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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서 강해 (6)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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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서 강해  (6)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제5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 서 제4장을 통해서
1.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왜 유대교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 가는가? 라고 책망하면서 날, 월삭, 절기, 해를 지키는 일들이 잘 못이라는 점,

2. 유대교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좋은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지만 악한 목적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저들 유대교주의자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으니 주의 하라는 말과

3. 유대교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바르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율법을 따라 종의 여인에게서 난 종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이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었다. 이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언약으로 비유가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적으로 난 옛 언약을 말하고, 사라와 이삭은 약속으로 난 그리스도 인들이며 둘 다 예루살렘 (믿는 사람) 이지만 이 땅의 예루살렘은 현재 유대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 반면에, 새 예루살렘은 모든 믿는 사람의 어머니인데 이는 약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말한다는 것과

4. 옛날 이삭이 3살에 젖을 뗄 때 17살 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듯,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도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교 주의자들이 약속의 자녀(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 을 핍박했다.  21세기 오늘에 와서도 참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은 외부 불신자가 아니라 소위 “믿는다”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 들에게 참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삭을 핍박한 것은 불신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이었다.  항상 참 성도에게 닥치는 악랄한 핍박은 믿는다고 하는 “사이비 신자” 에게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런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제5장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할 수 있습니다.
1. 5:1-15 참 신앙가 거짓 신앙
II. 5:16-26 영과 육의 싸움

I. 갈라디아 5:1-15 을 공부합시다
  갈라디아 5:1-15에서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건이나 사람에 거짓과 진짜가 있듯 신앙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진짜 신앙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참신앙” 과 “가짜 신앙‘을 구별하는 법을 비우고 나의 신앙이 ”진짜 신앙“ 인가 아니면 ”가짜 신앙“ 인가를 철저히 규명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내 구원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건이 가짜라면 그것은 별문제가 안 됩니다. 죽으면 그 물건은 필요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영원히 사느냐 지옥에서 여원을 의식이 있는 상태 속에서 고통을 받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에는 가짜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신앙> 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쉽게 말하면 성경적인 신앙입니다. <신앙> 이라는 것도 신학자나 목사에 따라서 달리 해석하기 때문에 많은 혼동이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여러 번 읽어서 성경전체의 흐름을 알게 되면 혼동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신학자가 아닌 보통사람이라도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면서> 연구하면 이해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무슨 난해한 철학 서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신학에 속지 말아야하는데 속지 않으려면 본인이 성경을 바로 연구하여 <비진리>와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식견(識見) 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무슨 신비주의적인 계시를 받거나 책을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얻어지는 무기와 탄약 즉 성경지식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 을 논하면서 바울은 말씀을 “성령의 검”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싸움엔 무기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집에 찾아와서 공격할 때 여러분들이 성경지식이 부족하여 즉 무기가 없어서 얼마나 낭패를 당했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말씀으로 교통하며 교제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도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와 교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환상이나 계시를 받아서 교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설교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을 “아전인수 격“(我田引水格)으로 이용하여 전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듣게 됩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을 전하는 웅변술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중심이고 그 말씀은 목사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에서 설교자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에게 그런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목사는 남을 섬기는 자인데 말씀을 바로 전할 때 ”배나 존경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목사나, 가장이나 대통령은 복종할 필요가 없고 공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주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란 말은 <주님의 뜻에 맞게> 란 의미이지요.

참 신앙을 추구하려면 참 신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 함> 이 율법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하는 <참 신앙> 은 구원이란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도 아니고, 선행이나 공로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되어 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흔히 우리는 “내가 아무 공로도 세운 것이 없으니 어찌 구원을 얻겠는가?” 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는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다른 종교들은 모두 “자율적 종교” (自律的 宗敎)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율적 종교” (他律的宗敎)입니다. 가령, 불교는 스스로 수도(修道) 하여 “깨달음" (Enlightenment) 에 도달한다고 팔정도(八正道), 사성체 (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십이인연(十二因緣) 듣을  가르치면서 ”무" (無, void) 에 이르려하는 무신론적 철학 사상입니다. 불교에는 “신” 의 개념이 없습니다.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 힘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사람은 모두 “죄로 죽은 상태” 에 있기 때문에 (엡2:1)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일깨워주어 구원해 주셔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바로 배워서 참 신앙을 터득했는데도 불구하고 잠간 방심하는 사이에 “거짓 선지자들” (여기서는 유대교의 전통을 주장하는 유대교주의자들) 에 속아 넘어가 다시 행위로 구원을 얻고 저 안식일도 토요일에 지키고, 먹는 것도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못 먹고, 비늘이 없는 생선도 못 먹고, 월삭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는 등 유대인들이 하는 일을 다시 답습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장래일의 그림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철폐 했습니다 (골 2:16-17). 만일 구원이 이런 일을 해서 되어 진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울의 욧점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이 욧점을 놓지면 안 됩니다.

