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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지금은 기도할 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8. 00:26

본문

5주차. 지금은 기도할 때

 

본문: 1;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삼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 들어가는 말

 

성도는 세상에서 살면서 반드시 영적전쟁을 치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반면에 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른 기도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지침으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한편 성도라면 각종 기도의 현장에 서게 됩니다. 가장 많이 드리는 식사기도에서부터 개인적인 묵상과 침묵의 기도, 금식의 기도, 중보의 기도, 또 공동체 안에서 드려지는 합심기도와 통성기도, 작은 모임이나 큰 모임이나 가릴 것 없이 시작기도를 해야 하고, 특히 직분자라면 주일날 공적인 예배 때 경건한 대표기도 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는 기도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신비주의 기도법을 소개하고 확산시키고 있는데 이런 기도들을 통칭하여 ‘뉴 에이지’기도라고 합니다. 주로 퀘이커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내면의 빛을 통해서 깊은 기도를 드린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관상기도가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천주교나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기도법으로 최근에는 통일교에서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무아의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호흡을 중시합니다. 이런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달라스 윌라드 같은 이들은 기도할 때 ‘palm up, palm down' 하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호흡에 따라 손바닥을 위로 했다가 아래로 하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래로 하는 것은 마음을 버리는 ’정화‘라고 하고 위로 하는 것은 깨달음을 받기 위한 것으로 ’위로부터의 조명(illumination)'이라 합니다.

 

요즘에는 또 희한한 기도법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사도 운동가로 유명한 토드 벤틀리에 의해 소개된 이 기도운동은 일명 ‘소킹 프레이어’(soaking prayer)라고 합니다. 소킹이란, ‘흠뻑 젖는다’ 마치 배추가 소금에 푹 절여지듯이 ‘푹 빠지고 담가지다’는 뜻입니다. 토드 벤틀리라는 사람은 소킹기도를 ‘성령에 절이고 담가지는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 기도 중에 생명나무도 보았고 키가 6m나 되는 빛나는 천사도 보았으며 이 기도를 오래하면 ‘스피릿 가이드’(영적 안내자)가 나타나 접신을 이루어준다고 소개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관상기도의 결과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에는 이방종교에서 행하던 수행법이나 묵언법, 영성수련법, 기도법들이 무분별하게 수입되어 기도에 대해 무방비에 놓인 신자들을 미혹시키며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배우면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칫 자기만족이나 이상한 심령술에 걸린 것처럼 마취되는 기분에 휩싸이고 망상에 사로잡히는 등 신비주의적 체험의 현장이라는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성경적 기도에 미혹되면 그 사람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고 땅의 일을 점점 멀리하고 오직 하늘의 일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마침내 결과는 정신일탈이요, 가정파탄이며 이 사람은 기인이 되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 계룡산 아래이거나 깊은 산골 또는 굴속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종류의 기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도의 지침을 주님은 주기도문에 담아 두셨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오직 우리 기도를 받으실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뒤이어 하나님을 위한 3가지 간구와 자신을 위한 4가지 간구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기도문은 또 마6:33에 소개된 기도의 우선순위의 법칙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적 체험을 우선시하는 기도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신비한 영적 세계로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방종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지고 드려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드리는 것(율로게 토스)이 먼저고 받는 것(율로게 싸스)이 나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2. 본문 해설

 

오늘 본문은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에서 약 120여 명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 본문을 인용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이들이 끈질기게 마음을 합해서 기도했다는 이 보도는 실로 단순한 기사가 아닙니다. 지금 마가의 다락방, 이 현장은 구속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현장입니다.

 

그 가치에 대해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 살펴보면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책을 기록하잖아요? 그런데 그의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삶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승천하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까지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완결된 삶‘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일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과연 기독교회가 지향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지 십자가상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집단입니까? 물론 십자가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약화될 수 없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가치도 영원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필요없습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목표를 더 높고 먼 곳으로 끌어올립니다. 사도행전의 목적은 모든 사건을 하나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의 과정들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하지만 우리가 도착해야 할 곳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도착해야 할 곳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하나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이 나라를 세우는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다락방에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섭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다리며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핵심메시지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했으므로 마냥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기다리면 약속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약속을 절대로 바꾸시지 않으시는 분이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자,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바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1) 감람원과 예루살렘(12)

 

