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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이며 영적인 빛(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1. 12. 8. 09:18

본문

신적이며 영적인 빛(조나단 에드워드) 

 

(마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음에 전개될 일에 대해 말문을 열고 상황을 전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 다른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제자들의 답변을 통해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은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지를 물으셨습니다. 언제나 열정적이고 앞으로 나서기 좋아하는 시몬 베드로가 제일 먼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이 본문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복받은 사람이라고 선언됩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네가 알고 있으니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너는 아주 행복하다. 왜냐하면 네가 방금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눈이 멀어 있고, 어두운 가운데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엘리야라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를 예레미야라 생각하며, 또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바르게 생각한 사람이 없고, 그들 모두 틀렸다. 그런데 너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특별하게 진리를 알고 있으니 너는 복받은 사람이다.’

베드로가 복받은 사람이라고 선언되는 증거는 오직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복을 받은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른 무엇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너는 얼마나 복을 받은 자냐! 지혜 있고 힘 있는 자들,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과 나라 전체는 어두움 가운데 있어 잘못된 생각에 이끌려 살아가지만 너는 혼자 선택을 받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구나.’

둘째, 또한 베드로가 복을 받았다는 것은 베드로가 알게 된 지식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계시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너무 높고 탁월해서 다른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 너는 복을 받아서 하나님만이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지식을 알게 되었다.’

이 지식의 기원이 여기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양면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은 여기서 이 지식의 창조자로 선언됩니다. 소극적으로는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은 이 지식을 계시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지식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이해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학문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지혜나 사람들이 세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알게 된 지식이나 기술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이나 직조 기술 등의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그들에게 충만하게 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8장3절).

하나님은 모든 지식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죽을 인생들도 이 일시적인 세상에 속한 인간적인 예술과 학문 그리고 기술 등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수단으로 전달되는 지식의 창조자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지식의 중계자 혹은 이차적 원인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식을 자연적인 수단의 능력과 영향력을 통해 전달하십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17절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런 영적 지식을 창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다른 어떤 존재도 이런 지식의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이런 영적 지식을 계시해 주시며 인간은 이런 지식을 계시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지식을, 다른 지식과 같이 자연적인 이차적 인을 간접적인 수단으로 삼지 않고, 직접 계시해주십니다. 본문의 앞에 나오는 내용들은 이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그리스도의 물음에 대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오해하며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에게 이 계시를 해 준 분이 혈육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 줍니다. 만일 이런 지식이 자연적인 원인이나 수단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가난한 어부요, 무식한 사람들이며,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반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들, 다른 문제에서는 아주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에서는 무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와 계시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 자연적 수단으로 획득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주입해 주시는 영적이고 신령한 빛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다음의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첫째, 이 신적인 빛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 합니다.
둘째, 이 신적인 빛이 자연적인 수단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직접 주시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셋째, 이 교리가 진리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간단한 적용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 신적이고 영적인 빛이 무엇인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신적인 빛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자연적인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 이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부과된 죄의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빛 또는 감각에서 생깁니다. 어떤 죄인들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죄책과 비참함을 더 크게 깨달았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진리에 대한 빛 또는 이해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빛과 깨달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교리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신적이고 영적인 빛의 전달보다 자연적인 것이 더욱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단지 자연적인 원리를 보조하는 것이지, 어떤 새로운 원리를 주입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 은혜는 본성에 보조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라는 점에서 특별 은혜와 다릅니다. 일반 은혜를 통해 얻게 되는 빛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이며, 사람이 전적으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할 때, 단순히 인간 본성이 얻게 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 은혜는 단지 영혼의 기능을 도와서 본성적으로 하는 것을 조금 더 잘 하게 합니다. 즉 자연적인 양심이나 지성은 사람이 잘못을 범했을 때, 단순히 본성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고소하고 정죄를 할 것입니다.

