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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5장)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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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강론의 주도적 의도 - 양심의 제일 주요한 경우를 신술함 - 어떤 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봄 - 그 어떠한 죄도 이생에서는 완전히 멸하지 못함 - 죄 죽이기가 어떤 본성적인 원리를 개선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님 - 그 본성적 어떤 원리를 다른 것으로 전환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님 - 죄를 정복하는 경우를 그 죄의 종류와 때의 경우로 알아봄

 

이런 것들을 전제하여 놓았으니, 이제 저는 신자들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이 일에 자신들을 드리게 될 때 일어나는 어떤 문제들과 실제 경우들을 다루고자 하는 데 주도적인 의도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나머지 내용의 제목이요 나머지 모든 내용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사항은 이후 계속되는 제안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이면서 자기 자신 속에 강력하게 내주하는 어떤 죄가 있어 자기를 그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알고는 그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합시다. 또 번민에 사로잡혀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여러 의무들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영혼이 파리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또한 그 마음에 평안이 없고 양심은 가책을 느끼고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강퍅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요? 이 죄와 정욕과 불안, 또는 부패를 죽이되, 완전하게 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데 힘과 능력과 평안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정도로 죽이려면 어떠한 경로를 견지해야 할까요?

이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할 것입니다. 첫째로 그것이 어떠한 죄든지 ‘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되, 소극적인 방식과 적극적인 방식으로 죄를 죽이는 것을 보여 주려합니다. 또 그러한 기초 안에서만 실수를 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여드리겠습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이든지 무슨 죄라도 참되고 신령하게 죽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보편적인 방향을 제시해 드리려합니다. 셋째로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들을 묘사하여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 요점을 숙고해 나가는 전반적인 과정 속에서 죄 죽이기의 교리를 보편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오직 제가 다루고 있는 바, 앞에서 제안한 특별한 경우를 지적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 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드립니다.

(1) 어떤 죄를 죽인다는 것은, 그 죄를 철저하게 죽이거나 뿌리까지 뽑아 완전하게 멸하여 더 이상은 그 죄가 우리 마음에서 발붙이거나 거처를 갖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목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그러한 일은 완성해 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죄라도 죽이기 위해서 자신을 진정으로 매진시킬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어떤 죄를 멸할 목적을 가지고 의도하고 바라야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마음이나 삶 속에서 그 죄의 뿌리나 열매가 나타날 여지를 완전하게 없애려고 해야 합니다. 영원토록 더 이상 마음을 산란하게 하거나, 소리를 치거나, 부르거나, 유인하거, 시험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죄를 죽이고 싶어는 합니다. 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목적으로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죄를 이기는 놀라운 성공이나 탁월한 승리를 이룩하여 사람이 그 죄를 거의 부단하게 이길 상태에 이르기를 목표하는 일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죽이고 멸하는 일은 이생에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을 바울이 우리에게 확신시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 그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요, 신자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성령의 모든 열매들에 있어서 그를 추종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에 입각하여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자신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15).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목표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완전하지 못하였고, 다만 계속 좇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여전히 비천한 몸을 가지고 있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21). 우리도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최선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일에도 온전하지 못하게 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최선입니다(골 2:10).

(2) 죄를 죽인다는 것이 어떤 죄를 위장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외적인 모습으로 어떤 죄를 짓는 일을 버리면 사람들은 아마 그 사람은 변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에 지은 불의에다가 가증스런 외식을 첨가하여 이전보다 지옥에 거기에 더 확실한 길로 들어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는 전에 비하여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더 거룩한 새로운 마음이 아니라 더욱 간교한 마음입니다.

