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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3장)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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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3)

믿음의 견실성을 위해 제안된 죄 죽이기를 위한 두 번째 원리 - 이 역사의 유일한 주장자이신 성령 - 교황주의의 죄 죽이기의 허상 - 죄 죽이기를 위해 교황주의자들이 사용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지 않으신 방편들 - 이 일에 있어서 실수를 범한 다른 이들 - 이 이일을 위해서 신자들에게 약속된 성령(겔 11:19;36:26) -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모든 것 - 성령께서 죄를 죽이는 방식 (갈 5:19-23) - 죄 죽이기의 목적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여러 방식 - 성령의 역사의 방식과 우리의 의무

 

다음의 원리는 우리가 기초 본문으로 삼는 로마서 8:13의 말씀이 다루는 죄 죽이기의 위대하시고 주권적인 동인이신 분을 설명합니다. 곧 ‘영’으로 표현되신 분으로 입증된 바와 같이 성령에 관하여 진술하는 대목입니다.

성령께서만이 이일을 위해서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관여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방식들이나 방편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그 일을 효력있게 하시는 위대하신 장본인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1)쓸데없이 사람들은 다른 처방들을 구합니다. 그러나 다른 처방들을 통해서 치료받지 못할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서 제시된 방식들이 얼마나 여럿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보면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교황주의 종교 거의 대부분이 바로 죄를 죽이는 잘못된 방식들과 방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거친 베로 만든 복장을 입어 자신을 치장하지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서약, 의식, 금식, 고행, 훈화, 헌신의 책들을 다 같이 바로 죄 죽이기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9:3,6의 ‘무저갱에서 나와 사람을 괴롭게 하여 그들 사람들로 죽기를 구하나 죽지는 못하게 하는 황충들’이 바로 로마교화의 탁발 수도승들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탁발 수도승들이 쏘는 설교를 하여 죄에 대한 회오감을 갖게 하여 사람들을 괴롭게는 하나 죄를 치료하고 죄를 죽이는 처방은 얻지 못하게 하는 이들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들을 계속 영구한 고뇌와 공포 속에 몰아넣고 그 양심을 괴롭게 하여 죽고 싶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점이 그들 종교의 실체요 그들이 자랑하는 진상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피조물인 사람들을 반은 죽게 만들려고 애를 쓰면서도 그 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는 무식하여 공력, 곧 공덕으로 확신하여 얼마나 무서운 독을 섞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여분의 공력을 그런 식으로 칭합니다. 정말 교만하고 야만적인 호칭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방식과 그들의 죄 죽이기의 실상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더 알아보려고 합니다(8장).

그들이 죄 죽이기를 위해 고안하여 사용하였던 방식들과 방편들을 여전히 견지하며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더 많은 복음의 빛과 복음을 아는 지식을 가졌을 것 같은 이들 중에서 그러한 주장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이 최근에 죄 죽이기를 위해 그러한 방향으로 여러 제안을 하였는데, 다른 이들이 그 제안들을 열렬하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프로테스탄트라고 자처하였습니다. 3,4백 년 전 교황주의적인 경건주의자로 불리워야 합당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나 그분의 성령에 대해서 최소한의 언급도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외적인 열심과 단순한 율법적 의무들만을 가지고 죄 죽이기의 편리한 방편들이라고 번지르한 허영기 있는 말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태를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신비에 대해서 얼마나 낯선 상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이 그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한 가지 죄도 진실로 죽이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 중 몇 가지를 다음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i) 그들이 바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사용하고 주장하는 여러 방식들과 방편들 중 많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을 위해 지정하신 적이 전혀 없는 것들입니다. 종교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거친 복장이나 서약이나, 고해성사나 절제나 수도승의 생활 과정 등, 그와 같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누가 네 손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요구했느냐?” 그리고 “너희가 헛되이 나를 예배하고 교리를 위해 사람들의 유전들을 가르치고 있구나.”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자학적이 여러 가지의 방안들도 다 같은 성질의 것들입니다.