- 먼저 장소의 문제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중요한 사역을 명령하실 때 장소를 거론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에게도 굴속에 숨어 있지 말고 예후에게 가서 기름 부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바울에게 꿈에 나타나 유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제자들에게 모두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여기 정릉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밭을 일구는 일도 다 하나님의 명령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알다시피 감람산은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간 장소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곳입니다.(삼하15:23). 뒤에 솔로몬왕은 이곳에다 우상의 신전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에는 주로 이 산에다 유대인들이 초막을 짓고 생활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베다니가 이 산 곁에 위치하고 겟세마네 동산도 이 산 줄기에 붙어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장소가 감람산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지금 이 산에는 예수님승천 기념교회와 막달라미리아 기념교회 및 로마교회의 수도원과 성당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우리는 누가복음 24장 51절의 승천기록과 오늘 본문이 차이가 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다락방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글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이 차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한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갖 불법과 외식과 형식주의가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너희가 헐라고 했습니다. 성전이 더 이상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후 사도행전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제 <다락방시대>가 된 것입니다. 즉 가가 가정에서 다락방을 성전으로 삼는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장소에 상관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곳이 성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실제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전기’에는 주후 49년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후 로마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만 남게 되었고 그들은 유대인들이 모였던 회당이 없어지자 각 가정을 비롯한 모일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의 의미는 장소나 건물의 개념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즉, 싲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성전을 이룬다는 이 가치와 신념이 우리 신앙이요 예배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와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6에서 부활을 목격한 이가 500여 명이라 했는데 액면 그대로 추론하면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승천을 목격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한데, 어째서 지금 다락방에는 120명만이 모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점에 침묵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주관적인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활을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승천을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 존재가 바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평가한대로 죄인은 항상 악한 일만 생각하는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고하고 무지하며 불쌍한 사람은 ‘나는 죄인이 아니다’고 소리치는 사람입니다.

 

2)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12)

 

- 감람원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km의 거리입니다. 이 정도는 어린아이라도 어렵지 않게 걸어 다니기에 딱 좋은 거리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따라(출16:29)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를 200규빗(약 910m)으로 설정했습니다. 이 거리는 요단강 도하 시 법궤와 백성들의 간격이기도 합니다(수3:4). 특히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에 가기 알맞다는 표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 멀지 않은 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어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핑계거리를 아예 없앤 것입니다. 사단은 주일날 교회에 가는 발걸음을 계속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특히 주일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회에 못가도록 유혹합니다. 각종 핑계거리를 만들고 이유를 만들어 “목사님, 이 번 주에 어디를 가야하기에 교회에 못가요‘하는 말을 하도록 만듭니다.

 

3) 새로운 공동체(13)

 

- 13절에서 우리는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의 수는 대략 120여 명입니다. 여기서 4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명단과 사도행전의 명단의 차이가 있습니다. 4복음서에는 사도들의 나이 순서에 따라 이름이 나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사역의 순서에 따라 이름의 순서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이제 신약의 시대, 성령의 시대에서는 더 이상 혈연 중심의 질서가 아니라 사역중심의 질서로 재편되었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이제 진정한 가족은 같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베드로는 사역의 대표자로 일어나서 모인 무리를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제 우리 형제는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신자공동체가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가 지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은 땅의 차원에서 하늘의 차원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땅의 차원을 모두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개의 차원 즉, 땅과 하늘을 모두 가집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땅과 하늘이 끊어져 땅의 사람들이 하늘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리를 통해 하늘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땅의 소속을 벗어나 하늘의 소속이 된 것입니다. 하늘의 소속이 되었다고 해서 땅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소속으로서 땅의 일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위해 땅의 일을 각자 맡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대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사들이 외국에 파견된 것은 자기 일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구하는 대사는 더 이상 대사가 아닙니다.

- 또한 땅에서 일하는 모든 주의 백성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각자 맡아야 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것이 일이든, 재물이든, 자식이든 하나님의 것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에게 필요한 것은 네 가지 정신입니다.

 

  첫째,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위임의 정신>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지금 내 손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정신입니다. 만약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것을 훔친 도적이 됩니다. 그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잠시 하나님의 것을 맡았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왕의 아들을 보냈는데 종들이 자신의 것들을 빼앗길까봐 왕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청지기가 가져야 할 정신은 <충성>입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만약 일군이 성실하지 않고 게으르다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면 그는 충성된 일군이 아닙니다. 충성은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명기 말씀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살아해야 합니다. 사랑도 충성되게 해야 합니다. 충성은 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양이나 흉내만 내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속으로 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충성된 일군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언젠가는 배신을 합니다.

