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2장)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3. 09:30

본문

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2장)

<믿음의 견실성을 위해 제안된 죄 죽이기의 필요에 대한 주도적인 역설 - 죄 죽이기는 신자들의 초고의 의무(골 3:5; 고전 9:27) - 내주하는 죄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지상 생애에 있어서 완전이란 없다( 빌 3:12; 고전13:12; 벧후 3:18; 갈 5:17 등) - 신자들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성(롬 7:23; 약 4:5; 히 12:1) - 내주하는 죄가 가득 맺는 엷매와 성향 - 모든 정욕마다 최고도에 이르기를 목표한다. - 내주하는 죄를 대항하여 싸우라고 주어진 성령과 새오운 성품(갈 5:17; 벧후 1:4,5; 롬 7:23) - 죄 죽이기를 게을리 함으로 나타나는 무서운 결과 (계 3:2; 히 3:13) - 전체 강론의 보편적인 제일 원리를 재확인 - 이 의무를 이해하는 것이 부족한 서글픈 현실>

나는 앞에서 강론의 기초를 설정하였으니, 앞에서 언급한 주도적인 추론들을 간단하게 재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간절하게 의도하는 바를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죄를 정죄하는 세력으로부터 분명하게 자유한 참 신자들은 여전히 죄의 내주하는 세력 죽이기를 자기의 책무로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 사도가 누구에게 그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들(3:1),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3절),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고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자들(4절)에게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죽이고 있습니까? 죄 죽이기를 매일의 일로 삼고 있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 항상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루도 쉬지 마십시오. 죄 죽이는 일을 계속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이 이일을 하지 않아도 될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우리 구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열매를 맺는 가지. 곧 모든 참되고 살아 있는 가지마다에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요 15:2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가지는 깨끗케 다듬어 주십니다. 하루 이틀만 그리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가지로 존재는 동안 내내 그리하십니다. 사도는 자기가 그 일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 ‘나는 그 일을 매일 한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일생의 일이다. 나는 그 일을 거르지 않는다. 이 일은 내 임무야.’ 만일 그 일이 은혜의 계시와 기쁨과 특권과 위안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의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높고 탁월하였던 바울이 일과 업무였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 일과 의무에서 면제될 근거를 어디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 일을 매일의 사업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몇 가지 진술하여 보겠습니다.

(1) 내주하는 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항상 우리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내주하는 죄를 항상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킨다거나, 인생 속에서 완전에 이른다거나, 죄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고 완전하게 죽는다는 식으로 어리석고 무지하게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지금 논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혐오스러운 것들을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속한 어떤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네들이 생각하는 그 완전의 정도에 훨씬 못 미친 나머지, 순종이나 보편적인 진지함의 순종에 있어서 부분적인 완전함에 이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 완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많은 이들은 더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완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도 못하는 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확증하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들 보기에 모든 것이 다 같아 보이니 그러한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완전이란 악의 극치입니다. 완전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노라 하던 다른 이들은 본래부터 내주하는 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신령함을 사람들의 육적인 마음의 수준으로 낮추어 조절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신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생명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충분하게 알아내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복음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의를 고안하였고, 육적인 생각을 따라서 허망하게 스스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우리는 감히 기록된 말씀보다 더 지혜로워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선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지 않으신 것을 자랑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주하는 죄가 어느 정도, 어떤 분량으로 우리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감히 “내가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말하지 않습니다(빌 3:12).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고후 4:16). 그리고 새 사람이 새로워짐에 따라 옛 사람이 무너지고 후패해집니다. 우리는 지상에 있는 동안에 “부분적으로만”압니다(고전 13:12).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남아 있는 어두움이 점차 제거됩니다(벧후 3:18). 그리고 육체가 성령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총명에 있어서 뿐 아니라 실천적인 순종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갈 5:17; 요일 1:8). 우리는‘사망의 몸’(롬 7:24)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몸이 죽음”을 통해서 뿐입니다. 지금은 죄를 죽이고 못살게 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으니 죄를 죽이는 일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원수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원수를 강하게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갈 6:9; 히 12:1; 고후 7:1).

