강의에서 (1) 문화 명령과 (2) 대위임령, 그리고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업 이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직업과 노동은 성경이 말하는 그 이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따라서 우리는 직업 선택과 수행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활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직업

개혁 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창세기 1:28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blessing)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해 왔다. 이 문화 명령은 때때로 창조 명령(creation mandate)이라고 언급되기도 했고, 기독교적 청기기직(Christian stewardship)과 동일시되기도 했다.1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낳고[生育], 그래서 많아지고[蕃盛], 그리하여 이 땅 위에 널리 퍼져 나가는[充滿] 목적은 이 땅을 정복하고 돌아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려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시는 세상에 우리네 인간을 대리 통치자(vice-regent)로 세우신 것이다.2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on God's behalf)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3 메레디트 클라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같은 왕(the God-like king) 사람의 통치는 그의 자연적인 영역인 첫 삼일의 마른땅에서 시작하여, 그로부터 첫 삼일의 피조계에 대한 지배와 둘째 삼일의 모든 피조적 지배자들(creature-kings)에 대한 문화적 정복(cultural conquest)을 통해서 확대되어 나간다."4 이런 언급 속에서 클라인은 인간의 통치 사역이 문화적 과업과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문화적 사역을 포함한 이 세상에 대한 통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아주 고귀하게 창조하셨다. 통치권 그 자체가 형상인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5 즉, 키드너가 델리취를 인용하며 말하고 있듯이, "통치는 형상의 내용이 아니라, 형상 됨의 결과이다."6 웬함도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은 자연 위의 왕이다."7 그러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는 일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말하는 "땅을 다스림"이란 린 화이트(Lynn White)나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온 세상에 대한 인간의 전횡(專橫)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하고 이와 같은 구절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심각한 환경 파괴가 야기되었다고 말하는 린 화이트의 주장은8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빅톨 해밀톤이 잘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환경계(the environment)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고 파괴하라는 권한(a licences to rape and destroy)을 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사람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면, 모든 것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9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아더 홈즈의 말은 아주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신체와 다른 물질, 그리고 자연 자원을 잘 돌보며, 그것들을 경제적, 심미적 목적 등을 위해 잘 사용하고 보존하고, 자기 몰입적인 착취나 남용이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그의 은혜에 반응하는 태도로서 그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즐겨야 하는 것이다. 책임 있는 예술과 과학, 책임 있는 경제와 과학 기술, 책임 있는 신체 활동 및 신체적 향락 - 이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10



김균진 교수도 창세기 1:26, 28이 말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파괴와 착취가 아니라 자연을 위한 인간의 '섬김'과 '고난'을 뜻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 동산을 섬기고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11 그는 몰트만에게 동의하면서 다른 모든 바른 성경 해석자들과 같이 창세기 1:28을 2: 8, 15과 연관시켜서 조화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옳은 관찰이다 성경은 그 궁극적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종국적으로는 이런 조화적 이해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주장과 그에 함의된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의 '지배'와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야위스트의 전승사적 맥락과 성서 전체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이 '지배'와 '정복'은 인간적으로 곧 억압과 착취로 이해되기 쉽다."12 사실 창세기 1:28의 명령을 하실 때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을 다스리는 이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우리네 인간의 힘을 가해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혁파 선배들은 이를 문화 명령이라고 불러 왔다. 이 문화 명령을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통치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개발시키라는 명령"이라고 요약하고 있다.13 개혁파 선배들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세상에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이 땅 위에 세우신 목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이 수행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화 명령의 수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배필'(, a help of his like or a helper matching/fit for/corresponding to him)로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함께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셨다. 카일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아이들을 낳고 인류를 번성시키는 일 뿐만이 아니라, 땅을 지키고 다스리는 그의 소명을 성취하도록" 말이다.14 그리고 그들은 그 둘 만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기원하여 존재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분담하여 함께 수행하도록 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사람은 자기의 은사와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힘써야만 한다. 이런 문화적 과업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본 학자 중의 대표자인 프란시스 나이젤 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고 땅을 정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 뜻 그대로 다스리는 자답게 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킴으로 피조계에 대한 우리의 권위를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κατακυριε?ω - LΧΧ).