<유대교주의> 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문제가 큽니다. 이들이 할례를 강요한 것은 위생상의 이유가 아닙니다. 종교적 이유에서 입니다. 오늘도 종교적인 이유로 할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바로 바울이 경고하는 갈라디아 사람 같은 신앙이며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또 구원을 위해서 돼지고기를 금한다든지 오징어나 낙지 같은 생선을 금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할례를 받건 안 받건 그것이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할례를 받거나 음식을 가려서 먹는다는 사실은 구원은 그리스도로 족하다는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우리는 온전히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은 바로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을 생활의 지침서로 삼고 생활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성경전체가 우리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율법의 세 가지 목적중 하나가 율법은 우리의 <생활 규범>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살아가는 “규범” (norm)입니다. 인간의 삶의 표준은 성경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아 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본문 갈라디아 5장에 보면 바울이 핍박을 받는 이유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저들과 타협하고 저들의 의견을 따라가면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신비주의가 무성한데 그런 신비주의 신앙을 따라가면 남에게 비난 받을 일도 없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은 “바른 신앙”즉, “구원에 이르는 신앙” 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난을 마다하고 로마 성 밖에서 목베임을 당해 순교할 때까지 온갖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진리의 복음” “참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면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귓맛 좋은 말”만 듣기 원합니다. 극장처럼 악극단처럼 세속적인 기분을 만족시켜주면 좋아 합니다. 타락한 세대의 적나라한 모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런 것이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갈라디아서에서 웅변으로 가르쳐 줍니다.

갈라디아 5:13-15절에서 5:1 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함”을 강조합니다. 무슨 자유입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요 8:32).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요14:8).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여기서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도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여 고민하는 양심의 자유에서 해방되었다> 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의 노예에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길에서 우리를 지유케 하여 이제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Solus Christus), 오직 믿음을 통해서 (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Sola Gratia Dei) 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여기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말하는 “자유”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또한 갈라디아 2:20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문자 그대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자기도 죄인으로 멸망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결과로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롬 6:1-7 에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하여는 자유하나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는 종으로 살아가는 <섬기는 자> 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6:1에서 바울은 “서로 짐을 나누어 지라“ 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있느냐?” 라고 물었는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하나님에게 대항했던 가인의
변명을 비성경적입니다 (창 4:9).

그러므로 갈 5:1-15까지에서 말하는 <거짓 신앙>이란 천주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이 어느 정도의 공로를 세워야 한다” 고 가르치듯, 사람이 어느 정도 율법을 지켜서 그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고, 한편, “바른 믿음” 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우리 대신 완전하게 지켜 주셨으니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이고 또한 “참된 바른 믿음”입니다.


II 갈라디아 5:16-26 는 영과 육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신학적으로 “이분법” (Dichotomy)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신, 혼 신> (身魂神) 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삼분법” (trichotomy) 라고 합니다. 삼분법을 주장하는 분들은 살 5:23의 ”영과 혼과 몸“ 을 증거구절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창세기 2:7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라고 가르쳐 주는데 여기는 육신과 영혼 둘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13개의 편지에서 항상 “영” 과 “육” 을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몸(육신, soma) 는 보이는 물질이고 “영(psuche)" 는 보이지 않는 비 물질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그의 형상대로 “지식,” “의” “거룩함” 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엡4:24; 골3:10).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차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그런 책임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보호하며 이용하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extinction). 동물들에게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귀중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 있는 영과 육의 생각은 늘 충돌합니다. 불신자들도 선행을 할 마음과
악한 일을 할 마음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이 그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주신 조물주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조물주가 심판하실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심판 날에 “몰랐다” 고 핑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20; 롬 2:14).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쉬운 것은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니 <빛 가운데 행하는 천국의 시민> 이므로 죄와 는 상관이 없는 완전한 성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만 이는 잘 못된 구원관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앞서 구원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과거면, 현재면, 그리고 미래면입니다. 과거면에서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으니 언제 죽어도 성도는 하늘나라에 갑니다.  

