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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제 6장)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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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죽이기를 구체적으로 묘사함 - 그 죄 죽이기의 구체적인 여러 부분들과 정도들 - 1. 죄의 뿌리와 원리를 습관적으로 약화시킴 - 시험하는 정욕의 세력 - 세력의 정도가 사람이나 때에 따라서 차이가 남 2. 죄를 대항하여 부단하게 싸움 - 그 일의 여러 부분들 3. 죄를 대항하는 싸움에 성공하는 것

 

다음의 숙고할 내용은 하나의 죄를 죽인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다루면서 구체적이 방안들을 위한 길도 마련될 것입니다.

 

1. 습관적으로 죄를 약화시킴에 대하여

 

모든 정욕은 부패한 습관이나 성향, 계속 마음을 악으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정욕도 진정으로 죽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한 묘사가 이러합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는 항상 죄로 기울어지는 강한 성향의 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본성적인 사람이 어떤 하나의 정욕을 항상 영구적으로 추구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 같이 만족하기를 원하며 부르짖는 정욕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그것들을 다 섬겨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죽여야 할 정욕이나 온전하지 못한 것이 있어 그 자체로 힘이 있고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어떤 실제적인 죄(아직 마음으로 생각해 놓은 형태로 자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소재에 있어서 죄가 되는)로 습관적으로 의지와 정서에 압박을 가하여 죄 짓게 하려 한다 합시다. 그리고 항상 상상력과 생각들을 자극하여 죄의 목표에 대해서 궁리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고 그 마음을 악으로 향하게 정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령은 죄악으로 향하여 있고 육체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롬 13:14). 어떤 죄악적이고 부패한 습관은 모든 천성적이거나 도덕적인 습관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많은 일들에 있어서와 같이 말입니다. 천성적인 습관들이나 도덕적인 습관들이 영혼을 유순하고 적당하게 그 영혼 자체에 맞게 적응시키려 한다면, 죄악적인 습관들은 포학하고 결렬하게 영혼을 강압적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가리켜 ‘싸우는’ 아니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벧전 2:11). ‘반역(反逆)하고’ 또는 ‘일어나 싸우되’ 그러한 행실과 그러한 행실 속에 통상적으로 존재하는 반감으로 싸우는 것이 바로 정욕입니다(롬 7:23). 효과적으로 싸움에서 성공하여 사로잡습니다. 큰 포악과 맹렬함의 모든 역사가 정욕에서 나는 것입니다.

정욕에 대해서 묘사하는 말씀(롬 7장)을 가지고 저는 정욕이 어떻게 이성과 지혜(mind, 이지理智)를 어둡게 하며, 죄의식을 몰아내고 이성을 몰아내는지 온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훼방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어떤 생각들이 능력과 감화들을 어지럽게 하되, 화염을 일으킬 정도로 모든 힘을 한꺼번에 쏟아 그러한 생각들을 제어합니다. 제가 그 점을 온전하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죄 죽이기에 있어서 제일 되는 일은 죄나 정욕의 이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포악과 열심을 가지고 자주 대적하여 일어나 본성적인 성향에 따라 소동하거나 격노하거나 유혹하거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약 1:14,15).

저는 지나치면서 하나의 경고나 원칙을 제시하고 싶을 것입니다. 모든 정욕마다 그 본성에 있어서는 동등하고 보편적으로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강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제한 조건 내에서만 그 점을 허락해야 합니다.

첫째로 어떤 한 사람 안에 있는 정욕이 다른 정욕보다 더 계발되고 고조되고 강화되어 뜻을 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정욕이나, 또는 종류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정욕이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힘과 활기나 넘치되 그 정도에 있어서 지극히 큰 상태에까지 발전될 수 있습니다. 삶의 경로나 기회를 따라 정욕이 그 사람의 천성적인 체질이나 기질과 잘 맞아 떨어지거나, 아니면 사단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일천의 방식들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정욕은 다른 정요들보다 더욱더 힘 있고 끈질기게 자랍니다. 아니면 같은 정욕이 다른 사람에게 작용하였을 경우보다 더 힘 있게 자랍니다. 그와 같이 정욕의 흐름들이 이성과 지혜를 어둡게 한 나머지 그 사람은 동일한 것들을 이전과 같이 알고 있지만, 의지에 작용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부패한 정서와 열정들이 제멋대로 의지 옆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욕은 특별하게 유혹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어떤 적당한 유혹이 한 정욕과 맞아 떨어지게 될 때, 그 유혹(시험)은 정욕이 새로운 생기와 활기와 포악과 격노함을 가지게 합니다. 전에는 감히 그럴 것 같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는 것 같았었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의도로 여러 경우들을 더욱더 확대하여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찰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필자가 쓴 또 다른 책자(저의 또 다른 저작<죄의 유혹에 관하여>)의한 부분을 바로 그 문제에게 할애하였습니다.

