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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승천과 재림의 약속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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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승천과 재림의 약속

본문: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로시리라 하였느니라”

 

1. 본문 해설

 

1) 올려져 가시니(9)

 

- 승천에 관한 기사는 눅 24:50-51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베다니 앞까지 데리고 가시어 제자들을 축복하신 다음 하늘로 돌아가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끝까지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한 번 잡은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끊어 놓을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8-39)

 

- 그런데 ‘올려져 간다’는 표현에 대해 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위에서 끌어올렸다’인데, 이것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눈에 보이는 상태에서 수직 상승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지각이 가능하지만 지각을 초월한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지각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승천의 방법이 아닙니다. 누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독교가 어떤 복음을 가졌느냐,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팔레스틴 어느 지역에서 일부의 사람들만 아시도록 승천을 하신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방식을 통해 주님의 초월성과 전 우주적인 역사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2) 흰 옷 입은 두 사람(10)

 

- 천사들입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은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창세기 18장 2절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졌을 때 분명히 세 사람이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더 추가되어 네 사람이 가마솥에 있음이 느부갓네살 왕의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단3:25)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무덤으로 찾아온 여인들에게도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눅24:4)

- 천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받들고 섬기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첫째, 성도들을 일상적으로 돕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둘째, 위험에서 보호하고 용기를 줍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27:23-24)

  셋째, 늘 지켜 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딤전5:21)

  이외에 기도 응답에 관여하고, 전도활동을 독려하는 일들과 사망 시에는 의인을 돌보는 일에 참여합니다.

- 특히 흰 옷을 입었다는 표현은 하늘나라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있을 때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마17:2). 예수님 무덤에 나타난 천사는 흰옷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막16:5).

 

3) 갈릴리 사람들아(11)

 

- 여기서 천사들이 제자들을 보고 ‘제자들아’ 혹은 ‘사도들아’ 이렇게 부르지 않고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부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아직까지 구약시대에 속한 사람들이고, 복음적인 차원에서 보면 철저히 ‘육의 사람’입니다.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운 능력을 힘입고 모든 의식에서부터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4)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11)

 

- 이것도 책망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제자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광경이 무엇입니까? 그 의미를 똑바로 아는 제자라면 어찌 가만히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쳐다만 보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넋을 잃고 있는 것을 천사가 책망하는 것입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는 하나남의 꾸중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신계서 오셨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십니다.

-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어째서 하늘만 쳐다보느냐?”하는 책망에는 우리가 가진 양극단의 문제를 꾸중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한 쪽은 땅만 쳐다보고, 다른 한 쪽은 하늘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땅만 바라보는 부류를 현세주의, 기복주의자라 한다면 하늘만 쳐다보는 부류는 이상주의자들이고, 신비주의자들입니다.

- 땅의 신앙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 잘 살고 건강하고 형통한 삶을 살아야 정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가장 저주 받은 곳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병들어 아프고 소외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병원입니다.

- 반면에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현실세계를 무시하거나 탈피하려는 경향을 가집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왜 직장을 안 다니느냐? 애들은 누가 키우고 학교는 어떻게 보내느냐? 뭘 먹고 사느냐? 하면 대답이 천편일률적입니다. 다 우리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답니다. 이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장한다’하는 거예요. 솔직한 얘기로 이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양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 갖추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5)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 그런데 왜 돌아가시느냐 하면 다시 오시게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반드시 마지막 때에 종말을 완성하기 위해 재림하시기 위해 잠시 처음 자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때에도 지금 올라가시는 그대로 오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 신화적인 일이거나 비가시적인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목격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를 통해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건도 역사적 사건이요,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도 역사적 사건이듯이 재림의 사건도 분명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 본 그대로 오신다’는 뜻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같은 모양과 성정을 가지신 채 이 땅의 사람을 사셨듯이 재림의 때에도 우리와 같은 모양과 성정을 가지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재림에 대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가집니다.

  첫째, 언제 오시는가?

  둘째, 어떻게 오시는가?

  세 번째, 정말 오시는가?

- 첫째 둘째의 문제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언제 오실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떻게 오실지는 지금 말씀한대로 승천할 때 제자들이 본 그대로 오십니다. 다시 말해 공중에서 구름을 타고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오십니다. 물론 이것은 손오공이 타는 구름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쉐키나’ 즉, 영광중에 오신다는 것입니다.천군나팔소리와 함께 그렇게 오십니다. 계1:7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 재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유한다면 시험을 하나로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은 시험감독관이라고 합시다. 초림은 시험지를 나누어 주러 온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험지를 들고 시험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이 다 치루어지면 반드시 시험지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 분이 바로 재림하실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때 채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심판을 의미합니다.