양심은 사람에게 자연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자연적 또는 본래 하는 일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을 주고, 지성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 사이에 있는 상벌 관계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도 때로 양심을 깨닫게 하셔서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보다 이런 일을 더 잘 하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새롭게 하고 성화시키는 사역은 본성을 초월하는 것인데, 본성적으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기능들은 더 이상 본성의 법칙을 따라서 습관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혼의 여러 기능들은 더욱 자유롭고 충분하게 자기의 기능을 하도록 도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타락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영혼의 기능들이 회복됩니다. 그리하여 시체처럼 죄의 지배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에 무능했던 마음이 이제는 영적인 일에 대해 활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자연인의 마음 밖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음 안에서는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로 활동합니다. 성령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 외부적인 행위자로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비중생자에게 역사하실 때 성령은 그들과 연합하지 않습니다. 비중생자들은 성령의 모든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령 자신을 신자의 마음과 연합하여, 신자를 성령의 성전으로 삼고 신자에게 새롭고, 초자연적인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서 역사하시며 영향을 미치십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나누어 주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령의 고유한 본성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자신을 신자와 연합하시며, 신자 안에 살면서 역사하시며, 신자들의 기능이 행사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피조물에게 역사하시지만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방식으로 활동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창조의 시작 때 무생물 위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장2절)고 기록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많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지만 무생물에 역사하는 이상으로 자신을 나누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람들 안에서 생각을 불러일으키시며, 사람들의 자연적인 이성과 이해력을 도와주시며, 다른 자연적인 기능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의 영혼과 연합하지 않고 말하자면 외부의 객체로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한 영향력 즉 영적인 작용을 하실 때는 특별히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영적’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이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상상력 때문에 생긴 어떤 인상이 아닙니다.

이 빛은 마치 육신의 눈으로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마음에 떠오르는 어떤 인상이 아닙니다.

즉 외적 빛이나 영광 또는 어떤 형태나 외양의 아름다움 또는 어떤 가시적인 물체의 밝음에 대한 상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이런 것에 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빛이 아닙니다. 분명 마음이 영적인 것들을 생생하게 감지하고 신적인 빛의 능력에 크게 감동을 받으면 아마 상상력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밝음에 대한 인상이 이런 영적인 발견에 동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은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인상이 아니라 이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자연인은 자신의 상상력 때문에 큰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마귀가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외적 아름다움이나 가시적인 영광 또는 말이나 음성이나 다른 것에 대한 인상을 준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인상은 영적인 빛에 비해서는 아주 열등한 것입니다.

셋째, 이 영적인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지 않은 어떤 새로운 진리나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나 글로 이미 선행하는 계시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진리와 교리를 제시하는 것은 계시입니다. 이런 계시는 선지자나 사도들이 받았던 것이며, 일단의 열광주의자들이 자신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영적인 빛은 계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교리를 계시하지 않으며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지 않고, 하나님, 그리스도, 다른 세계에 대해 성경이 말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넷째, 사람들이 신앙적인 것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 이런 영적이며 신적인 빛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본래 다른 것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본래 다른 비극적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받은 고난 이야기에 감동받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낭만적인 소설을 읽거나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아도 그 이야기에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화나 동화에 나오는 나라의 행복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에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천국에 있는 복된 상태에 대한 생생하고 웅변적인 묘사에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받은 신앙적 진리에 대한 일반적 신념도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전히 전적으로 세속적이며 악한 사람이지만 신앙적인 것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열정이 있는 사람도 영적인 빛이 아주 결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혈과 육은 영적인 빛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지적 동의의 수준에서 신적인 일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신적인 것들을 영적으로 발견할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들의 신적인 탁월함을 참되게 깨닫는 것이며, 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진리와 실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빛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것들의 신적인 탁월함을 실제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것들의 진리와 실제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에 이르는 확신은 그런 것에 대한 신적인 탁월함과 영광을 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담긴 내용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성경에 담긴 내용의 신적인 영광을 볼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결과입니다.

첫째,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적이며, 최상의 탁월함을 참되게 깨닫는 감각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구속,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역의 탁월함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감각입니다. 이런 것들에게는 신적인 최고의 영광 즉 다른 것들보다 더욱 뛰어나고 우수한 본성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이런 영광은 지상의 일시적인 모든 것들과 크게 구별됩니다.

