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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서 강해 (5)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3

본문

갈라디아 서 강해 (5)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제4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 서 제3장을 통해서 1)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노예 상태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유 함이 있다는 것과,  2)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은혜를 누린다는 것과,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동시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도 밀접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과 4) 남자이건 여자이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구원을 얻운 사람이란  내용들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제4장을 공부합니다.

갈라디아서 제4장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할 수 있습니다.
1. 4:1-20 하나님의 자녀의 성격  
2. 4:21-31 그리스도인의 자유

I 갈라디아 4:1-20의  내용을 보도록 합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Diogenes 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것" 을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에베소서 4:24에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라고 말하고 골로새 3:10에서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따라 지식, 거룩함, 의의 품성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품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 흔적은 남아 있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본성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로마인서 1장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죄” 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치명적입니다.  성경은 “죄를 지으면 죽는다” 고 말합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죄인을 징계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풀처럼 베임을 받는다고 시편 37편에 말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결코 죄를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을 입술로 공경하면서도 경외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용서치 않고 벌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이라고 요한복음 14:21, 23, 24 과 요일 5:3 및 요이 6절에도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면 “율법주의자” 라고 공격합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며 동시에 우리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향한 그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순종할 뿐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즉 “첫 째 아담” 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여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모든 인류는 그로 인하여 죄 중에 출생하여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즉 “둘째 아담” 은 에덴에서 첫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계명을 모두 지켜 주셨고, 그의 수동적 순종으로 죄 값은 사망인데 우리가 죽을 대신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그가 이룬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롬5:8).

오늘 본문 갈라디아 4장을 보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 스승을 따라가면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 말씀이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만 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주를 믿는 모든 백성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무엇을 해서 그 댓가로,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얼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거나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십일조를 많이 해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환상을 보아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거듭난 다음 자생적(自生的, spontaneously)으로 생겨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공로도 어느 정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크게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은 한 낱 “더러운 걸레” 에 불과합니다 (사 64:6).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애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장하여 성년이 된 사람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주방에서 어린애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따라 다닙니다. 어린애 눈에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장한 어린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그림자를 따르지 않고 어머니의 치마를 붙잡고 어머니믈 따라 다니게 되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율법과 은혜 의 관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관계를 잘 못 해석하여 성도들을 오도하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어린애와 종의 비유로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린애는 미숙합니다. 다른 사람의 보호가 필요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율법아래 있으면서 율법의 종노릇을 했으나
이제 성인이 되면서 그 신분이 변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성장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20:28 에는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 주신 백성의 대속 물로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죄인의 죄를 대속하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야 그 죄인의 죄가 용서 되는데 보통 생육방법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죄인인 까닭에 죄인이 죄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인성을 덧입고 오셔서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신성에 인성을 덧입으신 분> 입니다. 그가 성육신할 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다나시우스 신경“ 이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만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계시면서 인성으로는 우리들과 성정이 같아서 시장하면 음식을 드셔야 하고 졸리면 주무셔야 합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고후 5:21).

오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대개 “사도신경” 을 사용하지만 “사도신경” 을 사용하지 않아도
다른 개혁주의 신경을 사용하면 “사도신경”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니케아 신경” 도 좋고
“콘스탄티노풀 신경” 이나 1996년에 나온 “캠부릿지 선언” 도 모두  좋습니다. 1998년 필자가 부흥희를 인도했던 San Francisco Bay 의 Reformed Church 에는 방송국 직원들이 많이 모이는 개혁교단에 속했다가 교단이 잘못되어 교단을 탈퇴하여 독립한 교회였는데 예배 때에 당회에서 만든 독자적인 신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단” 으로 착각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단 교회” 와 “정통교회” 를 판가름하는 표준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있는가?  둘째, 성례식이 바로 행해지고 있는가?  셋째 권징이 바로 시행되는가?
등으로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참 교회“ 라고 주장하지만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례식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 (오늘은 대부분) 는
권징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는 “거짓 교회”입니다.  성도들의 성경지식이 해박하여 교리를 바로 알아 "참 교회“ 와 ”거짓 교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거짓 교회에는 구원이 없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요리 문답“ 제61문에 “복음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라고 가르쳐 줍니다. “무형교회” 란 “중생한 성도의 무리”를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언급합니다. 교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한다고 모두 구원을 자동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받은 장소나 시간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삶” 을 누립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한 삶을 살며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거짓 없이 이런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구원을 얻은 자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교회에 내왕하는 자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율법아래 있던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앞으로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 되었으니 유업을 잇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했다” 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여러 가지 이방신들을 말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우리의 속량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들이 이제 자유를 얻었는데 왜 다시 예수를 알지 못할 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바울의 논조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교훈 입니다. 오늘도 기독교교계에 이런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주의 깊게 눈 여겨 보십시오.