- 문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가? 입니다. 시험을 치면서 장난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치면서 안일한 자세로 하지 못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온 마음과 혼을 집중한 채 무섭고 떨리는 마음 즉 경건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말을 에비하시고 종말의 징조를 가르쳐 주시고 종말에 심판을 경고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험 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루는 기본적인 자세, 태도, 열과 성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을 천직의 명령으로 알고 오늘의 삶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종말을 이야기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 성경에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갔다고 고발합니다. 노아의 일관된 멸망의 예고를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 청천 하늘에 무슨 홍수냐 하고 비웃으며 살던 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우리도 땅에서 먹고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 일이 죄가 아니라 문제는 그런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땅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 성경에 보면 에녹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아니, 365년을 동행했다고 해야지 왜 300년일까? 알고 보니 에녹이 65세 때 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이 므두셀라예요. 성경에서 가장 장수한 인물입니다.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뜻이 뭐냐하면 ‘ 이 아들이 죽으면 세상이 끝이다’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65년 만에 아들을 하나 주셨는데 이 아들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네요. 그러니 에녹이 어떻게 살게 됩니까?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게 될 것 같습니까?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누구든 절박해 질것이고 한 시간 한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65년 동안 아들이 없었을 때는 그냥 보통의 사람들처럼 땅만 바라보고 살았다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인생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에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까? 에녹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름의 뜻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것입니다. 에녹은 ‘가르치다. 증거하다’ 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그렇게 살아야 했지만 65년 동안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300년 동안 동행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 여러분,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떻습니까? 아니, 지금 당장 오시면 안 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지금 당장 보고 싶어 재림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고 힘들고 복잡하고 고단한 인생길을 벗어나고 싶어 할 수 없이 종말이라도 와서 확 바뀌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재림과 동시에 모든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궁극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최종 결단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심판이지만 구원받은 백성과 불신자의 심판은 완전히 다른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생의 결정을 받아 그리스도의 품에 안깁니다. 천국에서 누릴 상급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단과 그 사자들과 불신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의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절대로 불변하며 반드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질 역사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자, 우리는 교실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시험지를 다 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뭘 해야 합니까? 당연히 이름부터 씁니다. 그래야 채점을 받습니다. 이름이 명부에 올라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알기 쉬운 문제부터 푸는 것입니다. 안 되는 문제를 붙잡고 끙끙 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한 문제도 풀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지

요. 이것은 지혜로운 삶을 말합니다.

-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고생합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그 뜻은 ‘ 현명해지다’인데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는 지식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실제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지식, 쓸모있는 지식이요, 경험에 의해 축적된 노하우요, 강하고 확고한 마음에서 나오는 슬기로움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지혜가 제일이요, 지혜를 버리지 말라, 지혜를 사랑하라, 지혜가 너를 지키신다고 강조했습니다(잠4:6-7). 꼭 같이 공부를 해도 지혜있는 학생은 시험문제를 쉬운 문제부터 다 풀어놓고 다음에 어려운 문제를 풉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학생은 그냥 순서대로 풀거나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넘어가지 않고 그 문제 하나 푸느라 시간을 낭비합니다. 결국 나머지 문제는 시간에 쫓겨 대충 답을 적고 나오는 것입니다.

 

-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시험이자 숙제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숙제거리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에게 갑자기 일터로 가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험 준비하면서 내가 지금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가야 하는데 라는 고민을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어른이 해야 할 일과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직장인이 해야 할 일과 학생이 해야 할 일이 딸 있습니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도 요지경이 되어서 학생 신분으로 연예인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연예인 생활만 하다가는 결국 인기 덜어지고 나면 쫄딱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빈둥빈둥 놀게 되고 놀다보면 외롭고 적적하고 그러다 우울증에 걸리고 결국 심한 사람은 자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의 원인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본분을 잊어버리고 제 마음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산 결과입니다.

 

2. 결론

 

- 첫째, 하나님은 항상 ‘커먼 센스’(common sense) 즉, 상식이 있는 분입니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당장 할 수 있는 쉬운 결단이 무엇인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 점검하시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 둘째, 저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종말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에 종말의 징조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징조를 왜 말씀해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종말 직전에 우리는 여러 징조들을 목격할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징조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면 이런 징조들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잠을 자는데 아침저녁으로 집이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다음 날에는 벽돌 한 장이 떨어지고 그 다음 날에는 머리맡에서 10cm도 안 되는 거리에 벽돌이 떨어지고 그 다음 날에는 어디서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칩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뜻입니까? ‘아, 이 집은 안전한 집이 아니구나. 이 집은 영원히 살 곳이 못되는 구나. 더 좋고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고 이사갈 준비를 해야지요. 마찬가지로 종말의 징조가 보이면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은 우리가 붙잡을 가치가 없고 우리의 영원한 도성이 결코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개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말이 언제 오느냐, 어떻게 재림하느냐, 정말로 종말이 오느냐, 그 징조는 무엇이냐 하는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드립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회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부흥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이유를 꼽는다면 저는 아직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이 신자인 척 하고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잇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회심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심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사랑할 리 만무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지키겠다고 결단하며, 예배를 경건히 드리고 설교 말씀에 흠뻑 젖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여전히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산다는 징표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을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굳센 의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일은 회심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일은 목소리만 좋으면 될 것 같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부르는 찬송에는 기쁨이 없고 기름 부음이 없고 메마르고 황량하고 힘든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입니다.

 

- 하나님은 상식을 지키시고 나의 편이 되시어 나를 도우시며 나에게 적합한 사역을 주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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