(2) 죄는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육신의 행실을 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내버려둔다면 우리도 죄를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아주 가만히 있어 보이는 때에도 사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물이 조용하게 흐르고 있을 때에는 가장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모든 상황, 심지어 죄가 작용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때조차 죄를 대항하여 이길 방도를 항상 강구하고 있어야 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항상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롬 7:23). 한편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십니다”(약 4:5). 그러한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 되는 일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갈 5:17), 정욕은 여전히 유혹하며 죄를 잉태합니다(약 1:14). 정욕은 모든 도덕적 행위 안에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거나, 선한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심령을 분산시킵니다. 정욕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입니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그것이 선을 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같은 원인으로 인해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마땅한 바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모든 거룩한 일들이 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그것이 우리 심령의 안정된 틀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얽매이기 쉬운 죄”(히 12:1)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서 사도는 심각한 고민을 토로합니다(롬 7장). 그러니 그 죄는 항상 활동하고 있고, 항상 악을 잉태하고 있으며, 항상 죄악을 행하게 꼬드기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는 항상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과 하나님을 위한 일만을 해왔으니 내주하는 죄가 손을 내밀어 자기가 한 것을 부패하게 하는 일을 한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어쨌든 간에 내주하는 죄가 그러한 수작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내내 벌일 것입니다. 만일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죄를 항상 죽이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갈피를 잃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항 받지 않은 원수들에게 두 배로 세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복을 당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뻔합니다. 죄가 교활하여 언제나 틈을 엿보고 있으며, 강하여 항상 우리 영혼을 죽이는 작업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미련하여 죄가 가져올 팔멸에 자신을 방임하고 있다면, 어디서 위로 받을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죄가 우리를 뒤엎거나 우리가 죄를 뒤엎거나, 죄가 우리를 이기거나 우리가 죄를 이기거나 하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는 항상 그렇습니다. 죄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타협을 이루어내고 이 싸움의 전투를 중지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면(그 사람이 순종의 영성과 죄의 교활성에 대해서 익히 잘 아는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그 사람은 내주하는 죄 죽이기의 의무에 관하여 자기 영혼에게 “내 여혼아, 편히 쉬거라”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내주하는 죄의 어지럽게 하는 반역적 활동에서 건짐받기를 간절하게 열망하는 성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단한 전투 외에는 그 죄를 이기고 안전하게 설 방도가 전혀 없음을.

(3) 죄는 있는 힘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배역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성가시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곧 부당하게 죽이지 않으면, 그 죄는 저주스럽고 추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악행들을 산출할 것입니다. 사도는 죄의 일들과 열매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죄는 항상 최고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죄는 시험하거나 유혹하기 위해서 봉기하고,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길만 있으면 그런 종류의 현저한 죄를 내려고 착수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부정한 생각과 흘기는 눈으로 음란을 일으키려 할 것이고, 모든 탐욕으로 치달아가게 압박할 것입니다. 모든 불신앙적 생각을 머리까지 키워서 무신론으로까지 발전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기들 마음으로 하는 누추한 말을 죄는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마음의 생각이 어떤 큰 죄로 발전하여 입으로 누추한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모든 정욕마다 그 정욕을 표현할 경로만 있으면 극악한 지경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만족을 모르는 무덤과 같습니다. 죄의 속임수에 빠지면 어떤 경우에도 적은 해만 입게 되는 적이 없습니다. 죄는 사람들이 악심을 품어 강퍅하게 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히 3:13). 말하자면 죄는 처음에는 그 움직임이 유순하고 권유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 동작들을 통해서 일단 사람의 마음에 발 뻗을 틈을 얻기만 하면, 부단하게 자기 터를 일구는 일을 계속하여 같은 방향으로 정도를 약간씩 더 높여 가는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새로운 활동과 전진을 위한 행보를 하게 되면, 영혼은 일단 죄가 마음에 들어온 것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그만큼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거의 유념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의 진행만 없으면 별 큰 문제가 없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영혼이 어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된 만큼 복음이 요구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되고, 그만큼 지각이 무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여전히 더 세력을 얻어 진행해 나갑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까지 나가기 전에는 죄는 끝을 모르고 자기의 일을 진척시킵니다. 죄는 갈수록 도를 높여가서 사람에게 악심을 품게 함으로 자기의 터를 굳히는데, 그것은 죄의 성질로부터 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의 기만성이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죄의 뿌리를 말려 버리고 고개를 내밀면 즉시 타격을 입혀 매시간 그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어디에 목표를 두고 진해하려 하든 간에 차단을 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놀라운 신자라도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저주받은 죄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종류에 속한 어떤 죄를 지었던 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신 주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곧 우리로 하여금 죄와 정욕을 대적할 원리를 갖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성령, 또는 영적인 새로운 성품 안에는 육체를 대적하여 활동하는 한 성향이 있습니다. 아울러 육체 안에는 성령을 대적하여 활동하는 한 성령이 있는 것 같이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1:4,5에서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으로 말미암아 세상 안에 존재하는 더러움에서 피하도록”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이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롬 7:23).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세상에서 가장 불의하고 이치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이 둘이 서로 전투를 벌여 서로 간에 상대를 묶어 두어 힘을 쓰지 못하게 하고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 될 정도까지 나가게 하려 합니다.

