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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에 대하여(토마스 왓슨)

토마스 왓슨

by 김경호 진실 2012. 5. 26. 12:16

본문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6:6)

죄는 우리의 슬픔의 근원이며, 우리의 위로의 무덤이다. 죄는 죄인의 족쇄이고(행 7:23). 성도의 무거운 짐이다(시 38:3).

작은 죄들도(작다고 치자) 쌓이면 큰 죄가 된다. 모래알보다 더 작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많이 쌓이면, 바다 모래보다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작은 액수도 곱하기를 하면 큰 액수가 된다. 작은 죄도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가 될 것이다. 배에 생긴 하나의 작은 구멍도 살피지 않으면 배를 침몰시키고 만다. 당신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이것은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시 50:22).

오래된 나이와 오래된 죄는 지니고 있기가 서럽다. 뿌리박은 늙은 나무는 뽑아버리기 어렵고, 땔감용으로 베어버리기는 보다 수월하다.

미루는 행위

등불은 가물거리고 기력은 소진한고 이렇게 노년이 다가오면, 그제야 죄를 애통하는 일이 제철을 만난다. 사람들은 다른 면에서는 이런 식으로 타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에 너무 이르다고 말하지 않으며, 재산 모으는 일을 노년에 하겠다고 미루지 않는다. 아니, 이런 분야에서는 만사 제치고 기회를 포착하려 든다. 하나님이 애통하라고 요구하실 때 당신의 귀머거리가 되면, 당신이 긍휼을 애원할 때 하나님은 벙어리가 되실지 모른다(잠 1:24, 28).

당신이 전날에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훗날 에 당신을 심판하실 시간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죄에 대한 참다운 애통은 아무리 늦어도 늦다고 할 수 없지만, 뒤늦은 애통은 도저히 참되다 할 수 없다. 백발의 회개는 여간해서 참 마음이기 어렵다. 폭풍 속에서 선원이 화물을 배 밖으로 던지는 이유는 화물이 아깝지 않은바 아니지만, 화물로 인해 배가 침몰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늦게까지 일하며, 자기 죄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지면, 대부분은 단지 배를 침몰시키지나 않을까 두렵고 지옥에 빠져 죽지나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노년은 회개하기에 좋은 나이가 아니다. 어린 묘목은 뽑아버리기 쉽지만, 뿌리박힌 늙은 나무는 뽑아버리기가 어렵다. 배가 견고하고, 연장도 튼튼하고, 바람도 순풍이고, 바다도 잔잔한 동안, 선원이 닻을 내리고 한가로이 앉아 있다는 것은 매우 우둔한 처사이리라. 그리고 배가 새기 시작하고 폭풍우가 일어날 때, 이제야 돛을 감아올려 항해에 나서겠다 하니, 이 같은 자가 바로 건강과 원기왕성한 시기를 게을리 보내다가, 노년에 되고 연장이 망가지니까 그제서야 천국에 가겠다고 항해에 나서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기력과 골수를 마귀에게 주어 버리고, 그리고 나서야 자기의 늙은 뼈다귀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행위가 얼마나 치사한 짓인가? 노년기에 접어든 죄인은 죽음과 마귀 사이에서 잠이 든다. 건강한 시기에 하나님을 저버리는 그 사람은, 병든 시기에 하나님이 저버리실 것이다.

거짓 평안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눅 11:2)라고 하였다. 이것이 마귀의 평안이다. 마귀는 사람들을 평안의 요람에 태워놓고 흔들어 준다. 사람들이 지옥의 낭떠리지에 처해 있을 때도, 마귀는 평화, 평화라고 외친다. 죄인이 누리는 허울 좋은 평화는 그의 행복의 지식에서 오지 않고, 그의 위험의 무지에서 온다.