둘째로, 그것은 우리가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려야 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잡아서 통조림으로 만들고 매매하는 것과 대륙간을 연결하는 정기선을 운행하는 것, 잠수함으로 깊은 바다 속을 개발하는 것 ...... 양식장을 만들어 굴과 해초를 양식하며, 물고기와 플랑크톤을 양어 하는 등의 이 모든 일들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우리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함을 뜻한다. 이것도 ... 새롭고 더 좋은 육축의 종자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 양을 쳐서 양모를 생산하고, 운송을 위해 말을 기르고 또 자동차를 개발하며, 곡식을 거두고, 빵을 구우며, 밥을 하는 등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아담이 그 본래의 의미를 따라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듯이(창 2:19), 이 모든 활동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도록 과학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섯째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피조계를 조화롭게 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경, 윤작, 일반 생태학적 농촌 계획, 그리고 도시 계획과 교통 문제에 대한 모든 계획도 힘써서 할 일인 것이다.



여섯째로, 이것은 동산을 지키고 수호하는 일, 즉 환경을 정비하는 일을 포함한다. 특별히 죄가 들어 온 후 사람들은 이제 많은 세균과 싸우고, 좋은 하수 시설을 하며(칼빈이 제네바에서 그리 하지 않았던가?), 사단적인 적들을 막고, 오염과 투쟁하며, ...... 죄와 그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



일곱째로, 그것은 또 우리가 공중의 모든 새를 지배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 공중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15



이와 같은 리(Lee)의 말에는 좀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있으나 그래도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문화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창조와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우리의 노동과 직업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노동과 그것의 구체화된 형태인 직업은 하나님의 이 문화 명령을 이루기 위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이 이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일부로 이 세상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타나(창 3:18),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동이 고되고 힘든 일이 되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니라 ...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창 3:17-19). 그리하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힘든 노동을 하다가 이 땅에로 돌아가도록 되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9). 이제 노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발전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드러내는 일일뿐만 아니라, 저주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 땅 위에서 문화가 진전하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이후에도 우리의 노동은, 저주로서 괴롭고 슬픈 것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더구나, 우리가 다음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점에 대한 생각에서 고찰할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노동도 원칙적으로 구속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 타락의 영향력이 우리의 노동에도 미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노동의 구속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노동과 직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복 주시며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이 땅 위에 가득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우리의 직업과 직업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위에 증시(證示)하는 문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다.



2. 대위임령의 빛에서 본 직업

신약에는 또 하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는 이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갈릴리에서 주신 말씀이므로(28:16),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께서 승천하신 것이라고 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떠난 잘못된 해석을 유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행 1:9-12).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는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이와 비슷한 말씀을 여러 번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우리가 극단적인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논외로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최후로 사도행전 1:7-8의 형식으로 같은 의미의 대위임령을 거듭 명하신 후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행 1:9).