 

  셋째, 일군은 <지혜>롭게 일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이 밝혔듯이 우리는 주어진 일을 지혜롭게 하여 최대의 효과를 올려야 합니다.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썩이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과 은사들을 최대한 개발하여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혜롭고 유능하며 담대한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눈치 코치도 계발해야 합니다. 임기응변에도 강해야 합니다. 능청스럽게 대처하는 기술도 익혀야 합니다. 이런 것이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은 <인수인계>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권불십년이라 했듯이 권력가도 십년밖에 권력을 행하사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내가 맡은 것들을 후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이든 돈이든 자식이든 잘 맡아 관리하여 다음 적임자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지나치게 혈연사회로 조직되어서 자식의 문제 앞에서 모두 거꾸러지고 맙니다. 자식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니까 고부갈등이 생기고 난리법석이 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할 일은 자식을 잘 키워 사위나 며느리에게 잘 인수인계하면 그만입니다. 대개 불량품을 인수인계해 놓고 큰소리칩니다. ‘내가 이 정도로 정성을 들여 키웠는데 감히 니가 내 자식을 괴롭히다니’하고 되레 호통칩니다. 이쯤 되면 철면피도 이보다 더한 철면피가 없습니다. 불량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법에 따라 구속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여호수아에게 잘 위임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남은 사역을 사도들에게 모두 위임하고 가셨습니다.

 

-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120이라는 숫자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가 정확이 120명이었다는 것입니까? 일일이 다 세어보고 누가는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입니까? 하워드 마샬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에 144,000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12 곱하기 12에 1,000을 곱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12는 열두 지파 혹은 12사도를 상징합니다. 여기에 1,000을 곱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그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히브리인들에게 1,000이라는 숫자는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구약에 부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표현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120는 무엇입니까? 이 수는 히브리인들이 새로운 공동체 집단을 결성할 때의 최소수입니다. 즉, 가장 기본적인 최소수가 120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백성의 최소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즉, 척국백성의 샘플 혹은 모델로서 다락방의 인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문자적으로 숫자를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정말 넌센스 중에 넌센스입니다.

 

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14)

 

- 여기에 ‘더불어’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는 이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 말은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일관된 행동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간혹 행사를 할 때 꼭 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 합니다. 나무 위에 원숭이를 올려놓고 밑에서 흔드는 격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은 질서정연해야 합니다. 노래시켜 놓고 자기들끼리 속닥이면 안 됩니다. 열심히 노래를 들어주어야 내가 노래할 때 다른 사람이 내 노래를 열심히 경청하는 것입니다.

- 모인 사람들이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물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으니 성령님이 오시기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의 무리가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은 교회가 가져야 하는 두 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 교회는 철저한 성령의 새로 거듭난 것에 뿌리를 둔 공동체요, 그 가치관을 근거로 둔 공동체여야 합니다.

  둘째, 이제 나와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으로 나와 교회의 존재가 존립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정신입니다. 보통 우리 주변에 기도의 사람이라 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하느냐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거의 자기와 자기 가족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과연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요? 이런 기도를 매일같이, 평생토록 드린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까? 타종교에서는 이런 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경지인 것입니다,. 그저 쓸 것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고 아픈 것을 고쳐 달라 하고 없는 것을 주라고 하고 못하는 것을 이루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의 전부라면 그는 불당에서 드리는 불자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옆에 있으면 쉽게 말해서 영발이 팍팍 서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각이 벌써 범우주적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대인이요, 거인이요, 영웅입니다. 폼이 벌써 다릅니다. 왜냐구요? 기도를 통해 자기가 죽고 자기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3. 결론

 

1) 제일 교만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큰일 날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기에 자기가 죽지 않았고, 자기가 살았으니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목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생애를 시작하시고 기도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무엇이 필요하신 분이라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단 한 번도 자기를 아버지보다 더 앞세우거나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때로 평안도 있지만 때로 위기가 닥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을 직면합니다. 이런 일 앞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허황된 것을 잡으려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구원의 밧줄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평안을 누립니다. 기도해야 원수가 사라집니다. 기도해야 능력이 생깁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해 집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세요. 하나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가슴에 요동을 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하나님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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