영적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은 그런 영광을 참으로 이해하며 봅니다. 즉 그런 영광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단지 이성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좋은 분이라는 이성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랑할 만한 것이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평가를 받기에 얼마나 합당한 분이신가 하는 것 즉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낍니다.

선을 알 수 있는 두 종류의 이해 혹은 지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단지 이론적 혹은 개념적 지식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단지 개념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념적인 지식이란 어떤 것을 선 혹은 탁월하다고 할 때 이것을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즉 선 혹은 탁월함이란 모든 사람에게 최고로 유익한 것이며, 선에 마땅한 보상이 따르는 것은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모든 개념적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는 마음의 감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이나 달콤함을 깨달을 때, 마음으로 어떤 것에 있는 실재를 기뻐하고 즐겁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론적 지식은 단지 이론적인 것을 담당하는 기능, 더 정확히 말해서 의지 또는 성향과는 구별되는 지성(understanding)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감각으로 아는 지식은 의지(will), 성향(inclination) ,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꿀이 달다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꿀의 달콤함을 맛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꿀이 달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알지만 아직 꿀맛은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꿀맛에 대한 아무 개념이 없다면 그는 꿀맛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과 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 수 있지만 후자는 자기가 직접 그 사람의 용모를 볼 때만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탁월하다는 것을 개념적이며 이론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머리(head)와만 관계되는 것이나 후자는 가슴(heart)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때, 그것은 반드시 이해를 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 자기 영혼에 달콤하고 즐겁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것의 사랑스러움을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탁월하다고 하는 이론적 개념을 갖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것들의 신적인 탁월함을 이렇게 느낄 때 이런 것들의 진리와 실재를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은 직접적이며, 간접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간접적인 확신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 영적인 감각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마음의 편견이 제거되면 지성은 이런 진리를 이성적으로 논증하는 힘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사람의 지성은 본래 영적인 진리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지성은 복음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편견과 적대감은 진리의 논증이 지성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독교 교리가 신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런 발견으로 인해 적대감은 없어지고, 편견은 제거되며, 이성은 성화되어, 진리에 대한 논증을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이 제자들에게 확신을 준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확신을 준 것과는 구별됩니다.

제자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대단한 지성을 가졌다거나 더 뛰어난 지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탁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제자들의 지성은 거룩해졌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진 눈먼 편견들은 제거되었습니다.

2) 영적인 감각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도와줍니다.

영적인 감각이 생기면 이론적인 개념도 더욱 생생해집니다. 영적 감각은 지성을 더욱 자극해서 지성이 더욱 적합하고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즉 대상을 더 분명하게 보며, 상호 관련성을 더 잘 깨닫게 해 주고, 더욱 주목하게 해 줍니다.