이렇게 주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령이 한국 교회 안에서 흔히 선교와 양육을 위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말씀이 전도와 선교, 그리고 그 후에 양육과 기독교 교육을 명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 하면 이 말씀은 (1) 모든 족속들에게로 "가서"(πορευθ?ντε?)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μαθητε?σατε π?ντα τ? ?θνη) (3)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된 이들에게 성부의,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βαπτ?ζοντε? α?το?? ε?? τ? ?νομα το? πατρ?? το? υ?ο? το? ?γ?ο? πνο?ματο?) (4) 세례 받은 자들을 가르쳐(διδ?σκοντε? α?το??)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τηρε?ν π?ντα ?σα ?νετειλ?μην ?μ?ν) 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나타난 4 가지 동사들 가운데서 주 동사는 "너희들은 제자를 삼으라"(μαθητε?σατε)는 말씀이고, 나머지 3 개의 분사는 이 주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분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명령형과 연관되면 그 분사도 명령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16 그러므로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처럼 4 가지 모두를 명령형으로 번역한 것은 잘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는 일은 결국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해서 제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칼빈의 말과 같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구별을 제거하시고 그 둘을 동등시하시면서, 그 둘 모두를 같이 언약의 공동체(the company of the Covenant)에로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이제 벽이 허물어지고 주께서는 복음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땅의 모든 지역에로 나아가 구원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17 그러므로 교회의 이방 선교는 명령된 일이다.18 닉슨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주님의 보편적 권위는 교회의 보편적 사명에로 우리를 인도한다."19 카슨은 "그가 보편적 권위에로 높여짐은 그의 보편적 사명(universal mission)의 시작을 도입시키는 종말론적 표시(무 eschatological marker)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20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기 위해 모든 족속들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례 주는 일은 그 대상자가 이미 복음을 믿고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칼빈이 잘 말한 바와 같이 "부분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얻었다는 것의 표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외적인 표이다".21 이런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제 관계에로 들어가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부의 성자의 그리고 성령의 이름 안으로(ε?? τ? ?νομα, into the name)라고 표현한 것에 그런 관계성에 대한 암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이들이 많다.22 물론 "이름 안으로"(ε?? τ? ?νομα, into the name)라는 전치사구와 신약의 다른 부분들(행 2:38; 8:16; 19:5)에서 나타나는 "이름으로"(?ν τ? ?ν?ματ?, in the name)라는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것은23 무의미하다. 그 두 가지 표현 중의 어떤 표현을 쓰든지 별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안으로"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에는 그런 관계성과 교제에로의 연합이라는 의미가 이런 표현 안에 함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름"이란 말이 사용된 것에 이미 소유권(ownership)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24 그러므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 대상자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음을 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도 제자 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제자로서 존재하고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그저 윤리적인 것만도 아니고,25 삶과 분리된 교리적 가르침도 아니다. 기독교적 가르침 전체가 항상 그러하듯이 교리와 윤리가 함께 하는 가르침이다. 진지한 신약 학자들이 늘 강조하듯이 케리그마(κ?ρυγμα)와 디다케(διδαχ?)는 상호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26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다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핀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다 "제자 삼는 일"과 연관되어져 있다. 가는 일도 제자를 삼기 위해서 가라는 것이고, 세례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도 별도로 명령된 일이지, 그것이 제자 삼는 방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pace Willoughby C. Allen, Erich Klostermann, M.-J. Lagrange, Adolf Schlatter).27



그러나 이 대위임령의 뜻을 그저 좁은 의미의 전도와 선교, 양육 등으로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라는 뜻이고, 제자가 된 이들에게 예수님의 뜻을 다 가르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다른 이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전도에 힘쓰는 이인가? 그것도 제자 됨의 한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 됨의 의미를 다 소진(消盡)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자는, 카슨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지키는 자이다(마 12:46-50)."28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을 다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일만이 속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 명령과 대위임령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복음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은 이제 정상적 사람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네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9 프란시스 나이젤 리는 이런 요점들에 유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옳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all things whatsoever)이라고 하셨을 때, 그가 의미하신 것은 문화 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전포괄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며(Grosheide), '그리스도의 권위 전체'에 바른 관심을 두는 것이 된다(Ridderbos).

?컥決?Kamphuis)는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리스도의 권위'는 온 세상에 미쳐야만 한다. 이 말은 구원의 사실을 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있게 되면, 우리가 본대로 '태초의' 그 절대적인 규범이 다시 요청되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문화 명령의 수행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온전히 다 실현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그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에 힘쓰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에 힘쓰면서 또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힘쓰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는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대위임령의 빛에서 보았을 때도 우리의 직업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귀한 작업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직업에 대해서 이런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밝히고 드러낸 이들은 개혁자들(reformers)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로 말미암아 소명이라는 뜻의 Beruf 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 일상적인 직업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얼마나 상식적인 말이 되어 버렸는가? 이전에는 세속적인 일이라고 하던 것이 개혁자들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소명이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개혁자들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개념을 주님의 지상 명령과 연관시켜야 한다. 그래야 소명으로서의 직업의 그 진정한 의미를 다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본 직업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天國]와 우리 직업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天國]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왔으며,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극×?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31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天國)에 속해 있는 천국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는 그 순간부터 이 땅에서도 이미 천국에 속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으로 인하여 이미 이 땅에로 임하여 와서, 이 땅의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며 성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32



이런 하나님 나라 이해의 빛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天國百姓]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직업 활동도 진정하고 실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직업과 그와 관련된 활동은 그저 우리가 돈을 벌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된다. 이런 의식이 충실한 가운데서 성령에 의존해서 수행되는 우리의 직업 활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일이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태도를 권면하는 바울의 말 중의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권면일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ε?τε ο?ν ?σθ?ετε ε?τε π?νετε ε?τε τι ποιε?τε, π?ντα ε?? δ?ξαν θεο? ποιε?τε.

