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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란 무엇인가, 2편 : 역사적인 뿌리 (스테판 E. 스몰맨)

스테판 스몰맨

by 김경호 진실 2011. 12. 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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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란 무엇인가, 2편


스테판 E. 스몰맨


역사적인 뿌리

    

개혁된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작점은 종교 개혁 운동(1517-1648년)입니다. 이 잘 알려진 운동은 마틴 루터 목사님(1483-1546년)과 같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의 국교였던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노력으로부터 발전되었습니다. 루터 목사님은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는 의도가 아니였습니다. 그 분은 그저 로마 천주교회의 분명한 오류들을 바로잡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에 가담하셨을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루터 목사님의 항의에는 위엄이 서려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항의는 성경의 진리를 찾기 위한 그 자신의 깊은 연구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 목사님께서는 주님께 신실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반드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그렇게 루터 목사님께서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개혁을 외치셨던 것입니다. 루터 목사님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신념은 결국 1520년에 그 분으로 하여금 로마 교회를 떠나도록 합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 운동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몇 년 후, 루터 목사님과 연계되던 새로운 교회들(루터교회)과 '개혁교회'라고 불리던 스위스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개혁을 주도하던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개혁교회들의 지도자는 제네바 교회의 주요한 교사였던 프랑스 사람 존 칼빈(1509-1564년)이였습니다. 칼빈 목사님의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해서, 심지어 오늘날에도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빈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입니다. 칼빈 목사님은 대개 종교 개혁 운동의 지도자들과 교사들로부터 재발견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체계화시킨 분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그 분의 고전적인 연구서인 <기독교 강요>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1546년에 프랑스 왕에게 보내진 소책자로서 쓰여졌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당시 프랑스의 왕이였던 프랑수아 1세에게 많은 수의 국민들이 믿고 있는 이 새로운(?) 종교가 실제로는 성경을 토대로 개혁된 참 종교로의 회귀임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책자는 칼빈 목사님께서 참된 성경적인 기독교에 대해 더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시면서 네 차례에 걸쳐 개정·증보되었습니다. 1559년에 출판된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비록 칼빈 목사님은 역사 상 위대한 사상가들 중 한 분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결코 스스로를 독창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성경의 가르침과 이전의 위대한 기독교 교사들의 관점에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비추어보시면서 독창성을 띠게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칼빈 목사님의 저작들과 주석들로부터 부상하는 신념은 바로 성경은 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모든 질문에 올바른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칼빈 목사님은 성경을 우리의 시력을 교정하는 안경으로 비유하십니다. 이 안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분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기저에는 칼빈 목사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부르신 원리가 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칼빈 목사님께 성경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불과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 분께 성경은 신학(神學)의 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그 분 자신의 계시이기도 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의 지도자들에게 미친 칼빈 목사님의 영향력은 막대했습니다. 칼빈 목사님께서는 무언가를 주장하실 때 항상 성경을 통해 그 주장의 근거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셨는데, 이러한 방식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칼빈 목사님을 신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 칼빈 목사님의 저작들은 세심하고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기 수월했습니다. 제네바에서 가르쳐졌던 교리들은 학자들은 물론이고 농부들에게조차 호소하는 넓은 매력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칼빈 목사님의 사역동안 수많은 열정적이고 재능있는 젊은 지도자들이 모국의 핍박을 피해 계속해서 제네바로 몰려왔습니다.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그들의 열정에 지식을 더하였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자국인들이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와 개혁된 참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말씀의 교사로서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는 장로교회로, 잉글랜드에는 청교도로, 네덜란드와 독일과 스위스와 헝가리와 폴란드에는 개혁교회로, 프랑스에는 위그노로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가적, 문화적으로는 다르지만, 그들은 같은 가르침으로 긴밀하게 맺어진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낙스(1514-1572년)는 칼빈 목사님의 영향의 한 예입니다. 낙스 목사님은 155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잉글랜드에서 제네바로 망명하셨습니다. 그 분은 칼빈 목사님 밑에서 수학하시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망명자들을 위한 목사로서 섬기셨었습니다. 1559년에 낙스 목사님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신 후, 국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이 되셨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자리잡고 있던 교회들의 신학적인 발전은 바로 이 개혁주의 유산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대서양을 넘어 새로운 식민지들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어느 때는 강요에 의해서) 아일랜드의 북부에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종종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장로교인들이였던 초기 정착민들(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사람들)은 남부와 중부에 모여 마을을 짓고 거주했지만, 몇몇 이들은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의 경계에 마을을 짓고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독립 전쟁(1775-1783)이 일어날 때쯤, 장로교인들은 많은 식민지들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단을 이루었으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는 열렬한 지지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장로교인들은 또한 미국의 영적, 정치적인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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