이런 영적인 감각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희미하고 모호하게 되었을 생각들이 이런 감각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한 인상을 받으며, 빛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지성은 더욱 판단을 잘 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에 있는 물체를 볼 때 태양 빛이 환하게 비칠 때 보는 것이 희미한 빛 속에서 볼 때보다 물체의 형태나 상호 연관성을 더욱 잘 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신적인 대상들의 탁월함에 대한 감각이 있는 지성은 이런 대상들을 기쁨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성의 능력이 더욱 발휘되어 더 충분히, 그리고 더 많이 지성의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대상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이 지성의 기능을 자극하고 활발하게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 자체는 기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 더욱 큰 이점을 가지게 되며, 어두움과 기만에서 벗어나서 이성의 고유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적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참되게 깨닫는 감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것들이 진리라는 것을 더욱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확신하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런 것들은 매우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것들은 신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적인 것 또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과는 아주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영광은 아주 높고 커서 분명하게 보이기만 하면 그 신성과 실재성을 분명하게 동의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런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보게 되면 그것이 인간적인 일 혹은 인간이 만들어 낸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조명 받아 생기며, 그 결과 영적인 것들의 진리를 분명하게 확신하게 하는 이런 증거는 일종의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이런 증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 주는 교리들이 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 안에서 신성 즉 신적이며, 초자연적이며, 가장 분명하게 구별되는 영광, 분명하게 보이기만 하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신적인 탁월함을 깨닫는 감각에서 생겨나는 신앙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 구원 얻을 만한 믿음 안에 담겨 있는 참된 영적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지적 동의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이 빛은 직접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이며, 자연적인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자연적인 기능들은 이 빛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자연적인 기능들은 이 빛에 대해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입니다. 지성의 활동이 이 영적인 빛을 받는 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고, 또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사람의 영혼 안에 비추어 주심으로써,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즉 이성적인 창조물로서,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빛은 이런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입니다. 비록 정신적인 기능들이 사용되지만, 이것은 빛의 대상이지 빛을 만드는 원인은 아닙니다. 정신적 기능들을 영적인 빛 안에서 사용하는 것은 빛을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빛을 얻은 결과입니다. 이것은 태양이 떴을 때, 우리가 여러 가지 사물을 보려고 눈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런 대상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빛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것은 외적인 수단이 이 영적인 빛 안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진리의 내용은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를 합당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영적인 빛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없이 빛이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복음이 이 영적인 빛에 사용됩니다. 즉 이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고후 4:4)입니다. 복음은 거울과 같습니다. 이 빛은 복음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이 신적인 빛은 하나님이 직접 부여하시는 것이며 자연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자연적인 수단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수단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분명 결과를 만들어 내는 어떤 이차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적인 빛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빛의 일차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적인 힘으로는 독립적인 빛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구원 얻을 수 있는 교훈의 내용을 지성에 전달해 주는 데 사용됩니다. 이런 내용 전달은 자연적인 힘 또는 영향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한 교리들을 우리 지성에 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머리에 교리에 대한 개념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우리 가슴에 교리가 신적으로 탁월하다는 감각을 주지는 못합니다. 참으로 사람은 말씀 없이는 영적인 빛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이 빛을 만드는 원인이라는 주장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교리가 먼저 마음속에서 깨달아지지 않으면 마음은 그 교리의 탁월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교리나 명제 자체는 말씀으로 전달되지만 그 교리의 탁월함을 보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지성에 전달되지만, 형식적으로 이 빛을 이루고 있는 마음의 감각은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가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성에 전달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이 탁월하다고 깨닫는 감각은 직접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첫째, 이 교리는 성경적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마태복음 16장 17절만 해도 이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만 성경에는 이 교리에 대한 증거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구절들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점에서 불신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본문이 있지만 단지 몇 구절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 14:1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0). 이 지식 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이라고 말해지며, 성도들이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불신자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성경구절에 따르면 이 지식은 정도와 결과에서 다른 지식일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본질과 종류에서도 완전히 다른 지식입니다.