둘째로, 어떤 정욕들은 다른 정욕들보다 더 민감하고 더 과격하여 현저하게 나타나 보입니다. 바울은 음행의 부정과 다른 모든 죄들과 구별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그래서 그 죄의 동작은 다른 죄보다 더 현저하게 드러나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그와 같은 죄는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그 죄에 못지않게 습관적으로 주도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전인 속에서 그렇게 큰 소요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 속에서나 다른 이들의 보는 견지에서도 죄를 죽인 사람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 자신 속에는 그 음행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요 때문에 놀라서 소리를 지른 사람들 못지않게 정욕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음행의 죄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급하게 추한 죄 속으로 떨어졌던 사람들 못지않게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들의 정욕들이 영혼 속에서 이리저리 그러한 소동을 야기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더 고요한 심령의 체제로 작용하는 정욕들입니다. 본성의 구조 자체는 그런 정욕들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것들에서와 같이 세심한 신경을 쓰지는 않습니다.

죄 죽이기에 있어서 제일 되는 일은 이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 습관이 이전과 같이 강압적으로 마음을 산란케 하지 못하게 하고, 유혹하여 마음을 빗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의 고요를 깨뜨리고 복잡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죄의 활력과 생기와 민첩함과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고 바울은 표현하였습니다. 정욕에 힘과 세력을 주고 날마다 죽을 몸을 후패하게 하는 그 정욕의 피와 기운을 제거하는 것입니다(고후 4:16).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처음에는 기를 쓰고 큰 힘과 능으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피와 기운이 빠져 소진되면 기를 쓰는 힘도 약하게 되고 빈도수가 적어지고 울부짖는 소리도 낮아지고 목도 쉬게 되어 남이 듣지 못할 정도가 되어 갑니다. 그처럼 사람이 처음에 어떤 정욕이나 건전치 못한 심정을 다루려고 할 때에 그 정욕이 포악하게 힘을 발휘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의 만족을 얻으려고 간절함과 참아내지 못한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죽이는 일을 통하여 그 정욕의 혈기가 잦아지게 되고 움직임이 둔해지고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행동도 간헐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마음속에서 그 소리를 듣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마지막 운명의 외침을 통해 큰 힘과 기운을 표출하려는 듯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 동작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특히 그거서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단속을 하면 그러합니다.

사도는 그것을 로마서 6장 전체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6절에서 그러합니다. 그는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에 단단히 조여 매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입니까? 사망의 몸이 멸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죄의 힘이 약화되고 점점 더 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곧 죄가 이전과 같이 우리로 죄의 노예로 섬기게 하는 효력을 발생할 정도로 우리를 유인하거나 강압하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이는 육적이고 육적 정서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향한 소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뿐 아니라, 본질상 우리의 지성과 의지 속에 있는 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어지럽게 하고 괴롭게 하든지, 그것이 어떤 방식의 활동을 통해서든지, 악으로 기울어지게 압박하거나 선한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간에 법칙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투쟁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목할 것이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열매를 맺은 쓴 열매를 털어내되 지칠 때까지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힘차게 땅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 눈에 보이는 열매를 털어 내더라도 다른 쓴 열매를 맺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식의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그들은 정욕이 분출되거나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헌신합니다. 그런데 원리와 뿌리는 그대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찾아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 죽이는 이 일에 있어서 진보를 거의, 아니 전혀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2. 죄를 대항하여 싸우는 간헐적인 싸움과 투쟁에 대하여

 

항상 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 죽이기의 진보를 조금도 이룩한 것은 아닙니다. 죄가 강하게 힘이 있을 때 영혼은 그것을 대항하여 머리를 들 수조차 없게 됩니다. 영혼이 신음하고 탄식하고 애통하고 괴로워합니다. 다윗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죄를 내어 쫓는 일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나의 죄악이 네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사오며”(시 40:12). 다윗이 죄를 대항하여 싸우기에는 얼마나 미약하였던가요? 죄를 대항하여 싸우는 일에는 여러 일들이 요청되고 수반됩니다.