(ii) 그들은 하나님께서 방편으로 지정하신 것을 적당한 장소와 질서를 따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나 금식이나 깨어 묵상하는 것이나 그와 같은 것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그 나름의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로 보아야 하는데도 그러한 것들을 샘 근원 자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목적을 이루는 효력을 내고 목적을 달성하는 데 수단으로 성령님과 믿음에 부속되어 있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행되는 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 자체가 목적을 이루어 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일 많이 금식하고 많이 기도하고 여러 시간을 계속해서 그러한 일을 수행하면 일이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경우에 사도가 어떤 이들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저희는 항상 베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그래서 저희가 항상 죄를 죽인다고 하나 진정으로 죄를 죽이는 일에는 전혀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희는 여러 방편을 써서 자연인을 죽이고, 급기야는 우리가 지상에서 영위하는 자연스런 삶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일에 관한 복음적인 지식을 모르는 이들의 보편적인 실수입니다. 세상에 들여진 미신이나 자의적인 숭배의 대부분은 그 저변에 바로 그런 오류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고대에 수도원적인 헌신의 방식을 주도한 이들 중에는 얼마나 무서운 단식을 감행했는지요! 저희는 얼마나 극단적인 고통에 자신들을 몰아넣었는지요! 저희의 방식들과 원리들의 근저를 추적하여보면, 다름 아닌 이러한 오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곧 그들은 엄격한 죄 죽이기를 시도하면서 옛 사람의 부패가 아닌 자연인을 망쳐놓았고 사망의 몸 대신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을 망쳐놓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보이는 본래의 로마교회도 그 일을 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죄책도 이기지 못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즉시 자신과 하나님께 약속하기를,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않겠으며 말씀을 지키고 한동안 기도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가 남아 있고 죄의식이 아직 남아 있을 동안만 그리합니다. 여러 의무들은 건전치 못한 영혼을 위해서는 훌륭한 식단입니다. 그러나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의약은 결코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먹는 고기가 약으로 변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고기가 그런 큰 작용을 나타내리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일함으로 땀을 흘려 그 병증을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영혼을 속이는 이들은 그러한 것을 시도합니다. 우리가 뒤에 가서 그 문제를 다루어 볼 것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의 본질 자체만 가지고 보더라도 이상에서 생각한 방식들 중 그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함이 입증됩니다. 그 일에 수반되는 것들이 하도 많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전능한 힘이 요청됩니다. 뒤에 가서 그 점이 분명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2) 그러니 그 일은 성령이 역사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i)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돌 같은 마음, 곧 완고하고 교만하고 모반적이고 불신앙적인 마음을 제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죄 죽이는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실 것이란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에스겔 11:19절과 36:26에서 “내가 그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돌 같은)마음을 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방편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때에 이 일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사 57:17,18).

(ii)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물’로부터 우리의 죄 죽이기 전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되고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은혜든지 시작과 진보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주어지는 모든 공급과 지원은 다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 안에서, 신자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죽이기를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그리고 우리의 회개에 있어서 우리의 죄 죽이기는 결코 적은 부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약속을 받으신 후” 그 목적을 위해서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행 2:33). 터툴리안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속에서 이루실 일들을 하도록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d제가 주도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더 가까이 이해하게 해 줄 것입니다.

첫째 질문과 해답은 이러합니다.

질문 : 성령께서 죄를 어떻게 죽이십니까?

해답 : 보편적으로 세 방식으로 죽이십니다.

(1) 성령께서 우리 마음이 은혜로 흘러넘치게 하시고, 육체와 육체의 열매와 그 열매들의 원리들에 반하는 열매가 넘치게 하심으로 죄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대입시켜 놓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는 “육체의 열매는 ...”이라고 말하며, 22-23절에서는 “성령의 열매는 ...”이라고 말하여 그와 정반대 되며 다른 종류임을 말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속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고 아울러 육체의 열매도 풍성하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24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25절에서 그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다시 말하면, 우리 속에 성령의 이 은혜를 넘치게 하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는 바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래서 그 둘 다 한 사람 속에서 같은 강도와 같은 높이로 존재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사도가 말하였는데(딛 3:5), 그거야말로 죄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방식입니다. 성령께선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들 안에서 자라고 번성하고 왕성하고 넘치게 하십니다. 물론 그 은혜들은 육체의 모든 열매, 잠잠하게 있든지 아니면 번성하여 드러나든지 간에 내주하는 죄 자체를 대적하고 멸하는 은혜들입니다.