(고전 10:31)



이 말씀이 언급된 직접적 문맥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와 관련된 논의의 문맥, 특히 다른 이들에게 거침이 되지 말고 유익이 되는 태도로 살라는 권면의 문맥이다. 그러나 이런 권면은 결국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가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의 앞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몸을 가지고 죄를 피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이 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γορ?σθητε γ?ρ τιμ??. δοξ?σατε δ? τ?ν θε?ν ?ν τ? σ?ματι ?μ?ν.

(고전 6:20)



여기에는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33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과 그 직업 활동의 모든 일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합법적인 자리를 가진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34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ε?? δ?ξαν θεο?) 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δοξ?ζειν τ?ν θε?ν) 일이어야만 한다. 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가 구속을 받아서(골 1:13-14; 고전 7:23; 행 20:28; 벧후 2:1 참조),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 되었다는 우리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구속함을 받아 죄의 노예 됨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나님의 자녀와35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π?ντα ε?? δ?ξαν θεο?) 행한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말은 이 "영광스럽게 한다"는 희랍어 '독사조'(δοξ?ζω)의 히브리어 상당 어인 '카베드'(??????)가 함의하고 있듯이 하나님 자신을 무겁게 여긴다(make heavy=give honour)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규범을 높이고 존중하며, 그에 따라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흐로솨이데의 관찰은36 아주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도 우리 삶의 외적 행동들이 그의 말씀에 의해 방향 지워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37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가치 있는 일에 드려 우리의 일이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38 그리고 고린도 전서 10장의 문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39



직업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직업 활동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태도로 할 것이다. 그는 결코 아무런 뜻 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에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면 무성의하게 그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근거해서 그 일을 하려고 해야만 한다. 그런 태도로 직업에 임하는 이들은 주어진 일을 건성으로 하거나, 사람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4. 구체적인 예 하나

이제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활동의 구체적인 예를 신약 성경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면서,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어떤 좋은 직업들과 관련해서만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지, 우리의 구체적인 직업 속에서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이들을 위해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직업 가운데서 가장 천한 직업을 하나 생각해 보자. 그것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노예'가 그것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노예의 일을 보면서, 그것은 문화 명령이나, 대위임령이나 하나님 나라나,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할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노예들(종들)에게 주고 있는 권면에 의하면 우리의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6:5-8을 보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 앎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로써 신약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노예와 육체의 상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 상전은 오직 "육체적으로"(κατ? σ?ρκα) 상전이라는 것이다.40 이는 내면적인 노예 해방을 낳게 한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의 노예들은 비록 "육체의 상전들을"(το?? κατ? σ?ρκα κυρ?οι?) 섬기는 종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종들(ο? δο?λοι το? Χριστο?)이다. (특정한 사람들만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다! 심지어 고대 사회의 노예들도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다른 주인들의 노예[종]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slave of Christ)이고 그리스도의 자유인(Christ's freeman)인 것이다. 고전 7:20-22 참조) 그러므로 그들은 "성실한(단일한) 마음막?quot;(?ν ?πλ?τητι τ?? καρδ?α?, in singleness of heart) 섬겨야 한다. 이는 동기의 순수함(the purity of motivation)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아무런 속임이나 두 마음을 품지 않고서"41 주님을 섬기는 섬김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눈가림만 하여서는 안 된다(μ? κατ' ?φθαλμοδουλ?αν, 골 3:22[μ? ?ν ?φθαλμοδουλ?? 참조). 여기 '오프딸모둘리아'(?φθαλμοδουλ?α)란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눈으로만 섬기는 것"(eye-service)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νθρωπ?πεσκοι)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주목을 모으거나 사람의 승인을 받는데 신경을 쓰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마음으로부터 섬겨야 한다.42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한다는 것은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스러운 주체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그가 노예라는 사회적 지위를 뛰어 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43



그리고 이런 이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ποιο?ντε? τ? θ?λημα το? θεο? ?κ ψυχ??). 그러므로 이런 이들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고전 5:10 참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일상적인 의무와 일들과도 관련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44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그는 "마음으로부터, 영혼을 다해서"(?κ ψυχ??)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열정적으로, 단마음으로, 기쁘게"(μετ' ε?νο?α?) 섬겨야 한다.