참다운 평안은 괴로움 뒤에 온다. 하나님은 죄를 깨우치시어 영혼을 낮추시고, 그런 연후에 평안을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평안을 누리노라 말하거니와, 이 평안이 폭풍 전인가 폭풍 후인가? 참된 평안은 괴로움 뒤에 온다. 제일 먼저 지진이 있었고, 그 다음에 불이 있었으며, 그 다음에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왕상 19:12). 하나님은 상한 마음 평화의 최상품 기름을 부어 주신다.

거짓 회개

많은 사람이 회개한다고 생각하지만 , 실상은 범죄가 아닌 처벌이 그들의 고민거리이다. 반역이 아니라 피의 도끼가 고민이다. 어떤 이들은 눈물 몇 방울 흘리고는 회개한 줄 여기는데, 사울이 다윗을 학대하고서 그랬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6,17). 그러나 이렇게 하고서도 사울은 다윗을 뒤쫓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죄 때문에 소리를 높여 울고도 또다시 그 죄를 쫓아다닐 수가 있다. 어떤 이들은 죄를 버린다지만, 꺼풀을 벗어도 독이빨은 그대로 남은 뱀처럼, 여전히 그들 마음속에 죄를 향한 사랑을 품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였다.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서 낙원에 간다. 애통은 축복이 앞서 가고 위로가 뒤따르지 아니한다면, 논하기가 난처한 주제이리라.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애통도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를 생각하고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죽은 아이를 놓고는 슬피 울 수가 있다. 세상적인 슬픔은 우리의 장례식를 재촉할 따름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고 하였다.

절망적인 애통도 있다. 그런 것이 바로 유다의 애통이었다. 그는 자기 죄를 깨달았고 후회하였고, 그리스를 의롭다 시인하였고 변상도 하였다. 지금 지옥에 가 있을 유다는 요즈음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애통하였다. 그럼 어떤 점에서 유다의 슬픔이 잘못되었는가? 그의 슬픔은 절망과 연계된 슬픔이었다. 그는 자기 상처가 고약의 효력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슬픔은 “생명 얻는 회개”(행 11:18)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슬픔이었다.

위선적인 애통도 있다. 마음이란 매우 기만적인지라, 입 한번 맞추고 배반하듯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배반할 수가 있다. 사울은 애도자처럼 보이고, 또 때로는 선지자들 가운데 있었듯이(삼상 10:12) 참회자들 가운데도 들었던 모양이다. “사울이 사무엘 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삼 15:24)이라고 하였다. 사울은 애통하는 일에도 위선을 부렸다. 그는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명예를 스스로 취하였다.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삼상 15:30)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기 영혼에 대하여 사기행각을 버리다가 위선적으로 슬피 울며 지옥으로 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눈물을 펑펑 쏟는 억지 애통이 있다. 그런 것이 바로 가인의 애통이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하였다. 그의 죄보다 그의 형벌이 더 그를 괴롭혔다. 단지 지옥의 공포 때문에 애통하는 이는, 범죄행위보다 처벌이 무서워 우는 도둑과 같다.

어떤 죄인은 죄의 바로 뒤에 심판이 뒤쫓기 때문에 애통해 한다. 그런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라고 부르짖는다. 탕자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21)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쥐엄 열매 가운데서 굶어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내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습니다”라고 자백한다.

성 오스틴(St. Austin)이 남긴 훌륭한 격언이 있다. “자기가 애통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범한 죄를 참으로 애통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조목조목 자백한다. 부실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도매금으로 자백하며, 자기는 대체적으로 죄인이라고 시인한다. 그와는 달리 다윗은 이를테면 손가락으로 쓰리고 아픈 부위를 가리킨다(시 51:4). 그는 “내가 이런 악을 범하였나이다”라고 지적한다. 내가 악을 범하였나이다가 아니라, ‘이런’ 악을 범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죽는 일은 단회로 끝나며, 한번 죽은 후에는 두 번 다시 죽을 일이 없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무덤에서는 회개할 길이 없다. 만일 그대가 죽을 때 하던 일을 미완성으로 남긴다면, 무덤에는 그 일을 완성할 길이 없다(전 9:10).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두 눈을 주셨으니, 만일 한 쪽 눈을 잃는다 해도 그대에겐 다른 눈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영혼이 단 하나뿐이므로 만일 영혼을 강탈당하면, 그대는 영원히 파멸이다.