현재면에서보면, 아직 성도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까닭에 사탄과 싸워야 하고, 내 자신의 <육의 생각 Carnal Mind>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회심이나 칭의, 양자 등은 모두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성화’ 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해 가는 <과정>  (process) 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미래면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면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듯,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참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고, 불신자와 신자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모두 영원한 불못(Lake of Fire) 에 사탄과 함께 던져 버리고 참 성도는 신천지에 영원히 사는 날, 곧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날
(Day of Final Consummation)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 마음이 주님의 왕권으로 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아직도 미래에 속하는 것은 아직 사탄이 살아 있고 내가 아직도 육신을 쓰고 있어서 죄를 짓기 때문에 성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죄와 싸우고 내 자신과 싸워야 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이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Schon aber noch nicht" (Already but Not Yet, 이미 도래했으나 미래에 속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화란의 신약신학자 Herman Ridderbos 바사입니다. 그는 2008년에 소천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의 현재면에서 성화의 과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영과 육의 충돌을 보도록 합시다. 여기에 대해서는 로마인서 7장이 잘 설명해 줍니다. 회심한 후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는 바울은 로마인서 7장에서 “속 사람 [부활한 영혼] 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의 몸에 또 하나의 지체가 있어서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못하게 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 라고 고민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과 육의 대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활한 영혼” 과 아직 “부활하지 못한 육신의 생각” 과의 갈등이 성도들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회심한 즉시 거듭난 영혼은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부활하지 못한 육신 (육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짐) 와의 싸움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계속 합니다. 즉 <성화의 과정, process of sanctification>이 죽을 때가지 지속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갈라디아 5장 후반부 16절부터 26절 까지는 이 영과 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영과 육이 대결이 지속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육의 생각이 점점 영의 생각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성숙해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는다> 는 사실입니다.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거듭난 사람은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않는데 반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 즉 입으로만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마음대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면 어떤 분들은 자유분방해 집니다. 구“원을 얻었으니 마음대로 살자” 는 생각이고 어떤 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삽니다. 전자는 "도덕폐기론자" (antinomian)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가르침은 구원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웃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면서 서로 서로 섬기며 “종" (servant)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에도 아직 옛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고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가 거룩해 지는 것은 순연히 성령의 도우심 때문인 것입니다. 부활한 영혼과 아직 부활하지 못한 육신은 늘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생각은 서로 다릅니다.  이 둘은 항상 서로 충돌하여 마음속에서 갈등을 빚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을 따르면 생명이 있지만 육신을 따르면 멸망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육으로 심으면 육신을 따라 썩을 것을 거두고 영으로 심으면 영을 따라 생명을 거둔다고 하면서 심는 대로 거둔다고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성품은 가리어져서 잘 보이지 않고 잘 나타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언사, 행위는 남이 잘 볼 수 있도록 밖으로 환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5:19절 이하에 여러 가지 육신의 죄악 중에서 나오는 열매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대개 네 가지 종류인데 음란에 관한 것, 종교에 관한 것, 사회생활에 관한 것과 음주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육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반면 5:22부터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의 9가지 성령의 열매가 열거 됩니다. 세 가지 종류인데 하나님에 대한 태도, 남에 대한 태도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태도를  9가지 열매로 나타내 줍니다. 우리는 이런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를 그냥 내 버려둔다면, 우리가 하고저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롬 8:26).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 살면, 우리 육신의 생각을 만족시키는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물론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 그런 유혹을 피할 수는 없지만 부단히 싸우면서 죄를 피하려는 노력을 경주(傾注)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복습한다면,

1.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있는데 참 신앙은 성경대로 믿는 신앙이며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앙이다.  본문에서 보면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아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는 신앙이다.
반면 거짓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믿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내 이성(理性)에 입각하여  어떤 공로를 세우거나 어떤 율법을 지킨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믿음이다.

2. 우리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회심한 후 성도는 부활한 영혼과 부활하지 못한 육신의 생각이 일생동안 서로 싸우는데 바른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영의 생각이 육의 생각을 제어하고 점 점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갈라디아 서 6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갈라디아 서 강해 #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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