고대 사회의 노예의 상황을 안다면 그들에게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반응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바울의 권면을 기득권자로서 현상 유지(status quo)를 위한 권면이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은 직업의 상황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권면이다. 이에 대한 죤 스토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부가 마치 예수께서 그 음식을 드실 것처럼 정성스럽게 요리하며, 또한 예수께서 손님으로 오신 것처럼 정성스럽게 집안을 청소하는 것은 모두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교육할 때, 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점원이 손님을 대할 때, 간호원이 환자를 돌볼 때, 변호사가 의뢰인을 도울 때, 점원이 손님을 대할 때, 회계원이 장부를 정리할 때, 비서들이 편지를 타이프 칠 때 등 각각의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기계적인 작업을 하는 공장 노동자들이나 지하에서 작업해야 하는 광부들에게도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다. 나쁜 조건이라 해서 광산이나 공장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은 나쁜 조건들을 개선시키는 데 큰 격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황은 로마 제국에서의 노예 제도만큼 나쁜 것도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인 종이 "주께 하듯" 일을 행할 때 그 일이 훌륭한 일로 바뀌어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 광부들, 공장 근로자들, 청소부들, 건물 관리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45



이렇게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권면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본문의 직접적 맥락에서는 종이 섬기는 것은 그저 인간 상전이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 상전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46 이를 우리의 논의와 연관시켜서 대답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바른 정신과 마음에 근거한 직업 활동은, 그것이 여기 제시된 이런 정신과 태도로 수행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숨막힐 것 같은 직업 현장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태도로 우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기능과 어떤 권위 밑에서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47



바울은 이런 태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만일 어떤 선을 행하면"(??ν τι ποι?σ? ?γαθ?ν), 비록 그것이 노예의 지위에서 그 육체에 상전을 섬긴 일일지라도, 주님을 섬기는 태도로 섬긴 그 섬김에 대해서 "주께서 갚아 주신다"(το?το κομ?σεται παρ? κυρ?ου)는 incentive도 제시한다(8절). 그리고 이 일은 단순히 종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 보상이 시행되는 대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ε?τε δο?λο? ε?τε ?λε?θερο?)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선행에 대한 보상이 일반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듯이 보인다.48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보상이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자명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다 찬동하며 언급한다.49 그리고 그들은 많은 이들은 이 보상을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있을50 영생으로 이해하든지,51 골로새서 3:25과 관련하여 미래의 유업(inheritance)으로 이해한다.52 그러므로 이는 영생이나 미래적 유산 이외의 어떤 다른 보상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이 말씀을 이해하면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의도가 다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에 주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의미에 근거해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할 것이고, 그런 힘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도 정상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한 분에 넘치는 것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종이어야만 한다. 밀톤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24시간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그는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은 영원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소유(the property of Christ)이다."53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창조 후에 인간들에게 주신 문화 명령과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신 대위임령과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직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그 구체적인 예로 1 세기 때의 노예들이 과연 어떻게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사도적 교훈이 권면이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모든 논의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어떻게, 어떤 태도로 선택하고, 그 활동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이 논의에 근거한 몇 가지 제안을 해 보기로 하자.



1.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태도로 직업을 선택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피조계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피조계를 돌아보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4.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피조계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아의 진정한 의미와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 활동은 이렇게 제대로 이해된 자아 실현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직업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돕고, 이 피조계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시해야만 한다. 이 수행 과정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주어진 나의 진정한 나됨이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생각을 실존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실천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직업에 대한 선택과 활동에 있어서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없을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우리의 직업 선택과 직업 활동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직업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how to become a genuine Christian) 하는 것이다.





각 주

1 '창조 명령'이란 명명이나 '기독교적 청지기직'이란 명명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서,Arthur F. Holmes, Contours of A World View (Grand Rapids: Eerdmans, 1983), Chapter. 7, 졸역, 『기독교 세계관』 (서울: 엠마오, 1985), pp. 169f.을 보라.