또한 이 빛과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5-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전권특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전담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4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 구절은 명백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적인 최고의 영광과 탁월함을 발견하는 일이 있으며, 이것은 특히 성도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는 이것은 태양에서 발산되는 빛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뜻이 직접 역사한 결과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능력의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과 비교되는 일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음의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 나오는 것처럼 전에는 우리에게 감추어졌던 것이지만 회심할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또한 다음의 시편 119장 18절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자기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무엇을 간구한 것일까요? 그는 장님이었던 것일까요? 그가 말한 ‘기이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창조, 홍수,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것 같은 기이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기이한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명령과 교리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영광의 놀라운 탁월함 또한 하나님의 계시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획, 자비의 언약, 은혜의 길 등에 대한 지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25장14절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또한 신앙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이런 발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여기에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7장 6-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 또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말하는 진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2장 44-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이 함께 나오는 것은 이 두 가지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과 자신이 말씀하신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을 정죄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2장 56-57절에서는 유대인들이 비록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도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또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왜 너희는 참된 탁월함을 깨닫는 감각이 없느냐? 왜 거룩하고 신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느냐? 왜 너희는 하나님의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왜 나의 분명한 신성과 나의 교리를 분별하지 못하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견고하게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변화되실 때 사도들이 보았던 그리스도의 가시적 영광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그 영광은 신적이며 하나님의 거룩과 존귀와 은혜를 드러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한 번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성적으로 확신케 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는 것 역시 이런 확신을 주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은 그 자체로 아주 구별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며, 오히려 더 많이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영적 영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이 그리스도의 영적 영광의 이미지를 보여 주며 혹은 그리스도의 영적 영광을 대표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 영광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보고,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존중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위엄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계속해서 다음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이 교리는 합리적입니다.
첫째, 신적인 것에는 다른 것과는 아주 다르며 아주 초월적으로 탁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우리는 신적인 것, 최고의 존재에게 속해 있는 것들이 인간적인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그런 것에는 하나님처럼 높고 영광스러운 탁월함이 있으며 인간적인 것과는 아주 뚜렷하게 다른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차이점이 눈에 보인다면, 이것을 본 어떤 사람에게 이것이 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증시켜 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영광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지 못한다면 무슨 논리로 이 생각에 반대를 하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하셨던 것처럼, 지금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면, 또는 지금 천국에서 나타내고 계신 것이나, 심판 날 나타내실 영광과 같은 영광으로 세상에 나타나신다면, 이런 영광과 위엄은 그리스도가 신적인 분이시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참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확신시켜 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교리에는 신적인 흔적, 신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확실히 구별되며 이성적으로 우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에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의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에게 직접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쓰신 책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는 아주 다를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지혜, 거룩, 위엄이나 다른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속한 신적인 탁월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비하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말이라도 비천하게 보일 것입니다.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롭게 말할 때,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는 어떤 것 즉 어린 아이가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말보다 분명 훨씬 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8-29절은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니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둘째, 만일 신적인 것에 이런 두드러진 탁월함이 있다면, 이런 것을 보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적인 것의 탁월함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세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신중한 사람일 수 있지만, 신적인 탁월한 것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입니다. 신적인 것에 어떤 탁월함이 있다면 사악한 사람이 이런 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영적으로 오염되어 있고, 혐오스러운 욕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신적 아름다움이나 탁월함에 대한 어떤 맛이나 감각이 있으며 또한 이런 사람의 마음이 아주 순수하고 천상에 속한 빛을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죄가 사람들의 마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 즉 사람들의 자연적인 기질이 시기 , 두려움 , 교만 등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을 때, 사람들의 특정한 자연적인 기질이나 성향이 특정한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맹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셋째, 이 지식은 하나님이 직접 부여하시는 것이며, 자연적인 수단으로 획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있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왜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자신이 만드신 것과 어떤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이런 창조물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어떤 창조물에 대해서도 이런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특별히 이성적이고 지적인 창조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더욱 합리적입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피조물은 다양한 존재의 질서에서 하나님 다음이며, 하는 일에 있어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를 섬기며 영화롭게 하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이성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문제에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직접 드러내실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이런 신적이고 영적인 빛을 인간에게 줄 수 있다는 것 역시 합리적입니다. 하나님이 신적이며 탁월한 특성을 가진 그런 지식과 지혜를 직접 주시며, 이차적인 원인에 맡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영적인 지혜와 은혜는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최고로 탁월한 선물입니다. 곧 이성적 피조물의 최고의 완전함은 바로 이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영원한 유익이 바로 이런 선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의사소통 가운데서 비교적 덜 중요하고 낮은 선물은 이차적인 원인에 맡기고, 이런 가장 탁월하고 신적이며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원인에 맡기기에는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부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이런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수여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이런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수여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물과 유익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장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고, 피조물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빛이 태양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발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적이고 영적인 빛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하나님이 직접 주신다는 것은 아주 합당합니다.