(2) 성령께서는 죄의 뿌리와 습관에 ‘진정한 물리적 효능’을 발하여 그것을 약화시키고 멸하고 제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사 4:4)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정욕을 소멸하고 멸하시는 영이십니다. 전능하신 효력을 발하시어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십니다. 그런 종류의 일을 시작하시기도 하시고 그 정도를 더하여 게속 그 일을 수행하여 나가십니다. 그래서 정욕의 뿌리 자체를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

(3)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끌어 들이시고,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하시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교통하게 하시고, 그 고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런 일을 처음 시작하신 후에 계속 그 일의 정도를 높여 행해 나가십니다.

둘째 질문과 해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 : 성령께서만이 그 일을 하신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까? 성령께서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니, 전적으로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하고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해답 : 1.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은혜와 선한 일들이 다 성령의 것이니 그 일이 성령의 일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하십니다(빌 2:13).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이루십니다(사 26:12). 또한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살후 1:11; 골 2:12).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간구의 영”이십니다(롬 8:26; 슥 1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해답 : 2.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 죄 죽이기를 하시되 우리의 ‘순종’의 행위를 잠잠케 할 정도로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대하여 일을 하시되, 우리가 성령의 그 역사를 수용하기에 합당하게 될 정도로그 일을 하십니다. 곧 우리 자신의 자유롭고 자원하는 순종을 침해하지 않은 범주 내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해와 의지와 양심과 정서에 역사하시고 그것들의 성질에 부합하게 역사하십니다. 곧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억지를 가하시거나 우리 없이 혼자서’ 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은 그 일이 용이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지, 그 일에 손을 떼고 게으름을 피울 하등이 구실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가련한 영혼들의 한없이 어리석은 수고를 생각하며 비통할 뿐입니다. 죄에 대한 회오감이 들고 자기들의 죄책감의 세력을 버텨낼 수 없어 수를 셀 수 없는 복잡한 여러 방식들과 의무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세워 죄를 계속 억제하려는 허사를 경영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승리 없는 전투를 벌입니다. 전쟁은 벌이나 평강은 얻지는 못하며, 평생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저희는 떡이 아닌 것을 위하여 자기들의 힘을 소진하고, 유익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어느 불쌍한 인생들이 끼어들지라도 가장 서글픈 싸움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자각하고 회오감의 세력 안에 있는 영혼이 죄와 맞싸워야 한다는 강압감을 가지게 되지만 싸울 힘은 전혀 없습니다. 싸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는 못합니다. 저희는 마치 죽일 목적으로 들이댄 원수의 칼에 찔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율법’이 그들을 다그칩니다. 죄가 그들 뒤에서 달려듭니다. 때로는 저희가 죄를 전복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먼지를 일으켜 죄가 보이지 않게 한 것뿐입니다. 저희는 이 본성적 두려움과 슬픔과 고뇌의 정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런 두려움과 슬픔과 고뇌의 정서들이 죄를 이겼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실은 죄를 건드리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말입니다. 그 때쯤 냉정을 되찾게 되고 다시 그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죽였다고 생각되었던 바로 그 정욕이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니 애를 쓰고 힘을 써도 아직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인 경우가 그렇게 서글프다면, 이 모든 것을 무시하며 영구적으로 죄의 권세와 지배하에 있는 것은 그렇게 사랑하며 아무런 마음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상태는 어떠하겠습니까? 저희는 육체를 위해서 충분한 조건을 제공하여 육체의 정욕을 채우도록 하는 일 외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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