(3) 죄를 죽이는 것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개량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인 체질이 이지적이라서 다른 많은 이들 같이 과격한 감정이나 돌출적인 포학한 행동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훈련을 통해서 그의 천성적인 기질이나 성질을 계발하고 개선하고 그들의 신중성과 사려 깊은 성향을 계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나 다른 이들이 볼 때에도 죄를 잘 죽이는 자들로 보일 것입니다. 실상은 그들의 마음에 아마 모든 가증한 것들이 가라앉아 숨어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이는 거의 매일 노와 분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는 평생 그런 노와 분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고,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그 죄를 더 죽이는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천성적인 기질만으로는 생명도 활력도 주지 못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죄를 죽이는 일은 힘쓰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전념하고, 불신앙과 시기나 그러한 영적인 죄에 착념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자기들에 대한 더 나은 관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4) 죄를 변형만 시킨 경우에는 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마술사 시몬의 잠시 동안 마법을 놓고 있었으나, 그를 부추기는 탐심과 야심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다른 방식으로 활동할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에게,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3)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네가 신앙고백을 하였고 네 마법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네 욕심이 네 속에서 이전과 같이 힘이 있구나.” 정욕은 같았지만 변형만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전의 쓴 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심이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욕심이 분출되어 나오지 못하게 단도리를 하고, 늘 하던 대로 갑자기 도발하지 못하게 각별하게 신경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다른 구명을 통해서 그 동일한 습관이 터져 나와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쏘는 상처를 유하게 하고 치료하여 이제는 나았다 생각하였는데, 금방 자기 살에 종기가 나서 같은 고름이 나오고 다른 곳에는 상처가 나타나게도 되는 경우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변형은 외적으로 달라지기는 하지만 흔히 은혜에 대해 전적으로 문외한인 사람들인 경우에 임합니다. 사람이 관계나 이해관계나 의도에 있어서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 중에서 그러한 변형의 효력을 낼 수는 있습니다. 사람의 과정 속에서 천성적인 진보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의 체질이 아주 달라져 그와 같은 변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든 이들은 젊은 날의 욕심을 계속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라도 그러한 젊은 날의 욕심 중에서 어떤 것도 죽인 것은 아닙니다. 욕심을 다른 것으로 바꾼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섬기다가 그를 떠나고 다른 이를 섬기게 되는 경우와 같지요. 세상을 자랑하고 바리새주의적 외식에 탐닉하고 있었고, 허영에 자기를 몰입시키는 자가 그런 이을 그만두고 다른 이들을 경멸하는 쪽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죄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섬길 주인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죄의 노예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5) 간헐적으로 죄를 이긴 경우 때문에 죄를 죽인 것이라고 말할 는 없습니다. 어떤 죄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 다음의 두 경우나 기회에 죄를 죽인 것 같다는 느낌을 스스로 가질 수 있습니다.

(i) 어떤 죄가 갑자기 분출하여 나와서 자기의 평안을 깨고 자기 양심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수치에 처하게 될까 보아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분명한 노를 받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일깨우고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그가 놀라고, 죄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게 되고 자기 목숨을 위해서 울부짖게 되고, 그래서 정욕을 지옥같이 혐오하여 초긴장하여 자신을 지킵니다. 그의 전인(全人), 영적이든 천성적이든 간에 그 사람 전체가 각성을 받고, 그래서 죄가 움츠리고 나오지 못하고 그 사람 앞에 죽은 자 같이 꼼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자가 밤에 군부대에 접근하여 주요한 인물을 죽였을 때, 즉시로 호위병들이 잠에서 깨고 사람들이 일어나고 그 원수를 추적하여 조밀한 수색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짧은 시간에 그 소요가 진정되기까지 잠잠히 자신을 숨기고 있게 됩니다. 아니면 죽은 자 같이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괴한은 호시탐탐 같은 비행을 자행할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 속에 있었던 죄가 어떠했던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고린도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 죄를 멸하려고 총출동하였을 때 말입니다(고후 7:11). 자기의 정욕으로 인하여 실제로 죄가 분출됨으로 말미암아 자기 양심과 평안과 신용에 상처를 받게 된 사람의 경우에 나타나는 바도 그러합니다. 그 죄가 대항해 모든 세심함과 의분과 바람과 두려움과 복수심이 총 궐기하여 일어납니다. 그런 때에 정욕이 한동안 잠잠하고 그런 것들 앞에서 멈칫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급하게 관심을 두던 그러한 일이 끝나고 심리가 지나가면, 그 도적은 다시 살아 나타나고 언제나처럼 자기 일에 분주합니다.

(ii) 어떤 판단이나 재난이나 심한 환란의 때에 사람의 마음은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과 위험들에서 달아날 생각과 궁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죄책감에 처한 사람이 결론을 내리는 바와 같이 그러한 일은 죄를 버림으로써만이 행해질 일입니다. 죄를 버려야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누립니다.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그 죄책감에 빠진 사람을 쓰디쓰게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의 노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런 때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다시는 죄의 노예로 자신들을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 죄는 잠잠하고 소동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 죄를 죽인 것같이 보입니다. 실로 그러한 경우라도 죄는 어떤 상처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죄의 활동과 일치되지 않은 생각들과 함께 죄가 자기를 표현할 도구가 되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가들이 옆으로 비켜나면 죄는 이전의 생명력과 활력을 다시 회복합니다. 시편 78:32-38 속에 지적된 죄악들은 제가 말한 정신구조를 충분하게 완전하게 그려주는 경우입니다.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 반석이시오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 아니하였음이로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찾고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 자기들의 죄를 버린 일에 대하여 마음의 온전한 의도를 가지고 그리하였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돌이켰다’는 말 속에 그 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돌이키거나 돌아오는 일은 죄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입니다. 저희가 간절함과 열심과 진지함을 가지고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죄는 그러한 식으로는 조금도 죽여지지 않았습니다(36,37). 많은 이들이 화난의 날에 그러한 낮아짐의 상태를 보입니다. 신자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큰 속임수가 자주 그러한 낮아짐의 상태 속에서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들은 그 밖에 다른 많은 방식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속이고, 자기들의 정욕이 여전히 살아 힘이 펄펄 나고 기회만 있으면 소동을 일으키고 평안을 깨버리는데도 그 정욕을 죽였다고 상정해 버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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