본문 10절 이하에 “날을 지킨다”는 말은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킨다는 말이고, 달은 월삭을 말하는데 초생 달이 뜨면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절기란 유대인들이 일년에 고정적으로 지키는 절기를 말합니다. 해란 희년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만히 들어온 유대교 주의자들이 바울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골 2:16-17을 보세요.  갈라디아 4:12절에서 바울은 “너회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란 말은 옛날에 바울이 사울이던 시절 얼마나 열심히 유대교에서 만든 유전을 지켰습니까?  바울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 라고 빌립보 3:6에서 회상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회심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와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간청합니다.

13절 이하에서는 바울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육신의 어려움을 당하면서 말씀을 전할 때에도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하여 바울을 잘 돌보아주어 감사 하다는 과거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달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바울을 따랐으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란 말을 썼을까요?  갈라디아 사람들은 은혜를 누리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바울을 천사처럼 아니 그리스도처럼 따르며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주님의 종이 말씀을 바로 전할 때 성도들이 취할 태도이며, 오늘날처럼 “양의 가죽을 쓴 이리” 같은 거짓 지도자를 향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짓 지도자는 그 말과
그 행위가 일치 하지 않습니다. “애국" 하자고 설교하고는 ”반역적“ 행위를 합니다. 말씀을 혼잡케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고후 3:17의 ”kapeleuo" 를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에는 “혼잡케하여” 라고 번역되었으나 원래의 의미는 “협잡으로 이익을 챙긴다” 는 말입니다. “말씀을 혼잡케 한다” 라는 고후 3:17의 말은 “예수를 팔아 치부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못된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들 옆에 배회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16절 이하에서 다시 바울은 타이릅니다. 저들 즉 “유대교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바울로부터 이간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니 조심하라” 는 경고의 말입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가하지만 목적이 악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잘못이란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하면서 해산하는 것 같은 고생을 했는데 이제 쉽게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려고 하는가 하면서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모습입니다.

II 4:21-31절 까지의 내용을 보도록 합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이 거짓 선생의 꾀임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은 사실을 잊고 율법의 모든 계율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제 21절 이하부터는 <그리스도 인의 자유의
성질>을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들어서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 이하에서 하갈과 사라의 비유는 참으로 적절합니다.  육적으로 태어난 이스마엘과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을 비교하면서 이스마엘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의 자녀이고  이삭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약속의 자녀 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자연발생적으로 우리의 생각대로 혹은 율법을 지켜서 그 댓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하갈과 사라 등 두 여인을 “두 언약” 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고 윱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자의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본처 사라는 계집종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사를 잇게 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났으나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 아니고 인간의 뜻으로
난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으로 난 이스마엘이 아니고 ”내 언약은 명년 이 기한에 태어날 아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나님이 약속 하셨습니다 (창 17:19-21).

