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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4장)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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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죽이기의 유용성의 마지막 원리 -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과 위안은 우리의 죄 죽이기에 달려 있다 - 어떤 의미에서? -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시편 88편, 헤만의 경우 - 다음의 즉각적인 동인은 아니고 - 하나의 방편으로서; 그 반대를 제거함으로써 -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죽이지 않은 정욕의 절망적인 효능; 영혼을 약하게 하되(시 88:3,8), 여러 방식으로 약하게 하며, 영혼을 또한 어둡게 한다. - 죄 죽이기로 말미암아 모든 은혜가 더욱 활성화 된다 - 진지함의 최선의 증거

 

앞에서 말한 원리는 첫째로 생명을 위해서 죄 죽이기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로 죄 죽이기에 생명의 확실성이 달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역설하고자 하는 마지막 원리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생명력과 위로는 죄 죽이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바라는 소원은 힘과 위로와 권능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 중 어떤 사람이 진지한 질문을 받는다면, 바로 다음의 항목 중 어느 하나를 가리키며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게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 힘이나 능력이나 활력이나 생명력이 모자라든지, 아니면 평안이나 위로나 위안 같은 것에 모자란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자에게 떨어지는 몫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이 두 그룹의 항목들 주 어느 하나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지는 말아야 하며, 우리가 불만을 토로하는 날들에 언급되는 것에서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죄 죽이기의 부단한 과정에 상당하게 죄우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주목하며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그러한 것들이 죄 죽이기의 부단한 과정으로부터 발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죄 죽이기의 부단한 과정 자체에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매여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모든 날들 동안에 죄 죽이기의 부단한 과정을 계속 수행하면서도 평안과 위로와 좋은 날 하루를 결코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헤만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시 88편). 그의 삶은 계속 죄 죽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포학을 당하며 상처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헤만을 당신의 최상의 친구 중 하나로 뽑아내시어 후에 같은 곤란에 처할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의 탁월한 종이었던 헤만의 경우에만 아니고 바로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모든 일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을 찬미하는 주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안과 우리를 말씀하시는 것을 당신의 특권으로 삼으십니다(사 57:18,19).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일을 이루리라.” “내가 그를 위로하리라.” 그러나 어떻게 그리하십니까? 새로운 창조라는 즉각적인 일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창조하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얻는 방편을 사용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평안을 부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2) 우리에게 생명력과 활력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방식들 안에서 죄 죽이기는 그 직접적인 동인들 가운데 하나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므로 말미암아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 일은 우리의 영혼에 달려진 일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과 ‘흰 돌’을 주셨음과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여 주신 것을 의식하고 알게 하십니다. 이러한 요점들은 성령의 손 안에서 생명력과 활기와 용기와 위로의 직접적인 동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3)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상적인 과정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일반적인 과정 중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과 위로는 우리의 죄 죽이기에 상당히 좌우됩니다. 그 관계가 불가분해적인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거니와, 서로에게 효과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i) 죄 죽이기를 통해서만이 죄가 영적인 활력과 위로를 박탈해가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죽이지 못한 죄는 어느 것이든이지 반드시 두 가지의 일들을 할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의 일은 영혼을 약하게 하고 그 활력을 빼앗가 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혼의 위로와 평강을 앗아 가는 일입니다.

(a) 영혼을 약하게 하고 영혼의 힘을 앗아 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다윗이 한 동안 죽이지 않은 정욕을 마음에 품고 있을 때에, 그 정욕기 그읭 모든 뼈를 부서지게 하고 영적인 힘을 아주 소진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병들고 약하고 상처받고 파리해져 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내 살이 성한 곳이 없사오며”(시 38:3).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8절). “내가 ....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시 40:12). 죽이지 않은 정욕이 영과 그 영혼의 모든 활력을 들이삼켜 버리고 영혼을 약하게 만들어 마땅한 모든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마음의 정서를 뒤엉키게 만들어 마음 자체가 갈피를 잃고 틀이 깨어지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죽이지 않은 정욕이 하나님과 활력 있는 교제를 위해서 요청되는 영적인 기틀을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서를 붙들고 사모하고 바라는 대상만을 고집하여 주목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요일 2:15; 3:17). 그래서 그 영혼은 하나님께 정직하고 참되게 “주는 나의 분깃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영혼이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만 충만해야하는 영혼의 최고 정서들, 곧 두려움과 바람과 소망이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영혼이 사랑하는 다른 것으로 뒤얽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그 영혼은 자기가 사모하는 그것들에 관한 여러 가지의 궁리들로 생각을 채우게 됩니다. 그 생각들은 영혼의 큰 조달자로서 영혼의 정서를 만족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만일 죄가 죽여지지 않고 마음에 그냥 그대로 남아있다면, 생각들은 육체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을 조달하여 육체의 정욕을 채우게 할 것입니다. 생각들은 육체의 대상들이 빛나게 칠하고 장식하고 옷 입혀 주고,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 대상들을 집으로 들여오게 되어 있습니다. 표현하기 조차 힘든 더러운 상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그 죽이지 않은 죄가 마땅한 도리를 어기고 능동적으로 방해하게 됩니다. 야심적인 사람은 연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정신은 일하고 궁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육욕적인 허망함에 취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도 허영을 위해서 자신을 드립니다.