무덤은 모든 죄인의 즐거움을 매장한다. 그들은 잠깐 축배를 즐기고, 영원한 보응을 받는다. 시간 자체가 짧은데, 죄짓는 시간이라고 오래갈 수 없다.

죄인들이여, 긍휼의 가동교(밑으로 배가 지나가도록 들어 올려지는 다리로서 도계교라고도 함 -역자주)가 아주 멈추어 버릴 시각이 금방 닥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음으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형집행을 보류하시니, 따라서 사람들도 회개를 덩달아 보류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신다(사 30:18).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죄에 한계를 두지 않으려 하여도, 하나님은 그의 인내심에 한계를 두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2)라고 하셨다. 천사도 외치기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라고 하였다.

벨릭스는 심판에 대한 바울의 설교를 듣기만 하고도 떨었거든(행 24:25),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광경을 죄인들이 보고서야 얼마나 떨겠는가!

하나님이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잠깐 성공하도록 놔두실지라도, 그동안 그의 진노의 대접은 채워지고 있다. 그동안 줄곧 하나님은 칼을 갈으신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이 사람들을 한동안 참으실지라도, 그의 오래 참으심은 절대로 용서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매를 드시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그 만큼 매는 나중에 가서 더욱 혹독하리라. 영원세월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에게는 그의 원수들과 결산하실 시간이 충분하시다.

 

 

 

감동 없는 지식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관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뜨겁지가 않다. 그들의 지식은 달빛과 같다 할까, 빛은 있지만 열은 없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는 지식은 그들에게 아무런 구원의 효력도 취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위선자들의 지식은 죽은 지식, 열매 없는 지식이다. 그 지식의 정보를 제공할지언정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지식은 위선자들을 조금도 개선시키지 못한다.

“네 지혜와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사 47:10)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지식은 그들을 죄 가운데서 더욱 교활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들은 자기들을 지식을 자랑삼을 만한 사유가 워낙 없다. 압살롬은 그의 머리카락이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의 목을 매달아 죽였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 머리속의 지식을 자랑삼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들을 파멸시키게 마련이다. 고대 세계의 많은 사람이 방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다. 적용되지 못하는 지식은 사람에게 지옥에 가는 불을 밝혀줄 뿐이다.

가식적인 거룩

우리의 진실성 없는 모든 과시적인 허식의 거룩은 윤색해서 전시해 놓은 부정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방법으로 지옥에 가는 것뿐이다.
올곧은 사람은 핑계가 없고, 그의 말과 그의 마음이 일치하며, 그는 철두철미 고결하다.
사람들은 명성을 갈망하고, 세인의 신망을 얻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성자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신앙적인 외관과 스타일로 어떻게든 단장하려 든다. 하지만 어쩌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데,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한다면 무엇이 더 나으랴? 자기는 지옥에 가 있는데, 다른 이들이 자기를 지옥에 간 줄로 생각해 준들 그게 무슨 유익이 되랴?

거짓 경건은 이중의 죄악이다. 위선자는 생전에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죽을 때 자기 자신을 속인다. 위선자는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악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허식을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허식만 부리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을 너무 많이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허식만 부리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을 너무 많이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밖에 더 이상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행 26:28).

속빈 신앙고백

만일 사람이 사탄의 형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몸에 지니고 다닌들 그에게 더 나을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진리를 받았으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유리한 점이 무엇인가? 속빈 신앙고백이 구원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정복을 입은 채 지옥에 갈 것이다(마 7:22; 8:12).

종교라는 허울

때로는 탐욕이 양심을 사칭하는 경우가 있다. 유다는 종교의 미명 아래 돈을 가로채려 든다. 그는 “이 향유를 어찌 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하였다.