이와 같이 기독교의 구원의 역사는 모두 처음서부터 끝까지 “언약” 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옛 언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워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주시는데 이것은 모두 언약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피를 흘려 그 언약을 지켜 주셨기 때문이며 언약이란 말 즉 히브리어 의 “베이맅”
(berit) 란 말은 또한 “유언” 이라는 의미도 가지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심으로 유언의 효과를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 (혹은 약속) 을 중심으로 되어 지는 구원의 파노라마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경적인 구원체계는 Covenant Theology (언약신학, 혹은 계약신학) 이며 이것이 곧 우리가 사랑하는 개혁주의 신학 (Reformed Theology) 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왕국”을 중심 사상으로 하는 “세대주의 신학 (Dispensational Theology) 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사” (God's Redemptive History) 에 기초를 둡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Creation" (창조), “The Fall” (타락), “구속” (Redemption) 이 신학의 연구 주제가 됩니다. 그러기에 두 신학체계는 서로 충돌하고 평행을 달리며 신학을 하는 각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옛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Loraine Boettner 교수의 “Studies in Theology” (신학연구) 라는 책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25절에서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율법을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곳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감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율법이 늘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율법의 목적이 우리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 울법을 모두 지킬 수 없으니 나를 대신해서 모든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 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를 믿도록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갈 생활의 규범 (norm) 이 되는 것입니다. 하갈은 종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약속을 통해서 자유한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두 여자를 두 언약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영적인 예루살렘을 말하고 땅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주의를 신봉하는 율법주의로 묘사합니다. 여기는 모두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 가 사는 곳 즉 <새 예루살렘> 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어머니> 라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말할 때는 비단 승리의 교회의 관념만 아니라 그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 사는 곳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저 바울은 이사야 51:4 말씀을 인용합니다.  잉태하지 못하고 따라서 해산의 고통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편 있는 자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많다는 말인데 이 말은 바벨론 군대에게 자녀를 빼앗겨 자녀들이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의 어머니들에게 이사야가 약속하는 말로 지금은 애들을 모두 바벨론에게 약탈 당하였고 아이가 없지만 결코 하나님은  버리지 않고 바벨론에 아들딸들이 잡혀가지 않은 다른 사람 들보다도 더 창성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서 28절에 “우리는 약속의 자녀” 이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임으로 이런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에 가서 보면 “육으로 난 자” 즉 이스마엘이 “영으로 난자” 즉 “약속을 따라 난 자” 다시 말하면 이삭을 핍박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3살되어 젖을 떼던 때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던 일을 말 합니다 (창 21:8-9). 이삭과 이스마엘은 14살 차이로 이스마엘이 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이삭은 3살이고 이스마엘은 17세 였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율법을 따라 육적으로 종의 여인에게서 난 종이고 이삭은 영적으로 약속을 따라 자유한 사라에게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인데 유대교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을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지만
누가 아브라함의 참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율법을 따라 육적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의 자녀인가? 아니면 약속을 따라 영적 자손인 이삭의 자녀인가?  롬 2:28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30절 말씀은 계집종의 아들이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케 하는 약속의 자녀임으로 유대교주의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두 개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바로 이해 못합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인간과 엄숙히 세운 약속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도록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 언약을 모세와 세우셨고 새로운 언약을 그리스도와 세우셨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언약을 확증했습니다. 옛 언약 즉
모세의 언약은 율법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율법에서 하나님은 약속하기를, “무엇을 할지어다. 무엇 무엇을 하지 말지어다” 란 말로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은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새로운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지고 “내가 무엇 무엇을 하겠노라” 라고 하나님이 백성에게 몸소 약속하십니다..

본문에서는 두 언약만 아니라 두 예루살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누가 유대백성인가?  옛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둘 다 “예루살렘”입니다. “옛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현재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 이고 ”새로운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위에 있는 영적인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과  하갈과 사라 두 여인은 각각 두 언약을 상징하는데 하갈은 이 땅의 예루살렘으로 율법으로 인한 ”옛 언약“의 백성을 상징하고, 반면에, 사라는 ”윗 예루살렘“으로 약속으로 인한 새로운 언약의 백성을 말하면서 본문에서  ”윗 예루살렘“은 ”어머니“ 이니 모든 ”약속의 자녀들“ 즉 민족을 초월하여 언약의 모든 자손들의 공통되는 어머니가 되고 그들이 영원히 거할 곳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묘한 진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두 여인과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공부한 것을 복습하면,
1.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왜 유대교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 가는가? 라고 책망하면서 날, 월삭, 절기, 해를 지키는 일들이 잘 못되었음을 탓하고,
2. 유대교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좋은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지만 악한 목적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저들 유대교주의자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으니 주의 하라는 말과
3. 유대교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바르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두 아들이 있었고 두 어머니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을 따라 종의 여인에게서 난 종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이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었다. 이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언약으로 비유가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적으로 난 옛 언약, 그리고 사라와 이삭은 약속으로 난 그리스도인들이며 둘 다 예루살렘 (믿는 사람) 이지만 이 땅의 예루살렘은 현재 유대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 새 예루살렘은 모든 믿는 사람의 어머니인데 이는 약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말합니다.
4. 옛날 이삭이 3살 때 젖을 뗄 때 17살 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듯,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도 윱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교 주의자들이 약속의 자녀(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 을 핍박했다.  21세기 오늘에 와서도 참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은 외부 불신자가 아니라 소위 “믿는다”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 들에게 참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삭을 핍박한 것은 불신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이었습니다.  항상 참 성도에게 닥치는 악랄한 핍박은 믿는다고 하는 “사이비 신자” 에게서 온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 세계 도처에서 “참 성도들” 이 얼마나 핍박을 받는지 보십시오.   어떤 환난과 핍박도 참아야 합니다. 오늘 갈라디아 4:27 절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굳건히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갈라디아 서 5장을 같이 공부하겠으니 충분히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갈http://tulipministries.com/bbs/view.php?id=theolog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0라디아 서 강해 #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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