둘째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일은 우리의 영원한 상태를 위해서 싸우시는 분을 묶어 두고 우리를 영구히 파멸시키려 추구하며 포학하게 그 일을 진행하는 자를 풀어두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서 성령께 의존하고 새로운 성품을 적용하는 일을 매일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원수를 대적하여 이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지원군을 만홀히 여기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받은 것을 만홀히 여겨 활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길 꺼려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뿐 아니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활용하고 행사하고 장사하게 하려 함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을 매일 같이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을 대적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일을 행할 원리를 갖추어 주신 분입니다.

(5) 이러한 의무에 태만한 것은 사도가 확증한 것과 정반대 조건 속으로 영혼을 던지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이 의무를 태만히 하는 가운데서 속사람은 후패하고 겉사람은 매일 새로워지게 됩니다. 또 그런 경우 죄는 다윗의 집같이 흥하게 되고 은혜는 사울의 집 같이 패하게 됩니다. 경건의 연습과 그 성공은 마음속에 있는 은혜를 소중하게 길러주는 주요한 두 장본인들과 같습니다. 은혜가 고통을 받아 가만히 누워있다면 은혜는 말라지고 후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에 속한 것들은 죽을 자리에 있게 되고, 죄는 터를 굳히고 마음은 강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계 3:2; 히 3:13). 내가 의도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의무를 생략함으로써 은혜는 말라지고 정욕은 번성하고, 마음의 상태는 점점 더 악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이 많은 것과 함께 얼마나 절망적이고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아십니다.

죄 죽이기를 게을리하면 죄는 상당한 기세를 얻어 영혼의 뼈를 부수어 뜨립니다(시 31:10;51:8) 그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약하고 병들과 죽기 쉬운 상태로 몰아가(시38:3-5)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없게 합니다(시 40:12; 사 33:24). 그리하여 그 가련한 사람이 점점 더 약하여지고 상처를 받기 쉽게 되어 더욱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을 맛보게 되고 결국 힘있는 대적을 향하여 결코 분발하여 대항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욱더 굳어지는 상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영혼이 피 흘려 죽는 것밖에는 다른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요이8) 실로 죄 죽리기를 게을리 함으로 맞는 그 무서운 결과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며, 그러한 일을 매일 목격하고 있습니다. 전에 겸손하고 마음이 녹았고 항상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고 민감하고 범죄하기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 있고, 그의 모든 길과 주일성수과 모든 규례를 잘 이행하였던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깨어 이 의무를 준행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영적으로 차가워지고, 성내기를 잘하고, 세상에 속한 이들이나 세상에 속한 일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신앙을 더러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자기를 아는 이들을 무섭게 유혹하는 사람으로 변한 경우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 경우의 진상은 이러합니다. 완고하고 고집이 센 심령의 상태는 죄 죽이기를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습니다. 곧 대부분 세상적이고 율법적이고 냉소적이고 편파적이고 성내기를 잘하고 시기하고 악의에 차고 교만하고, 영적인 자유함과 은혜가 있는 척하는 모습만 띠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참된 복음적 죄 죽이기를 우리 중에서 거의 실종되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합니다.