이런 지식과 빛을 자연적인 이성의 능력으로 얻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들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는 것은 이성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감각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데는 참으로 이성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신적인 빛의 주제가 되는 진리에 대한 생각을 소유하는 것은 이성 때문입니다. 이성은 많은 방식에서 간접적으로 유익이 됩니다. 이성 역시 이런 발견의 직접적인 결과와 관련 있습니다. 즉 이런 빛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보는 것은 이성으로 가능합니다. 이성은 이런 빛을 받은 결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성을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인식 기능이 아니라 좁게 추리하고 논리를 통해 논증하는 것에만 한정시킨다면 색채를 인식하는 것이 촉각이 아니며, 음식의 달콤함을 인식하는 것이 시각이 아닌 것처럼 영적인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인식하는 것은 더 이상 이성의 기능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인지하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즉 이런 인식은 이성의 기능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성의 기능은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지 탁월함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어떤 표정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인식하도록 해 주는 것은 추리가 아닙니다. 추리는 많은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데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꿀의 달콤함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것처럼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이성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표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성은 다른 사람에게 꿀이 달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결코 나에게 꿀의 달콤함을 인식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첫째, 이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가장 뛰어난 능력과 학식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보통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얻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만일 복음의 증거가 오직 역사에만 의존한다면 그리고 학식 있는 사람만 이런 역사적 증거를 추론할 수 있다면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확장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도 길고 어려운 논리적 훈련 없이 신앙에 속한 것들의 신적인 탁월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못지않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얻은 증거는 가장 학식이 풍부하고, 논리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논증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욱 좋고 만족스런 것입니다. 또한 어린이들도 지혜롭고 신중한 사람들처럼 이런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계시될 때,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종종 감추어지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7절은 이것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악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둘째, 이 교리에 따라 우리는 지금까지 묘사한 이런 신적인 빛을 우리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우리 자신을 검사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참으로 이런 것이 있다면 또한 이것이 단순한 생각이나 약하고 병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의 변덕이 아니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배웠는지,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또한 우리가 아들을 보고 아들을 믿으며, 또한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복음의 교리를 믿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런 신적인 빛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다음의 것을 고려하기 바랍니다.
첫째, 이것은 어떤 피조물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신적인 지혜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학문보다 탁월합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지식보다 더욱 탁월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조금 흘낏 보는 것도, 은혜가 없으면서도 신학을 이론적으로 가장 대단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지식보다 영혼을 더욱 고귀하게 만들어 주고 품위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지식은 가장 고귀한 대상 즉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런 대상에 대한 지식이 천사들의 가장 탁월한 지식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의 가장 탁월한 지식을 구성합니다.

둘째, 이 지식은 다른 모든 달콤하고 기쁜 것보다 더 뛰어납니다. 사람은 인간에 대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될 때 큰 기쁨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식에서 오는 기쁨은 신적인 빛이 영혼에 비췸으로 생겨나는 기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적인 빛은 가장 최고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 신적인 빛은 마음 속에 있는 영광의 새벽입니다. 고통 속에서 사람을 지탱시켜 주고, 이 험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은 이 빛보다 더 강력한 것이 없습니다.

셋째, 이 빛은 마음의 성향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영혼의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이 빛은 사람의 본성이 신적인 본성을 닮게 해 주며, 사람의 영혼을 다음과 같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지식은 마음의 성향으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던 것을 포기하고 천국으로 향하도록 해 줍니다. 이 지식은 마음을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향하며 하나님을 유일한 소유로 삼게 해 줍니다. 이 빛 그리고 이 빛만이 영혼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줍니다. 이 빛은 마음을 복음과 일치시키며, 복음에 계시된 구원의 계획과 반대 되는 복음의 적대적인 세력을 제거해 줍니다. 이 빛은 우리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기쁜 소식으로 환영하며 전적으로 붙잡습니다. 이 빛은 온 마음을 복음에 대해 전적으로 동화시켜 주며, 완전한 신뢰로 복음을 인정하며 온전한 뜻과 열정으로 복음을 붙잡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이 빛은 마음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넷째, 이 빛 그리고 이 빛만이 삶에 전반적인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리에 대한 단순한 과념적인 혹은 이론적인 이해는 결코 이런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빛은 마음의 뿌리까지 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순종까지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것입니다. 이 빛은 하나님이 순종과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빛은 마음속에 참되고 은혜롭고 보편적인 순종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원리인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산출해 냅니다. 그리고 이 빛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상급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포도나무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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