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을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 We must not on pretext of love of neighbor offend against God )
독자는 이 제목만을 가지고는 이해하기에 어렵고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3권 19장 중에서 게재하는 명제인데 칼빈의 글 중에는 그 난이도를 이해하는데는 수학적 혹은 과학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그 구조가 심층적인 그물 형태를 취하기도 하여, 무엇 아래 (subordinated-후 순위에, to abide under-아래 위치시키다) 등으로 말한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다음 사실을 기억하여 주기를 바란다. 사탄과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또는 우리가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따르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굳세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떤 위험으로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논의(thesis)를 주의 깊게 살펴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지적(知的) 위치(structure)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랑 자체는 믿음의 순수성 아래 위치하고(love itself to abide under purity of faith ) 예속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온전히 믿음이라는 규칙(rule)을 지키면서 그 아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사랑은 믿음 안에서만 허용되고 자유는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을 전제(pretext)로 하나님을 노하시게(offend against God) 할 수는 없다. 이웃 사랑이 피행위자에게 단순히 어떠한 유익을 끼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행위를 인해 또 다른 인식과 학습에 이르고, 혹은 교육되어 진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규칙을 외면한 사랑은 왜곡된 인식을 이웃에게 주입함으로써 그것이 젖먹이의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왜곡되게 학습 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 전자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하거나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따르는 것을 막는 사탄과 세상이 바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믿음을 도외시한 사랑은 그들(이웃)을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견해 속에 빠지게 한다.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죄를 범하고 있다면 사랑의 근거가 어디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이웃의 덕을 세우려고 해야 한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말함으로써 무엇보다 명백한 규칙은, 결과가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자유를 포기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도 자유를 포기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하지만 혹자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순수한 믿음의 원칙을 결코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그가 모든 사랑의 의무를 더욱 잘 감당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독자가 구체적 이해를 필요하다면 이에 대한 예를 기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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