(6) 주 하나님을 두려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고후 7:1). 또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벧전 2:2; 벧후 3:18). 매일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져 가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의무입니다(고후 4:16). 이러한 일은 매일 죄 죽이기가 실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죄가 매일 우리의 거룩한 행위를 대항하여 자기의 힘을 쓰고 있으며 우리가 자라는 정도에 따라서도 그리합니다. 자기 정욕의 목을 밟아 버리지 않은 자는 자기가 웬만큼 거룩의 진보를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길에서 죄를 죽이지 않는 이는 자기의 순례길의 목적을 향해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의 대항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자, 죄 죽이기를 위해 자신을 준지하여 특별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는 죄와 타협한 사람이지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계속되는 강론의 보편적인 제1원리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개별적인 죄가 가져올 형벌적인 정죄를 죽이기는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처음으로 회심하였을 때 죄의 각성과 죄 때문에 겸비해지고 새로운 원리가 우리 속에 심기워졌습니다. 그럼으로써 보편적으로 죄 죽이는 일의 진정한 기초가 놓여 죄를 대항하고 죄를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여전히 남아 있어 가장 신실한 신자들의 경우에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있어서 평생 죄를 죽이는 일은 부단하게 매일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다음의 원리를 생각하기 전에, 지나치는 방식으로라도 오늘날 많은 신앙고백자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죽이기의 크고 명백한 열매들이 기대되는 이들에게서 그러한 열매를 발견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잎사귀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밝은 빛이 비추었습니다. 또한 많은 영적인 은사들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러 가지의 요점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들이 신앙고백자들과 신앙고백의 양을 확대시켰습니다. 신앙고백자들이나 기독교를 신앙하는 일들이 증폭되었고 증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 각 구석에서 신앙과 신앙적인 의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로 떠들썩합니다. 설교하는 일도 넘쳐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텅 비고 가볍고 천박하고 허망한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은사를 상당히 함축하고 있는 설교들입니다. 그래서 받은 신령한 빛이나 은사나 신앙고백의 정도로 신자들의 수를 측정하면, 교회는 “이 모든 이들을 내게 누가 낳아주었는가?” 라고 말할 이유를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해 내는 이 큰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를 측정하면, 아마 그들의 수가 증폭된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회심이 빛이 주어진 이 시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기며 이전 시대에는 어떤 방도로도 소수밖에는 알지 못하던 영성(靈性)의 평가 차원(나는 그러한 식으로 판단하지만)에서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자기들 속에서 행하신 일을 자랑하는 이들이 어디 있다고 합시다. 그러한 이들 중에 죄를 죽이지 않는 비참한 마음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험악하게 시간을 보내고, 게으르고, 사람들의 자리에서 무익하게 행하고, 시기하고 쟁투하고 서로 겨루고 분내고 교만하고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행실을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표지라면, 우리는 그러한 표지를 정말 많이 달고 다니고 우리 중에 그러한 표지가 넘쳐납니다. 그렇게 많은 빛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희망하기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그러하다면, 종교적인 자들로 자처하면서 복음의 빛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하고 그저 외양적인 문제에서나 때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척할 뿐입니다. 그러한 일은 죄를 죽이는 일의 가장 곁에 있는 가지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마저 실행하는 일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죄를 죽이는 영을 보내신 것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글픈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고백자에게 분명하게 따라붙는 악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 속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부분에 있습니다.

1) 자신 안에 있는 악을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죄에 대해서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그는 매일 연약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죄 죽이기를 하지 않는 자의 생활 경로의 근원을 추적하여보면 죄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아픔을 겪지 않고 죄를 소화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와 자비 때문에 매일의 죄를 아무런 아픔도 격지 않고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런 상상에 자신을 매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위험천만한 벼랑에 서 있는 사람이고, 죄의 기만성으로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거래를 서둘러 해버리는 것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더 큰 증거는 없습니다. 죄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피(요일 1:7; 딛 2:14). 우리에게 회개토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행 5:31). 우리로 모든 경건치 않은 것을 부인하라 가르치는 은혜의 교리(딛2:11-12)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모반이고 결국에 가서는 큰일을 저지르고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배도한 이들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 문 앞에서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 거의는 한 동안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마땅한 바에 자신들을 붙들어 매게 하고 결국 신앙고백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말았습니다(벧후 2:20). 복음의 교리에 친숙해졌다고는 하나 원리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하는 도리에 대에 진력을 내게 되니 은혜의 교리에서 떨어져 여러 가지의 게으름에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러한 악이 그들을 사로잡게 되면 그들은 신속하게 나뒹굴어 파멸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2) 다른 이들에 대해서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두 가지 방면에서 그러합니다.

(i) 다른 이들 보고 ‘너희는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자들과 같은 좋은 조건에 처하여있으니 걱정 말라’는 식의 확신을 그들 속에 생기게 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것이니다. 사실 그러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더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죄 죽이기를 생략해 버리면 그들 속에 가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열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거나 보편적인 의를 견지하는 일은 수반하지 않는 열심입니다. 그들이 방탕한 것은 부인하면서도 세상적인 정신과는 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분리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살고, 땅에서 인내하심을 베푸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들을 영적으로 대화는 하면서도 삶은 헛되게 삽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은 하면서도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따라가고, 죄 용서 받은 것을 자랑은 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불쌍한 이들은 그런 식의 사고방식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거듭나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강퍅하게 굳게 만듭니다.

(ii) 그들은 다른 이들이 자기들이 처한 조건에 이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식으로 믿게 만들어 다른 이들을 속입니다. 그리하여 종교 안에서 평판을 얻는 것을 씨름할 주요한 문제로 여기는 큰 시험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갑니다. 그들 속에 나타나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남들보다 훨씬 더 나아가기는 하였지만 영생에는 미치l지 못했을 경우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요점들과 죄 죽이기를 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악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알아볼 것입니다.

 

 

 

 

http://thevine21.hompee.com/v2.0.asp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