2 See also John Calvin, Commentaries on Genesis, trans. John King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3; Grand Rapids: Baker, 1933) p. 96: "He appointed man ... lord of the world."

3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1 (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7), p. 33. See also Harold G. Stigers, A Commentary on Genesis (Grand Rapids: Zondervan, 1976), p. 62: "Adam was God's vicar."

4 Meredith G. Kline, "Genesis," in The New Bible Commentary, D. Guthrie and J. A. Motyer, ed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Grand Rapids: Eerdmans, 1970), p. 83.

5 이 점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H. D. McDonald, The Christian View of Man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1), p. 36: "It is because of the image that man has dominium; it is not that dominion is the image."를 보라.

6 Derek Kidner, Genesis, An Introduction & Commentary, in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67), p. 52. 폰 라트는 형상과 통치를 아주 밀접히 연관시키면서도 이와 같은 요점을 강조하면서 통치의 위임은 하나님 형상의 정의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즉 형상 때문에 하게 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Ger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19727), trans. John H. Marks, revised by John Bowden (London: SCM Press, 1972), p. 59. See also Francis Nigel Lee, The Origin and Destiny of Man (Memphis, Tennessee: Christian Studies Center, 1977), 이승구 옮김,『성경에서 본 인간』(서울: 엠마오, 1984), p. 61.

7 Wenham, p. 33. See also p. 38: "The divine image ... makes him in a real sense God's representative on earth, who should rule over the other creatures as a benevolent king."

8 Cf.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vol. 155 (March 10, 1967):1203-1207; idem, "Continuing the Conversation," in Ian G. Barbour, ed., Western Man and Environment Ethics (Reading, Mass.: Addison-Wesley, 1973), pp. 55-64.

9 Victor P. Hamilton, "Genesis,"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Walter A. Elwell, e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p. 12. See also Wenham, p. 33: "This is of course no license for the unbridled exploitation and subjugation of nature.... Mankind is here commissioned to rule nature as a benevolent king, acting as God's representative over them and therefore treating them in the same way as God who created them"; and Walter Brueggemann, Genesis,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pp. 32f..

10 Holmes, p. 170.

11 김균진,『생태계의 위기와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9977), p. 107.

12 김균진, p. 107.

13 Anth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1986), p. 14: "the command to rule the earth for God, and develop a God-glorifying culture."

14 C. F. Keil, Genesis, in Keil-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1, James Martin, trans. (Grand Rapids: Eerdmans, 1976), pp. 86f.

15 Lee, pp. 133-36.

16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Leicester: IVP, 1992;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746, n. 30. 또한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p. 595. (그는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Bibliotheca Sacra 130 [1973]: 258-67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용례로 마 2:8, 13; 9:13; 11:4; 17;27을 들 수 있다.

17 John Calvin,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III, New Translation by A. W. Morrison (Edinburgh: The Saint Andrew Press, 1972;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8), p. 251.

18 Cf. Francis W. Bear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Translatio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1981), p. 544: "The Gentile mission of the church is not merely authorized but commanded." 그런데 Beare은 후에 사도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것에 근거해서 이 말씀의 진정성을 부인하려고 한다(pp. 544f.). 비슷한 견해로 David Hill, The Gospel of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72), in loco. 이에 대한 좋은 반론으로 Carson, pp. 596f.; Morris, p. 746을 보라.

19 R. E. Nixon, "Matthew," in NBC, p. 850. 이런 보편적 사명이 구약에서부터 함의되었음을 잘 논의한 글로 J. Barton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er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62), pp. 188-94를 참조하라.

20 Carson, p. 595

21 Calvin, p. 251.

22 예를 들어서 Willoughby C. Alle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 Matthew (Edinburgh: T. & T. Clark, 1907), p. 306을 보라. 또한 다음 글들도 보라: Nigel Turner,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vol. III, Syntax (Edinburgh, 1963), p. 255, cited in Morris, p. 747, n. 34; W. F. Albright and C. S. Mann, Matthew (Garden City: Doubleday, 1971), in loco.; Carson, p. 597; 그리고 Sherman E. Johnson, "Exegesis of Matthew," in The Interpreter's Bible, Vol. 7 (Nashville: Abingdon Press, 1951), p. 624: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와 보호에로 세례를 준다, 그리고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생명적 연합을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3 그런 구별의 예로 Allen, p. 306을 보라.