만일 죽이지 않은 하나의 정욕이 영혼에 가져올 수 있는 그 균열과 파멸과 연약과 황폐함을 밝히는 것이 제 임무라면, 이 강론은 제가 본래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입니다.

(b) 죄는 영혼을 약하게 하는 만큼 영혼을 어둡게 합니다. 죄는 영혼의 얼굴 위를 뒤덮는 두꺼운 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모든 광선을 차단하여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에 대한 의식 전부를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영혼이 위로의 생각들을 더듬어 모아 보려고 시도하기만 하면 죄는 그 생각들을 다 흩어 버립니다. 그 요점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알아 볼 것입니다.

이 방면에 있어서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과 능력은 정말 우리의 죄 죽이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죽이기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과 능력을 저해하는 것을 제거할 유일한 방도입니다. 정욕의 세력 아래서 병들어만 가고 상처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많은 적용을 해봅니다. 자기들의 생각들이 자기들을 압도하여 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거기서 건짐받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처방을 써 보아도 소용이 없고 치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5:13에서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아” 여러 가지의 처방을 써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는(15절) 자기의 범과를 아무 것도 알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병든 것과 상처를 알 수는 있으나 바른 적용을 하지 못하면 치료책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ii) 죄 죽이기는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정결하게 하고, 마음속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들이 자랄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의 생명과 활력은 우리 마음에 있는 은혜라는 나무들의 활성화와 번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습니다. 보배로운 박하를 심어 놓고 가꾸어 주지 않으면 그 옆에서 가라지들이 자라게 됩니다. 물론 좋은 박하가 살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처량하고 가련하고 유익하지 못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자세하게 살펴야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 정도가 될 것입니다. 때로 잡풀들에 가리워 그것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박하가 심기워 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 찾으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라면, 그러한 것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박하가거기 있다고 합시다. 그 모양도 다른 것과 같이 가련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다른 모든 잡초들을 제거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박하는 번성하고 무성해질 거십니다. 그럴 경우에 정원을 바라보며 대번에 그 박하들이 보이고, 필요할 때에 그것을 채취하여 필요한 데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심기워진 하나님의 모든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죄 죽이기를 게을리 사람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빈사상태에 있게 되고(계 3:2), 말라지고 후패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마치 게으름뱅이의 밭과 같습니다.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거기에 곡식이 심기워 있는지 찾아보기가 힘들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도 믿음과 사랑과 열심을 찾으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은혜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정욕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소진되어 미약해져 거의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여전히 거하기는 하지만, 거반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죽이기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정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고 합시다. 정욕의 잡초를 부단하게 매일 제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매일 잠자리에 일어나자마자 그 일을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품이 마치 옥토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은혜가 번성하고 활성화될 여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모든 은혜가 각 역할을 얼마나 훌륭하게 감당하고, 모든 용도와 목적에 맞게 쓰임 받을 준비를 얼마나 잘 갖춘 셈이 될 것입니까?

(iii) 우리의 평안에 대하여 말하자면, 죄 죽이기가 없이는 진지함의 증거를 보여주는 평안이란 없습니다. 그러하듯이 죄 죽이기 속에 있는 진지함 같은 증거를 갖춘 평안도 없습니다. 죄 죽이기는 정말 우리의 평안의 참으로 큰 근거입니다. 죄 죽이는 자아에 대한 영혼의 활력있는 대적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진지함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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