얼마나 인정 많은 유다였느냐! 그러나 그의 구제는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자기들의 야망을 감추는 가면으로 삼는다.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10:16)고 예후는 말한다. 아니다. 예후여, 그대의 열심은 왕궁을 차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열심이 아니라 국가정략이다. 예후는 왕관을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 종교를 발판으로 삼았다.

사이비 경건은 이중의 죄악이다. 미량의 녹슨 금이 다량의 반짝이는 놋쇠보다 훨씬 낫다. 소량의 차다운 은혜가, 설혹 많은 약점 때문에 무디어 졌더라도, 위선자들의 그 모든 번쩍거리는 겉치레보다 더 선하다.

위선자는 바라보기에 그럴듯하며, 경건한 눈빛을 가졌지만 마음속은 공허하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은 그의 내면이 가장 알차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신망이나 이익과 일치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려 들지만, 여타의 일에선 면제해 주기만 바란다. 에서와 같다고 할까 그는 아버지께 사냥한 고기를 갖다 드리는 일에는 순종하였는데, 필시 사냥질을 좋아한 까닭에 그랬겠지만, 보다 중요한 일 , 예컨대 자기 아내를 선택하는 일에서는 순종을 거부하였다.

위선자들은 폭풍우 속에서는 항해하려 하지 않는다. 참다운 은혜는 혹한의 계절을 견뎌낸다. 별처럼 가장 깜깜한 밤에 가장 밝게 빛나는, 그런 믿음이야말로 귀중한 믿음이다.

피할 수 없는 심판

일단 심판이 선고되면, 그대는 무엇을 할 터인가? 그대는 어디로 갈 터인가? 그대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겠는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대는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구하겠는가? 세상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온 무리가 온통 불바다가 되리라. 성도들로부터? 성도들로 말하자면 땅위에서 그대가 지지리 조소하였다! 그대의 양심으로부터? 양심에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책이 있다. 긍휼하심으로부터? 기간은 이미 만료되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배상을 요구하실 만한 것, 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귀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며, 그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가장 값비싼 향유이다.

부자의 손에 들려진 돈은, 아무리 우리에게 제공되더라도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 우리을 부유하게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덕이나 은총도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믿음은 상처받은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라고 하였다. 참다운 믿음은 언제든지 죄로 상처받은 마음속에 거한다.

의롭다 칭함을 받는 믿음은 기대어 의지하는데 있다. 구원을 위해 우리는 홀로 그리스도만 신뢰한다.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뭇가지라도 붙잡듯이, 가엾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죄인은 자기가 당장 망하게 된 줄 깨달아, 생명의 나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꽉 붙잡게 되며,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

모든 죄 중에서도 불신의 암초를 조심하라. “너희가 삼가 혹 너의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3:12)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술주정뱅이나 저주와 욕, 악담하는 자가 아니기만 하면, 불신자인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불신앙은 복음에 대한 죄이다.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를 마치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훼손시킨다. 불신앙은 죄의 상처를 그리스도의 피의 유약보다 더 확대시킨다. 불신앙은 그리스도께 표명하는 고차원적 경멸이며, 유대인들이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날보다 더 깊이 찌르는 창날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찌나 깊은지 죄인의 낮은 위치까지 낮추시며, 하나님이 긍휼은 어찌나 높은지 구름보다 더 높은 위치까지 높이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악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의 긍휼의 향기로운 꽃에서 독극물을 빨지 말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 하여 계속 죄를 지어도 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하는 것은 긍휼을 당신의 원수로 삼는 소행이다.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죄 짓는다는 것이 마귀의 논리학이다. 긍휼하심 때문에 죄 짓는 자는 바를 만한 약이 있다는 일로 자기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죄짓는 자는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으리라. 긍휼은 악용당하면 격분으로 전환한다. 만일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하면,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신 29:19, 20)고 하였다.

하나님은 긍휼의 보고를 가지셨다. 기도는 이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두 팔로 모시고 나아가라. 모든 긍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삼상 7:9)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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