(1) 사람이 자기가 다루어야할 원수가 있음을 알고, 그 원수를 주목하고, 그 원수를 진실로 원수 그대로 생각하여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멸해야 한다는 의식이 그 죄 죽이기에 요청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와 겨루는 일은 격렬한 일이고 모험적인 일입니다. 그 일은 영원에 속한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요에 대하여 미약하고 간헐적으로 약하게 생각하면, 그것이 그들의 정욕을 죽였다는 큰 표징은 전혀 되지 못합니다. 아니면 그들의 정욕이 죽여지고 있는 중이라 조짐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는 것”(왕상 8:38)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어떤 다른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가슴속에 지니고 다니는 그 최대의 원수를 아는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자기들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할 용의를 가지고 잇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자기들을 책망하거나 권면함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대하 16:10).

(2) 그 원수가 일을 성공시키는 길들과 궤계와 방법들과 이점들과 기회들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는 것은 이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원수들을 다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수들의 도모와 의도를 알아내고 그들의 목적을 간파해 내고, 이전에 어떤 방식과 무슨 방도를 통해서 그 원수들이 이겼는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원수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최대의 기술을 행동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생략해 버리면 전쟁 (사실 인간의 지혜와 주밀함이 최대로 동원되는 일이 전쟁임)을 수행하는 모든 일이 어리석은 것이 될 것입니다. 정욕을 진실로 죽이는 자들은 정욕을 그런 식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욕이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거나 미혹하거나 꼬드길 때뿐 아니라, 정욕이 뒤로 물러나 있을 때에도 절말 그 정욕을 죽이는 자들은 항상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원수야. 이것이 바로 그 원수의 방식이요 술책이냐. 이런 식으로 고지를 점령하여 이전에 승기를 잡았지, 미연에 방지를 하지 않으면 또 나를 이기려고 할 거야.’ 다윗도 그랬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실천적이고 영적인 지혜의 가장 셈세하고 가장 탁월한 부분들 중하나는, 바로 내주하는 어떤 죄든지 간에 그 죄의 간계와 술책과 깊이를 간파해 내는데 있습니다. 곧 어떤 경우에 그 죄가 가장 큰 힘을 쓰는가, 그 죄가 어떤 이점을 이용하여 기회를 타서 시험을 하였던가, 어떤 호소와 핑계와 논리로 유혹하던가, 어떤 색깔과 전략과 구실로 나왔던가를 알고 숙고하는 것입니다. 또한 옛 사람의 간계을 대항하시는 성령의 지혜를 Tm고, 이 뱀의 똬리 트는 것과 슬며시 빠져나가는 자국을 추적하고, 그 뱀의 가장 은밀하고(일반적인 마음의 구조로는)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들을 보고 즉시 “이게 네 옛 방식과 경로다. 나는 네가 무엇을 목적하는지 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서 항상 대비하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싸움의 선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3. 죄 죽이기 ‘성공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어떤 정욕에 대해서건 제어하는 데 자주 성공을 하면 그거야 말로 죄 죽이기의 또 다른 부분과 증거입니다.

 

여기서 제가 성공이라고 할 때 단순하게 죄가 나타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죄의 기를 꺾어 놓는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대항하여 이기고 끝까지 죄를 추적하여 철저하게 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때에든지 죄가 작용하고 있고 유혹하고 있고 육체의 생각을 부추기어 정욕을 이루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마음이 즉시로 죄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사랑 앞으로 가져가고, 그것을 정죄하고, 죄를 추적하여 최대한으로 타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상태와 조건에 이르러 정욕이 뿌리와 원리에서 약화되고, 그 정욕의 동작과 활동이 이전보다 더 약하여짐으로써 그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방해거나 그 사람의 평안을 방해하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합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고요하고 진지한 마음의 구조 속에서 죄를 간파하고 대항하고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합시다. 그럴 경우 어느 정도 죄를 죽였다고 저는 말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죄의 모든 대적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평생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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