24 Cf. Nixon, p. 850.

25 이 가르침을 주로 윤리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로 Beare, Matthew, pp. 545f.을 보라.

26 Herman Ridderbos; J. I. H. McDonald, Kerygma and Didach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27 비슷한 견해로 George A. Buttrick, "Exposition of Matthew," in The Interpreter's Bible, vol. 7, p. 623: "제자 삼는 것은 (대위임령의) 방법이고, 세례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그 주된 과제의 요소들이다." 이런 견해에 대한 좋은 지적과 비판으로 Carson, p. 597을 보라.

28 Carson, p. 596.

29 이점에 대한 좋은 논의로 Lee, pp. 121-60.

30 Lee, p. 145.

31 이에 대해서는 별 다른 주석을 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명제는 이제 일반화된 관찰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몇 가지 글만을 언급해 본다.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9); Adrio Konig, The Eclipse of Christ in Eschat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89); 이승구, "신국적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in 기독교 학문연구회 소식 54호, 54호.

3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이해가 신학 전체에 미치는 의미를 다룬 논문으로 졸고, "종말 신학의 프롤레고메나 - 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하여",『개혁신학탐구』(서울: 도서출판 하나, 1999), pp. 13-39를 보라.

33 Cf. F. W. Grosheid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3), p. 244: "... Paul seeks to promote the glory of God in the ordinary things of life." See also Calv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John W. Fraser, trans. (Edinburgh: Oliver and Boyd, 1960;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224: "Paul teaches that there is no part of our life or conduct, however insignificant, which should not be related to the glory of God...."

34 John Short, "Exposition of I Corinthians," The Interpreter's Bible Commentary, vol. 10 (Nashville: Abingdon Press, 1953), p. 122.

35 구속함을 받음에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노예 됨에서 해방되는 측면을 강조하는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968;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1987), p. 152와 W. Harold Mare, "I Corinth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0 (Grand Rapids: Zondervan, 1976), pp. 225f.를 보라.

36 Grosheide, p. 244: "It is precisely in that realm [the ordinary things of life] that the law of God must govern our entire life."

37 Calv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p. 133.

38 로마서 12:1과 연관시켜서 이 점을 강조하는 논의로 Clarence Tucker Craig, "Exegesis of I Corinthians," in The Interpreter's Bible Commentary, vol. 10, p. 75을 보라.

39 32절과 관련해서 이 점을 강조하는 주해로 W. Harold Mare, "I Corinthians," p. 253을 보라.

40 이 점에 대한 좋은 관찰과 시사로 Francis W. Beare, "Exegesis of Ephesians," in The Interpreter's Bible Commentary, vol. 10, p. 733을 보라.

41 Francis W. Beare, "Exegesis of Ephesians," p. 733: "without deception or divided loyalty."

42 Cf. Arthur G. Patzia, Colossians, Philemon, Ephesians, A Good News Commentar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4), p. 258.

43 Cf. A Skevington Wood, "Ephes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p. 83: "By showing some initiative, they would be acting as free agents and so transcend their social status."

44 비록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구원의 계획만이 아니라 일상사를 포함한다는 점에 대한 언급으로 Andrew T.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2 (Dallas, Texas: Word Books, 1990), p. 421을 보라.

45 John Stott, God's New Society: The Message of Ephesians, 전영근 옮김,『성도들이 만드는 새로운 사회』(서울: 기독지혜사, 1986), pp. 305f.

46 C. Leslie Milton,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Ephesians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Grand Rapids: Eerdmans, 1973), p. 215: "His 'single' purpose is to please Christ."

47 Francis W, Beare, "Exegesis of Ephesians," p. 734.

48 이 점에 대한 관찰과 논의로 Lincoln, p. 422를 보라.

49 Cf. Milton, pp. 216f.; Patzia, p. 258.

50 Cf. Wood, p. 84; Lincoln, p. 422: "eschatological reward."

51 Milton, p. 217.

52 Patzia, p. 258.

53 Milton, 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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